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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2030여성] 너와 내가 만든 광장은
서울 종로구 경복궁 일대에서 1월11일 열린 윤석열 즉각 체포·퇴진 범시민총궐기대회에 참여한 한 시민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김영원 기자 [email protected]

12·3 내란’ 직후 광장에 모인 응원봉은 반민주적이고 반헌법적인 윤석열 정권의 퇴장을 요구하는 강렬한 불빛이었다. 그러나 직무가 정지된 대통령 윤석열은 계엄 선포 정당성을 강변했으며, 그에 맞춰 퍼져나간 음모론과 폭력 선동은 초유의 법원 습격 사태로 치달았다. 거대 극우 세력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충격적인 현실에도, 여전히 연대와 공감을 바탕으로 새 세상을 희망하는 불빛이 반짝이고 있다. 한겨레는 내란사태 두 달을 맞아 ‘탄핵 광장’에 섰던 20~30대 여성 30명의 목소리를 들어보았다.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해 거주지(수도권·비수도권), 직업(학생·직장인·주부 등), 고용 형태(정규직·비정규직) 같은 여러 조건을 바탕으로 1986~2005년생 23명을 선정했다. 이런 방식의 조사에서 배제될 우려가 있는 성소수자·이주배경·장애여성 등 7명을 더해 모두 30명을 1월12일부터 나흘간 전화로 심층인터뷰했다.

“또래 여성이 그렇게 많을 줄은 몰랐어요. 또래가 많으니 용기를 내게 된 거죠.”

경기도 광명시에 사는 대학생 유수현(가명·26)은 태어나 처음 나간 집회(2024년 12월7일 서울 여의도)가 낯설지 않았다. 촛불보다 밝고 찬 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아이돌 응원봉을 신나게 흔들며 케이(K)팝을 부르는 또래, 그보다 어린 여성이 많았기 때문이다. 수현도 아이돌 그룹 에스에프나인(SF9)을 “가성비 있게 덕질”한 추억이 있다. “음악방송 사전녹화에 가면 소지품을 자리에 두고 다녀요. 팬들끼리 서로 지켜준달까. 집회에서도 약간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무언가 잃어버려도 트위터(엑스)를 통해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집회는 처음이지만, 여성 인권을 위한 온라인 서명·청원엔 익숙하다. 2016년 서울 강남역 인근에서 20대 여성이 살해당한 사건은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페미니즘에 눈길이 갔다. 스무살 땐 사회가 요구해온 여성상에서 벗어나자는 ‘#탈코르셋’ 운동에 동참하려 쇼트커트를 했다.

2030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이나 아이돌 팬덤은 참여하든, 하지 않든 친숙한 문화다. 한겨레가 심층 인터뷰를 한 집회 참여 2030 여성 30명 가운데 20명은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했다. 다만, 페미니즘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인식 차가 있었다. 18명은 아이돌 팬덤 활동을 한 적이 있다. 집회 참여와 온라인 서명 등을 통해 사회 이슈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이들은 26명이었는데, 관심 의제(복수 응답)는 성평등(24명)을 비롯해 기후와 환경·동물(15명), 성소수자 인권(12명), 장애인 인권(11명), 비정규직 차별 문제(10명) 등 다양했다.

또래 간 상호호혜적 관계에 더해 타인 이야기에 ‘나’를 이입해 공감하는 특성은 “분하고 억울해서 간 곳에서 인류애 충전” “이런 따뜻한 시위는 처음” “맨몸으로 가도 될 정도로 화기애애한” 광장을 열었다. “재밌어 보이고, 엄청난 정의감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정치 참여는 “밖에 있으면 에너지가 쭉쭉 빨리는 집순이”까지 광장으로 불렀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두번째 탄핵소추안 표결이 열린 지난해 12월1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 모인 시민들이 가결 소식을 바라고 있다. 김혜윤 기자 [email protected]

불특정 다수와도 안전한

취업준비생 구은지(가명·27)는 국회의사당 앞 집회(12월14, 21일)가 “비교적 안전하다”고 느꼈다. 무대에 오른 한 여성이 “페미니스트가 외친다, 윤석열을 탄핵하라!”고 소리치자 여성들이 따라 외치는 광경도 그랬다. ‘너 페미지?’라고 묻는, 페미니즘에 적대적인 사회에서 이런 발언을 하는 건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한 은지는 “잘못한 일도 없는데 손가락질당할지 모른다”는 걱정에 위축돼왔다.

여성들이 ‘안전하다고 느낀’ 광장에선 그동안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못한 시민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전동휠체어로만 이동이 가능한 중증 지체장애인이자 대학생인 위유진(25)에게도 ‘내 정체성을 드러내고 말하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다. 부산 서면 집회(12월11일)에서 ‘노래방 도우미’임을 밝힌 청년 여성을 비롯해 다양한 소수자들 발언이 호응을 얻는 모습에 용기가 생겼다. 유진은 12월21일 험난한 서울 지하철 환승길을 거쳐 집회 무대로 향하는 경사로를 따라 휠체어를 움직였다. 그동안 봐오던 장애인에 대한 따가운 시선 탓에 막말과 비난을 들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수십만명 앞에 섰다. “장애인도 시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아직도 외치고 있습니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환호해준 시민들의 모습은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과 연결됨을 느낀 경험”이었다.

서울인권영화제 활동가인 트랜스여성(출생 때 성별은 남성이나 자신을 여성으로 정체화) 소하(활동명·39)는 온라인에서 빈번하게 접하는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다섯차례 이상 참여한 집회에선 거의 마주한 적이 없다고 했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의 농업 4법 거부권 행사에 반발해 지난해 12월21일 트랙터를 끌고 서울로 향한 농민들이 남태령 고개에서 경찰 차벽에 가로막혔다는 소식에 12월22일 오전 2030 여성들을 비롯한 시민들이 남태령 고개 인근에 모여 경찰 철수를 촉구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서로 공감하고 다름을 배운

2030 여성에게 광장은 서로를 변화시키고 연령과 성적 지향, 관심사와 취향이 제각각인 다양한 시민들과 조우하며 더 넓은 세계로 향하는 가능성의 공간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지하철 시위를 지지하지 않았던 대학생 천하은(가명·20)은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가 “너무나 처절하게 외치는 모습”을 본 뒤 생각이 바뀌었다. 중국계 이주민 2세인 그는 이 땅에서 태어나 한국인으로 성장하는 동안 이방인 취급을 받아온 고통을 남태령(12월22일)과 광화문 집회(12월24일)에서 털어놨다. 크리스마스이브 광장을 울린 하은의 말에 직장인 김두리(33)가 눈시울을 붉혔다. “중국에 대한 혐오가 정말 심하니까, 많이 힘들었겠다 싶었어요.” 그의 큰언니도 다른 나라에 거주하는 이주민이다.

여의도와 남태령에서 수많은 응원봉을 목격한 대학생 장지현(25)은 “아이돌 팬은 사회 문제에 관심이 없을 거라 생각한 건 내 편견”임을 배웠다. 박지우(가명·37)에게 민주노총은 ‘귀족 노조’로 각인돼 있다. 그러나 광장에서 본 민주노총은 “집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을 안내하고 경찰 앞을 막아 안전하게 시위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선배” 같았다.

2월1일 오후 서울 경복궁 일대에서 열린 ‘윤석열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9차 범시민대행진’에 참석한 한 시민이 펼침막을 들고 있다. 김혜윤 기자

불안과 기대가 교차하는

한달여 전, 국회의사당 앞에서 탄핵소추안 가결에 환호하며 함께 부른 ‘다시 만난 세계’는 아직 오지 않았다. 유수현은 요즘 불안하다. “희한하게 국민의힘 지지율이 오르더라고요. 빨리 탄핵이 돼야지….” 대학생 오해민(가명·23)은 서울 한남동에서 우연히 탄핵 반대 집회를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았다. “할머니, 할아버지들만 나간다고 생각했는데 완전 젊은 사람들까지 태극기를 들고 있는 거예요.” 프리랜서 김연아(35)는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며 함께 촛불을 들었던 또래 남성이 예전만큼 많이 보이지 않는 점이 걸린다. 미등록 이주민을 조력하고 동물권 활동가이기도 한 최정민(가명·28)은 “성소수자, 청소년, 인권·페미니즘 연사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말할 수 있는 상황이 너무나 반가워” 광장이 끝나고도 이런 연대가 이어질 수 있을지 염려가 된다.


그럼에도 광장에서 안도하고 위로받고 즐거웠던 ‘나’의 세계엔 크고 작은 변화가 찾아왔다. 김두리는 생애 첫 집회를 시작으로 거의 매주 토요일 광장에 나가는 게 일상이다. 여의도와 남태령, 광화문, 한남동을 거치면서 “나중에 정치로 세상을 바꿔보고 싶다”는 포부가 생겼다. 정치·사회 이슈엔 관심이 많지만 자신의 견해를 입 밖에 내지 않던 송수진(가명·35)은 요즘 이웃들에게 시국에 대한 의견을 넌지시 묻는다. 무엇보다 서로 다른 2030 여성 30명은, 윤석열 대통령이 퇴진할 때까지 “다 같이 즐겁게 으쌰으쌰 구호를 외치고 노래도 부르던” 광장에 다시 나갈 작정이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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