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희의 돌아보고 내다보고] 23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와 경찰이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2차 체포영장 집행에 나선 지난 15일 오전,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 입구에 국민의힘 의원들이 집결해 있다. 연합뉴스
작가 진중권은 윤석열 대통령의 정신 상태를 ‘키호티즘’(quixotism)에 비유했다.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에서 유래된 말이다. “돈키호테는 비루먹은 말을 타고 소설로 들어가 늘어선 풍차를 거인으로, 양떼를 군대로, 농부의 딸을 귀부인으로 착각한다. 이렇게 저만의 이상(망상)을 좇아 현실을 떠나는 것을 ‘키호티즘’이라 부른다.” 윤 대통령이 망상에 빠져 느닷없이 계엄령을 발동했으니, 친위 쿠데타가 실패한 후에도 끝까지 싸우겠다니 언필칭 ‘윤’키호테란 호칭이 제격이다.
그런데, 윤석열이 드러내는 정치·이념·역사적 정체성은 결코 일탈이 아니다. 돈키호테처럼 시대 흐름에서 낙오된 인간의 미친 짓이 아니다. 철학자 리 매킨타이어가 말한 그대로 ‘현실이 정치에 종속된 상태’의 지속 및 강화, 다시 말해 한국 사회가 정당을 기준으로 대치하고 적대하는 정서적 양극화가 빚어낸 현상, 그리고 극우세력의 성장과 주류화에 따라 등장이 예고된 괴물이라고 봐야 한다. 트럼프가 보여주는 기괴한 언행 때문에 트럼프 현상이 이례적인 돌연변이로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미국 공화당의 극우화가 낳은 적자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윤 대통령의 정체성도 극우다.
윤 대통령이 망상 속에서 그려본 ‘석열민국’은 어땠을까? 힌트가 있다. 우선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대통령이다. “민주주의는 트램과 같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그것을 타고 있어야 한다. 그다음에는 거기서 내려야 한다.” 그는 총리가 된 후 트램에서 내려 독재적 본능을 드러냈다. 당연히 저항이 거세졌고, 급기야 군부가 그를 제거하려고 나섰다. 에르도안은 이를 핑계로 삼아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공무원 수만명이 체포됐고, 4000명의 판사와 검사가 파면됐고, 100개 넘는 언론사가 폐간됐다. 에르도안은 정치적 반대를 짓누르는 데 성공해 독재자의 반열에 올랐다. 윤 대통령이 부러워할 만한 역전이다.
다음은 헝가리의 오르반 총리다. 오르반도 1998년 총선에서 승리해 35살의 나이로 총리에 올랐다가 2002년 선거에서 패해 물러났다. 끝났는가 싶었는데, 오르반은 8년 만에 권좌에 복귀했다. 2002년 패배가 부정선거 때문이라는 믿음을 지지층이 공유하고 있었던 게 재기의 큰 힘이 되었다. 게다가 재집권한 오르반은 사법부, 언론, 대학 등 독립기관들을 당의 통제 아래 두는 ‘독재적 돌파구’를 통해 안정적 통치 기반을 마련했다. 독재적 돌파구는 ‘법에 따른 통치’(rule of law)를 ‘통치에 따른 법’(law of rule)으로의 전환이었다. 윤 대통령도 계엄을 독재적 돌파구로 생각했을 것이다.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의 연대는 극우동맹이다. 2010년대부터 보수정당 국힘은 민주·평화·복지 어젠다에서 멀어지는 행보를 해왔고, 박근혜 탄핵 등을 거치면서 상대에 대한 적대감을 생존의 근거로 삼는 극우정당으로 꾸준히 변화해왔다. 이런 적대감과 극우화를 빼놓고선 자신의 당에서 배출한 두명의 전직 대통령을 비롯해 숱한 보수 인사들을 형사처벌한 인물을 대통령으로 옹립하는 굴욕마저 감수하는 행태를 이해하긴 어렵다. 탄핵당한 윤 대통령과 한 몸이 되고 극우세력에 포획돼 탄핵 반대에 나서고 있는 광태(insanity)도 설명하기 어렵다.
“정치적 적의가 미국 정치의 규정적 특성이 되었다.”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캠퍼스의 폴 피어슨과 에릭 쉬클러 교수의 지적이다. 상대에 대한 적의 때문에 미국이 두개의 나라로 나뉜 상태라는 얘긴데, 그래서 두 사람이 함께 쓴 책의 제목도 ‘파당 국가’(partisan nation)다. 워낙 두 정당이 죽일 듯이 싸우는 통에 서로 다른 부족 간 다툼에 비유해 부족주의로 부르기도 하고, 지지 정당에 따라 시비와 선악을 가르는 현상이 기승을 부려 파티즘(partyism) 또는 당파주의(partisanism)라는 용어까지 등장했다. 어느 용어든 어떤 정책적 선호나 이념적 성향에 상관없이 내가 지지하는 정당에 관한 것이면 닥치고 옹호하고, 반대하는 정당의 그것은 무조건 적대한다.
윤 대통령은 계엄을 통해, 미국의 트럼프는 지지자들을 동원하는 의회 폭동으로 판을 엎으려 했다. 당연히 둘 다 탄핵소추당했다. 트럼프의 경우 그에게 책임이 있다는 여론이 전체적으로는 70%가 넘었으나 공화당 지지층에서는 52%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2021년 1월6일 의회 폭동 이후 트럼프의 지지율이 떨어졌을까? 얼마나? 다시 회복했을까? 언제쯤?
프린스턴대의 샘 노오르트 교수에 따르면, 의회 폭동 후 열흘가량 지난 시점의 여론조사에서 공화당 지지율은 폭동 이전에 비해 대략 11%포인트 하락했다. 트럼프에 대한 선호도는 4.6%포인트 줄어들었다. 비선호도는 6.3%포인트 늘어났다. 과거 의회 폭동 정도의 심각한 사건이 없을 때도 이런 정도의 지지율 등락이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의회 폭동이 지지율 판도에 미친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았다. 게다가 놀랍게도 폭동 한달 뒤 조사에선 폭동 이전에 비해 공화당 지지율이 겨우 3.7%포인트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놀라운 회복력이었다.
코펜하겐대의 그레고리 이디 교수 등이 분석한 바에 따르면, 의회 폭동 이후 소셜미디어 활동에서도 트럼프와 공화당을 멀리하는 현상이 생겨났다. 폭동이 있은 후 3주 동안 소셜미디어 사용자의 7%가량이 공화당 지지를 연상하는 용어를 삭제했다. 극심한 양극화를 생각하면 꽤 고무적이긴 하나 아쉽게도 이런 흐름은 채 두달도 지속되지 않았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의회 폭동으로 인해 지지층 사이에서 트럼프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으나 짧게 지속되었을 뿐이다. 길어야 두달, 짧으면 몇주에 그쳤다.”(이태구 등, ‘백인 권력! 백인의 지위에 대한 위협이 어떻게 반민주적 정치인에 대한 반발을 감소시켰나?’) 독립운동 때 영국에 점령당한 후 처음으로 의회가 폭도들에 의해 유린당하는 역대급 사태에도 정당에 대한 맹목적 충성은 거의 약화되지 않았다.
왜 이런 반전이 일어났을까? 노오르트 교수는 정당 엘리트들의 메시지와 프레임으로 설명한다.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는 비판에 나섰지만 어느 정도 시점이 지나고 나면 사건의 중요성을 평가절하하거나 트럼프의 역할이 거의 없었다는 식으로 전략적 부정과 변호에 나서기 시작했다. 배신자 운운하며 다른 목소리가 나오지 못하도록 막으면서 당파적 언론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음모론과 진영론을 대대적으로 동원했다. 지지자들이 그 당파적 신호에 반응해 다시 모이기 시작하고, 그 결과 지지율이 반등하게 됐다.
예일대의 밀란 스볼릭 교수는 이념적 양극화로 설명한다. 미국처럼 이념적으로 편이 갈려 있으면 자기편이 대놓고 반민주적 행태를 보이더라도 문책하는 걸 꺼린다. 나와 달라도 너무 다른 상대편인지라 대안으로 선택하기 어려워 어쩔 수 없이 계속 편들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윤 대통령, 국힘의 다수, 상업화된 극우팔이 소셜미디어, 태극기 부대 등 ‘극우 카르텔’이 비상계엄을 추동하고 동조한 까닭도, 지금 상당한 수의 보수 유권자들이 그를 지키겠다고 나서는 이유도 이런 당파주의 때문이다. 상대가 악마이기 때문에 그 상대를 으깰 수 있다면 뭘 해도 괜찮다는 태도를 보인다. 계엄-탄핵 국면을 계기로 정당정치에서 보수는 짓눌리고 극우가 주류의 자리를 꿰차고 있다.
“선전은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특별한 대상을 공격 매개물로 삼아 촉진되어야 한다.” “거짓말을 충분히 큰 목소리로 반복해 말하면 사람들은 결국 믿는다.” 지금 극우 카르텔이 추앙하는 두 명제다. 때문에 줄기차게 외친다. ‘그래도 이재명은 안 됩니다.’ 최근 여론조사를 얼핏 보면 이 전략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 듯하다. 진짜 그럴까? (참, 앞의 두 명제는 히틀러의 선동가 괴벨스의 말이다.)
이철희 | 방송에서 정치평론을 하다 정치에 나서 20대 국회의원, 문재인 정부 마지막 정무수석을 지냈다. 2020년 ‘대통령 탄핵 결정요인 분석: 노무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 과정 비교’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인자를 만든 참모들’ ‘정치가 내 삶을 바꿀 수 있을까’ 등의 책을 냈고, ‘진보는 어떻게 다수파가 되는가’ 등의 역서가 있다. 우리 정치가 어쩌다 이렇게 나빠졌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해야 나아질 것인지 등에 대해 터놓고 얘기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