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대통령 탄핵소추로 개헌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당장 개헌을 하지 못한다면 선거구제 개혁을 통해 양극화된 정치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래픽=김영희 디자이너
한국 민주주의가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거나 위태롭다는 예감을 받은 게 필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불안했던 예감은 지난해 12월 3일 이후 가시화됐다. 어쩌다 이런 일이 생긴 걸까. 필자의 생각에는 흔히 ‘중위 투표자 정리(median voter theorem)’ 이론으로도 설명되는, 중도파 유권자들의 의사가 관철되는 정치 지형도가 한국 정치에서 점점 상실되어온 현상이 가장 큰 문제다.
거대 양당 강성 지지층 의존 심화
중도층 의향 대변하는 제도 필요
비례성 반영한 대선거구제 대안

적어도 1997년 대선에서 2012년 대선까지의 한국 정치는 양당의 강성 지지층 사이에서 중도파와 연성 지지층이 승자를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1992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본인보다 더 왼쪽이었던 전국연합과 연대하다 참패한 후, 97년 대선에서 보수파인 김종필·박태준과 ‘DJT 연대’를 만든 후부터 정립된 구도였다. 2012년 대선만 봐도 박근혜 후보는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주요한 피해자들인 장준하·전태일의 유족과 화해를 시도했다. 즉 과거 여론 지형은 일종의 단봉 낙타 형태였다. 거대 양당은 경선 단계에서 후보를 택할 때 중간 봉우리 유권자들의 선호를 반영했고, 이들은 결국 그렇게 선출된 양당 후보 중에서 적임자를 골랐다.

2022년 대선 이후 여론 지형은 일종의 쌍봉 낙타 형태 모양이 됐다. 중간 봉우리는 사라졌고 왼 봉우리와 오른 봉우리가 갈라서서 양극단 지지층이 선호하는 후보가 선출됐다. 이러니 2022년에는 ‘누구를 더 견딜 수 없는가’라는 굉장히 감정적인 잣대로 중도파의 표심이 결정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양당의 선거 캠페인도 미움과 경멸감을 십분 강화해 갔으니, 선거 후에도 승복은 없었으며 강성 지지층이 일상적 정치판을 잠식했다.

비호감 대선 반복하면 유권자 염증 새 대선이 치러지더라도 양상은 비슷할 것이다. 그러니 민주주의 체제가 유지되어도 상당수 유권자는 선거와 투표 자체를 무의미하게 느낀다. 다수 유권자의 정치적 요구를 반영하는 세력이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인센티브 유인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중도 유권자 입장에서 볼 때 선거는 그저 ‘동전 던지기로 승자 정하기’ 게임으로 변질됐다고 할 수 있다. 이 현상의 기반에 SNS와 유튜브가 강화하는 ‘필터 버블(맞춤형 정보만 도달)’과 ‘확증 편향’이 있음은 물론이다.

사실 소선거구제는 정치학계에서 중위 투표자 정리를 잘 구현할 선거구제로 흔히 여겨지지만, 한국의 갈등적 정치 문화는 법전 문구 사이의 틈새를 넓혀 법 취지를 형해화하며 여론 지형을 변질시켰다. 정치인들은 민주주의 수호에 관심을 쏟기보다 제 당파의 승리만을 중요시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손쉽게 언급되는 것이 개헌이다. 흔히 제왕적 대통령제를 끝내자고 한다. 그런데 이상적 정치개혁론자들의 주요한 3가지 주장인 내각제·국회의원 정수 확대·비례대표성 강화는 유권자들이 원하는 바와는 거리가 멀다. 유권자들은 이 주장이 본인들이 현 제도에서 느끼는 효능감을 망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현실론자들이 말하는 총선과 대선 주기를 맞추는 4년 중임제 개헌이 과연 작금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적절한 대안인지도 의문이다.

그렇다면 이상론과 현실론을 두루 고려한 우회적인 제도 개선안이 절실하다. 대통령제를 당장 허물 수 없다면 그에 집중하기보다 총선 제도를 바꿔 정치 문화의 근간을 개혁할 필요가 있다. 정당들이 중도 유권자를 공략할 유인을 제공할 방향으로 말이다.

개헌 어려우면 우회 개선안 찾아야 그러한 제도 개선안 중 고려해 볼만한 방향은 대선거구제다. 현재의 비례대표제는 폐지하고, 300명의 의원을 25개의 대선거구에서 뽑는다. 이러면 선거구당 선출 정수는 평균 12명이 되지만, 강원이나 제주와 같은 인구가 적은 지역이 있기 때문에 인구에 따라 선거구별로 4~20명이 선출된다. 선거구별 2~3인이 당선되는 중선거구제는 거대 양당의 나눠먹기가 되기 십상이기에 그보다는 큰 규모를 유지해야 한다. 의원 정수를 늘리기 싫다는 유권자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비례대표제는 폐지됐지만, 대선거구제의 선출 방식 때문에 표의 비례성은 오히려 강화된다. 선거 방식은 이렇다. 유권자가 지지하는 정당과 그 정당이 공천한 후보자들 중 1명을 선택해 두 번 기표한다. 의석은 정당 득표율에 비례해 배분하며, 그 정당의 어느 후보가 당선될지는 후보별 득표에 따라 정하게 하면 된다. 즉 정당 내부 공천보다 선거에서의 유권자 선호가 당선자를 결정한다. 투표의 비례성 달성과 유권자의 직접 인물 선택이라는 두 마리 토끼가 잡힌다. 정당은 유권자들이 선호할 후보들을 전략적으로 배치하는 법을 연구하게 될 것이다. 추가로 정당법을 개정해 기존 봉쇄 조항(몇 % 이상 득표시 의석 확보 가능)을 선거구별로 한다. 여기에 특정 지역의 당원만 대상으로 하는 지역 정당을 허용한다면 국회의원이 기초단체장과 지방의원을 거느리는 지금의 풍토도 개선된다.

당장 이 제안에 동의하지 못하더라도 백가쟁명은 시급하다. 이와 같은 문제 의식 아래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한다. 유권자들이 폭넓게 호응해야 정당들에게 이런 개혁안을 검토할 유인이 생긴다. 협상 과정에서 지역구 정치인들의 이해관계가 다소 반영되는 개정안이 나온다 하더라도 방향성만 유지한다면 그 효과는 상당할 것이다.

한윤형 작가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47557 1.5% 쇼크…한은 올 성장률 0.4%P 낮췄다 new 랭크뉴스 2025.02.26
47556 英, 2027년까지 국방비 GDP 2.5%로 증액…국제지원은 삭감 new 랭크뉴스 2025.02.26
47555 '윤 탄핵심판' 변론 종결‥반성은 없었다 new 랭크뉴스 2025.02.26
47554 “AI야, 내 얘기 좀 들어줄래?” 10대들 상담창구라는데… new 랭크뉴스 2025.02.26
47553 윤 “임기 연연 않겠다” 임기단축 개헌 표명 new 랭크뉴스 2025.02.26
47552 "경력은 있지만 신입입니다!"…포스코 '중고 신입' 모집 논란, 무슨 일? new 랭크뉴스 2025.02.26
47551 [尹 최후진술 전문] “비상계엄은 ‘대국민 호소’…개인 위한 것 아냐” new 랭크뉴스 2025.02.26
47550 트럼프와 디리스킹 [유레카] new 랭크뉴스 2025.02.26
47549 "화장실 하루 10번, 23㎏ 빠졌다" 세계 1위 유튜버 투병 고백 new 랭크뉴스 2025.02.26
47548 윤석열, ‘간첩’ 얘기만 25회…“멀쩡해 보여도 국가 위기 상황” new 랭크뉴스 2025.02.26
47547 인도서 중저가 스마트폰 조기 출시 예고한 삼성… 보급형 아이폰 가격 올린 애플 빈틈 노린다 new 랭크뉴스 2025.02.26
47546 윤석열, 최후까지 반성은 없었다 new 랭크뉴스 2025.02.26
47545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붕괴 고속도로 인근 주민들 ‘충격’ new 랭크뉴스 2025.02.26
47544 [사설] '국가·국민 위한 계엄'이라니… 윤 대통령 최후진술 참담하다 new 랭크뉴스 2025.02.26
47543 뉴욕증시, 소비자신뢰지수↓·기술주 매도 지속…급락 출발 new 랭크뉴스 2025.02.26
47542 약 안듣는 난치성 두통, 경추 신경 국소 마비로 효과 new 랭크뉴스 2025.02.26
47541 시신 옆 앉아 4시간 비행…'꿈의 휴가' 시작부터 악몽이 됐다 new 랭크뉴스 2025.02.26
47540 비수도권 15곳 그린벨트 풀어, 지역경기 부양 나선다 new 랭크뉴스 2025.02.26
47539 계엄 때와 달리 ‘무표정’ 윤석열 “다시 일할 기회 있을까 …” 최후 진술 new 랭크뉴스 2025.02.26
47538 오동운 때린 여당 “윤 영장 기각되자, 서부지법에 청구” new 랭크뉴스 2025.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