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다소 잊힌 ‘디리스킹’(위험 완화)이라는 용어를 처음 꺼내든 이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었다. 그는 2023년 3월30일 유럽연합의 대중 정책 관련 연설에서 “중국과 디커플(관계단절)은 가능하지 않으며 유럽에 이익도 되지 않는다”며 “우리는 디리스크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는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이 결속해 권위주의 국가인 중·러의 도전을 이겨내야 한다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시대였다. 부담스러운 미국의 요구를 받아 든 유럽인들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2022년 2월 말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며 유럽 안보에 큰 위협이 된 러시아와 ‘관계 단절’은 각오해야 했지만, 세계 2위 경제대국인 중국을 멀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등장한 말이 ‘디리스킹’이었다. 즉,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아 유럽의 안보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민감한 영역’에선 대중 의존도를 낮추겠지만(디리스킹), 전면적인 관계 단절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한 것이다.
불과 2년이 못 돼 이 말이 전혀 다른 맥락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새 논쟁을 불러온 이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구호를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아바타’인 제이디 밴스 부통령이었다. 그는 지난 14일 독일 뮌헨 안보회의 연설에서 “내가 유럽에 관해 가장 걱정하는 것은 러시아도 중국도 아니다. 유럽 내부에 존재하는 위협”이라며,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을 연정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는 독일 등 유럽의 민주주의가 잘못됐다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유럽은 이를 ‘유럽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였다.
분명, 미국의 위협은 말뿐이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쟁을 끝내기 위한 미-러 협상에서 우크라이나와 유럽을 배제하고 있고,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국방비 목표치를 현재 국내총생산(GDP)의 2%에서 무려 5%로 높일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덴마크 영토인 그린란드를 빼앗을 기세다.
그러자 디리스킹이란 말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의 외교담당 수석 칼럼니스트인 기디언 래크먼은 “어렵겠지만 지금 유럽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디리스킹을 시작해야 한다”고 외쳤다. 경제·무역·안보 등 주요 영역에서 미국 의존을 줄이고 유럽이 자립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쉽진 않겠지만 우리도 검토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