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양구 방산면 일대를 흐르는 수입천이 얼어붙어 있다. 정부는 수입천 상류에 저수용량 1억t 규모의 댐을 지어 경기 용인 반도체 공장에 보낼 용수를 확보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양구 | 서성일 선임기자
강원 양구에 저수용량 1억t 규모의 댐이 들어설 예정이다. 충남 금산에는 34만5000V 고압 송전선을 연결하는 철탑이 여러 개 세워진다. 2050년까지 반도체 공장 10개(삼성전자 6개, SK하이닉스 4개)가 지어지는 경기 용인에 공업용수와 전력을 보내기 위한 용도다.
해당 지역 주민들은 댐과 송전탑으로부터 고향을 지키겠다며 반대 투쟁을 벌이고 있다. 댐과 송전탑 건설에 찬성하는 주민도 생기면서 주민 간 갈등으로 번졌다. 대체 이들 농촌 마을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댐과 송전탑 건설로 뒤숭숭한 양구 방산면과 금산 진산면을 찾았다.
육지 속 섬, 양구
양구 방산면엔 휴전선 부근에서 발원한 수입천이 흐른다.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일교차도 크고 눈도 많이 내린다. 마을 주민들은 비닐하우스에서 고추·수박·아스파라거스 등을 키운다. 아까시나무와 싸리 등 밀원수가 많아 벌을 키우는 농가도 많다. 양구 해안면에서 나는 시래기가 워낙 유명하다 보니 방산면에도 시래기 무 농사를 짓는 농부들이 꽤 있다.
지난달 11일 방산면 금악리 ‘마을 공동창고’ 앞. 주민들이 저마다 1t 트럭을 몰고 나타났다. 마을 총무 정흥섭씨(53)가 창고에서 고추 세척기 등을 꺼내 주민들의 트럭에 실었다. 금악리는 마을 사업으로 농가에서 필요한 기계를 지원한다. 고추 세척기가 제일 인기가 많단다. 신청하는 주민은 다수지만 사업 예산이 적다 보니 제비뽑기로 당첨자를 정한다. 30여명이 신청한 올해는 8명이 선정됐다. 정씨가 말했다. “주민들이 대부분 70대, 80대예요. 수확한 고추를 일일이 씻는 것조차 이제는 버거운 일이 된 거죠.”
재원은 인근 평화의댐에서 매년 나오는 지원금 1000만원이다. 1988년 평화의댐 건설로 피해를 본 방산면의 7개 지역(금악리·천미리·송현리·오미리·현리·장평리·칠전리)을 대상으로 지원금이 나온다. 당시 군부는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북한이 금강산댐(임남댐)을 짓고 이를 터뜨려서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려고 한다’며 수공(水攻)을 막기 위한 평화의댐을 짓겠다고 했다. 평화의댐으로 천미리 일부가 물에 잠겼다.
강원 양구 방산면 금악리 박금순 이장(오른쪽)과 정흥섭 총무가 지난달 23일 방산면사무소 인근의 수입천 다리 위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양구 | 서성일 선임기자
“우리 큰집이 천미리에서 살았거든요. 다들 ‘서울이 물바다 되는 건 막아야 한다’ 그런 생각으로 살았으니까 국가에서 주는 얼마 안 되는 보상금 받고 찍소리 없이 나갔죠. 천미리에 댐 생기면 우리 마을에도 안개 끼고 피해 보는 건데 그때는 그런 생각도 못했어요. 나도 댐 지으라고 성금까지 낸걸…” 금악리 이장 박금순씨(63)의 말이다.
평화의댐만이 아니다. 1943년 일제가 대륙 침략을 위한 전력 공급을 목적으로 화천댐을 지었을 때 양구 북면이 수몰됐다. 1973년에는 수도권에 용수를 공급하는 소양강댐이 건설되면서 양구읍과 남면 일부가 인공 호수 소양호에 잠겼다. 이 때문에 당시 강원 춘천에서 양구를 가려면 소양호에서 쾌속선을 타고 1시간 정도 들어가야 했다. 구불구불한 산길 탓에 육로는 2배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양구가 ‘육지 속의 섬’으로 불리는 이유다.
정부는 지난해 7월 방산면 수입천에 수입천댐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금악리에서 수입천을 따라 차로 10분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송현2리 마을회관이 나오는데, 수입천댐은 마을회관 앞 계곡을 막아 만든다. 주민들은 이 일대를 고방산(古芳山)이라 부른다. 방산면 이름이 여기서 유래됐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뜻이다.
박씨 머리는 사내아이처럼 짧았다. 지난해 12월 수입천댐 건설 반대 집회에서 이장들의 삭발식이 있었는데 가장 먼저 머리를 밀었단다. “지금도 평화의댐 안개가 산을 타고 우리 마을로 넘어오지만, 견딜 만한 게 안개가 많은 양은 아니거든. 근데 고방산에 댐을 짓겠다는 건 우리보고 맨날 안개 속에서 살라는 거잖아요. 댐이 이렇게나 많은데 머리에 또 다른 댐을 이고 살라고 하다니… 용인에 들어서는 반도체 공장은 중요하고 우리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얘기죠.”
마을 총무 정씨는 “농사 피해가 상당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시래기 농사와 양봉 등을 한다. 8월에 시래기 전용 무를 밭에 심고, 10월 말에 무청만 잘라 수확한다. 무청은 두 달간 그늘에서 말려 시래기로 팔고, 밭에 남겨진 무는 동치미를 담가 먹는단다. 수입천댐으로 안개가 짙어지면 말린 시래기에 곰팡이가 생길 가능성이 크다.
정씨의 꿀벌들은 현재 전남 고흥에서 겨울을 나고 있다. 정씨는 5월 초 벌통을 경북 영천으로 옮겨 아까시 꿀을 딴다. 5월 중순 아까시나무 꽃을 찾아 경기 여주나 경북 안동에 있다가, 같은 달 20일쯤 양구 남면을 거쳐, 25일쯤 방산면으로 돌아온다. 방산면에서는 아까시나무 꽃이 지면 헛개나무와 피나무에서, 그 뒤에는 싸리나무에서 꿀을 딸 수 있다. 댐 건설로 밀원수가 사라지고, 짙은 안개로 꽃이 분비하는 꽃가루와 꿀이 줄어들까 우려된단다.
자주포 지나는 마을
댐 많은 양구에 왜 또다시 댐을 지으려는 걸까. 수도권에서 쓰는 생활용수와 공업용수는 한강 하류나 팔당댐(팔당호)·여주보 등에서 가져간다. 상류에 있는 소양강댐, 충주댐, 횡성댐 등 3개의 다목적댐에서 용수 공급용으로 흘려보내는 양만큼만 취수한다. 한강 유역의 다른 댐들은 용수를 공급할 수 없는 발전용 댐이 대부분이다. 발전용 댐은 물을 가둬두는 양도 적은 편이다.
한강 상류의 다목적댐 3곳이 공급할 수 있는 용수의 양은 하루 1088만9900t인데, 지방자치단체와 기업 등이 댐을 관리하는 한국수자원공사와 계약해 가져가는 양이 2023년 기준 1012만5900t(92.7%)으로, 여유분은 하루 79만6000t에 불과하다. 반면 용인에 지어지는 반도체 공장 10곳에서 하루에 쓰는 용수는 133만7000t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는 도시의 하수를 정화해 반도체 공장의 용수로 쓰겠다고 했지만 필요한 양에는 한참 못 미친다. 발전용 댐 중에 가둬두는 물의 양이 많은 화천댐을 용수용 댐으로 전환해 물을 공급하겠다는 계획도 세웠지만 이조차 빠듯한 양이다. 이에 용인 반도체 공장 용수를 담을 ‘물그릇’을 찾다가 최전방인 양구 수입천까지 올라갔다.
고방산에 수입천댐을 만들면 송현2리의 가구 7곳과 농지, 그리고 금강산으로 가는 옛 길목인 두타연 계곡 일부가 물에 잠긴다. 두타연 계곡은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인 산양과 2급인 열목어가 사는 청정 지역으로,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송현2리 주민 연제원씨(74)는 고방산에 비닐하우스 12개 동을 짓고 수박을 키운다. 수입천댐이 생기면 연씨의 농장은 수몰된다. 하지만 연씨는 아랫마을인 금악리 주민과 달리 댐이 생기길 간절히 바란다.
강원 양구 방산면 송현2리 주민 연제원씨가 지난달 23일 수입천댐 수몰예정지에 있는 자신의 비닐하우스 내부를 살펴보고 있다. 양구 | 서성일 선임기자
“아랫마을은 자주포도 지나가지 않고, 포 사격장 걱정 안 하고 살아도 되잖아. 우리 마을은 1년에 대여섯 번 포 소리가 들리는데 너무 시끄럽단 말이지. 이런 마을에 누가 살고 싶어 하겠어. 나도 나이가 들어서 이제는 밭을 팔고 싶은데, 평당 30만원 하던 걸 평당 10만원에 내놔도 나가질 않아.”
강원 홍천 출신인 연씨는 1969년부터 1972년까지 방산면 민간인통제선 안에 있는 문등리 만대광산에서 형석을 캐는 광부로 일했다. 형석은 화약·철강 제조 등에 쓰이는 광물이다. “형석광산에서 일하면 돈 번다고 해서 양구에 왔어. 형석을 일본에 수출한다 하더라고. 같이 일하는 광부가 50여명은 됐지.”
연씨는 잠시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결혼 후 다시 양구로 왔다. 양구는 물 맑고 공기 좋고 남는 땅도 많았다. 살기에도, 농사 짓기에도 최적의 땅이었단다. 특히 수박 농사를 지으면서 살림살이가 폈다. 하지만 2018년 천미리에 포 사격장 표적지가 생긴 후 상황이 달라졌다. 마을 앞 도로는 자주포가 몇 번 지나가면 망가지기 일쑤다. 헬기 소리도 종종 들린다.
“댐이 생기면 우리 수박 하우스는 물에 잠기겠지만, 포 사격장도 사라지거든. 그럼 우리 마을에서 살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늘어날 거야. 마을에 댐이 있으니까 관광객도 올 거고 펜션도 생기겠지. 지금보다 생기가 돌지 않겠어?”
송현2리에 사는 강덕철씨(65)도 수입천댐 건설을 반겼다. 강씨 자택과 농지는 모두 수몰 대상 지역에 있다. 수원에서 줄곧 살아온 강씨는 15년 전 이곳에 터전을 잡았다. “평생을 양구에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근데 지금은 포 소리와 헬기 지나다니는 소리로 산이 들썩들썩해요. 앞으로 살아야 얼마나 더 살겠어요. 수몰 보상금 받으면 그 돈으로 조용한 마을 가서 우리 부부 먹고살 정도로만 작게 농사짓고 평화롭게 살고 싶어요.”
양구에서는 댐 건설 반대 여론이 더 많다. 이에 환경부는 지난해 10월 수입천댐 건설을 보류했다. 취소하지는 않았다. 김완섭 환경부 장관은 “정부는 국가 미래를 위해 필요한 것을 해야 할 의무가 있고, 그런 의미에서 수입천댐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환경부는 댐 주변 지역에 대한 정비사업 지원금을 기존 최대 400억원에서 최대 800억원으로 올린 ‘댐 건설·관리 및 주변 지역 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 개정안을 오는 3월 공포할 예정이다. 이에 따라 수입천댐 정비사업 지원금은 790억원으로 2배로 늘어난다. 지원금을 올려 반대 여론을 돌리겠다는 의도다.
매물로 나온 집
‘물 먹는 하마’ 반도체 공장은 ‘전기 먹는 하마’로도 불린다. 둥근 웨이퍼에 반도체 회로를 새기는 데 짧은 파장의 강한 빛을 써야 하기 때문에 전력 소모가 크다. 삼성전자 공장 6개에 필요한 전력이 10GW(기가와트), SK하이닉스 공장 4개에 6GW 등 총 16GW가 필요하다. 1GW 원전 16개에서 나오는 전력이 필요한 셈이다.
다만 삼성과 SK는 원전이나 석탄화력이 아닌, 재생에너지 전력 비중을 늘려야 한다. 2050년까지 모든 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하겠다고 국제사회에 약속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2.4GW 전북 서남권 해상풍력(2028년 예정)과 8.2GW 전남 신안 해상풍력(2035년 예정), 호남의 태양광 발전 전력 등을 수도권으로 가져가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신장성 변전소~신정읍 변전소~신계룡 변전소까지 176.6㎞ 구간에 34만5000V 고압 송전선 철탑이 380개 세워진다. 신정읍~신계룡 구간에서는 금산 등 15개 지자체가 송전탑 예비 후보지가 됐다.
한국전력은 2023년 초 금산군청과 군의회를 대상으로 설명회를 진행했지만, 정작 주민들에게는 이를 알리지 않았다. 신정읍~신계룡 구간에 있는 15개 지자체에서 지자체 관계자 1명, 주민 대표 2명씩 총 45명을 뽑아 ‘광역 입지선정위원회’를 구성하고, 송전탑 후보지(최적경과대역)를 결정했다. 송전선이 어디를 지나게 할 것인가를 45명이 다수결로 정했다. 금산에서는 진산면 일대가 선정됐다.
진산면 지방리에 사는 박범석씨(61)는 “고압 송전탑이 진산면을 지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면서 “한전이 제시한 송전선 경로를 보면 진산면에서는 지방리와 두지리, 읍내리 등이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박씨와 주민들은 주민 대표로 나간 군의원에게 따져 물었다. “주민 대표가 됐으면 주민들에게 이를 알리고 주민들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논의하고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봐야지, 그런 것도 없이 거수기로 참여하는 게 말이 되냐, 이게 민주주의냐, 다들 ‘죽이네, 살리네’ 난리가 났었죠.” 마찬가지로 송전선이 지나는 전북 진안에서는 군청 공무원인 면장과 부면장이 주민 대표로 표를 행사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됐다.
박씨는 2013년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인 진산면으로 돌아왔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하던 인삼농사를 이어 지을까 했지만, 인삼은 재배에 6년이나 걸리고 가격도 좋은 편이 아닌 데다, 한번 키우면 땅심을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해 포기했다. 대신 인삼밭에 하우스를 짓고 표고버섯을 키웠다. 하우스 2동에서 부부가 먹고살 정도만 지었단다. 마을 주민들은 그에게 마을 개발위원장을 맡겼다.
지난해에는 주민들이 “마을 일을 추진력 있게 잘 처리했으니 이번에는 ‘송전탑 대책위원회’를 맡으라”며 그를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위원장 활동을 하느라 지난해 표고농사는 포기했단다.
충남 금산 진안면 주민 박범석씨가 지난달 14일 진산면 행정복지센터에서 열린 송전탑 대책위원회 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박씨는 대책위 위원장으로 활동한다. 금산 | 서성일 선임기자
지난달 7일 찾은 진산면 두지리, 지방리, 읍내리 건물에는 집 매매 딱지가 붙어 있었다. 박씨가 “송전탑이 들어선다고 발표된 이후 집을 내놓는 주민들이 늘어났다”면서 “우리 대책위원회에서도 활동을 열심히 하던 귀농인 몇분이 떠나기로 마음먹고 집을 내놨다”고 말했다. 하지만 집은 잘 나가지 않는다.
두지리에서 대진부동산을 운영하는 한용석씨는 “요즘 부동산 경기도 안 좋은데 송전탑까지 맞물리면서 매물이 늘었다”며 “나오는 매물은 있어도 나가는 건 없다”고 말했다.
박범석씨가 말했다. “거대한 철탑이 마을에 들어선다고 생각해보세요. 보기에도 좋지 않고, 주민들은 암 생기는 거 아니냐 걱정하고요. 재산상 피해도 보죠. 한전이 보상금을 준다고 해도 ‘찔끔 보상’이죠. 일부 주민들은 ‘정부가 추진하는 사업인데 우리가 이길 수 있겠냐, 보상금 받고 찬성하는 게 낫다’고까지 얘기해요. 송전탑 때문에 같이 살던 주민들 간에 편이 갈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런 게 복합적으로 작용하니까 사람들이 떠나죠. 이렇게 마을이 순식간에 소멸위기에 놓이는 겁니다.”
반도체만큼 중한 것
고압 송전탑 후보지인 지방리와 두지리는 밀양 박씨들이 사는 집성촌이기도 하다. 지방리 박범석씨가 ‘아저씨’라고 부르는 두지리 박동주씨(40)는 2017년 고향으로 귀농했다. 그는 부모와 함께 비닐하우스 8개동에서 땅두릅 농사를 짓는다.
땅두릅은 관절염과 근육통 등 근골격계 질환에 많이 쓰이는 한약재인 독활의 어린 순을 말한다. 두릅나무의 어린 순인 참두릅과 생김새는 비슷한데, 땅에서 자라는 다년생 풀이다. 1990년대 이곳 주민들이 야생 땅두릅을 밭에 옮겨 재배하면서 두지리가 땅두릅의 주산지가 됐다. 마을 입구의 두지리 슈퍼 앞에 주민들이 ‘땅두릅독활 약초마을’이라는 표지석까지 세웠을 정도다.
충남 금산에서 땅두릅 농사를 짓는 박동주씨가 지난달 14일 진산면 두지리 자신의 비닐하우스에서 땅두릅을 심은 땅을 살펴보고 있다. 금산 | 서성일 선임기자
이날 땅두릅이 자라는 박씨의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갔다. 비닐하우스 안에 작은 비닐하우스, 그 안에 더 작은 비닐 터널까지 3중으로 덮어 보온 효과를 높였다. 아직 땅에는 아무것도 나지 않았는데, 2월 중순부터 5월까지 순이 올라온다고 했다. 뿌리는 남겨두고 윗부분만 잘라내 수확하는데, 한 뿌리에서 순이 여러 번 나온단다. 박씨는 지난해 7월 폭우로 비닐하우스 3개동에 있던 땅두릅이 물에 잠기거나 빗물에 쓸려 내려가면서 손해를 봤다.
땅두릅만 보고 살 순 없어 블루베리 농사도 시작했다. 그는 “해가 잘 들고 일교차가 크다 보니 블루베리 당도가 높게 나온다”고 했다. 2년생 나무 350그루는 비닐하우스에서, 3~4년생 650그루는 노지(맨땅)에서 키운다. 좀 더 키워 5년생이 되면 한 그루에 3g짜리 열매가 1000알 정도 달린단다. 블루베리 열매 3㎏이 마트에서 5만~6만원에 팔리는 걸 생각하면 한 그루에서 5만~6만원의 매출이 나오는 셈이다. “근데 농사는 항상 원하는 대로는 되지 않더라고요. 농업 소득은 항상 최대치의 절반을 생각해야 해요.”
아니나 다를까. 설 연휴였던 지난달 30일 박씨가 폭설로 무너진 비닐하우스 사진을 보내왔다. 설에 내린 눈으로 블루베리 비닐하우스가 주저앉았단다. “원래 고향에는 돌아오지 않으려 했어요. 농사가 힘은 많이 들고 돈은 안 되니까…”
박동주씨의 블루베리 비닐하우스가 지난달 29일 설날에 내린 폭설로 주저앉았다. 박동주씨 제공.
시골 생활은 꿈도 꾸지 않던 박씨가 돌아온 건 투병을 위해서였다. 그는 2017년 1월 위암 2기 판정을 받았다. 직장을 그만두고 아내와 공기 좋고 물 맑은 고향으로 왔다. 2018년, 2021년 두 차례 수술로 위 대부분을 잘라냈다. 지금은 약을 복용하지도, 주사를 맞지도 않는다. 2년 전부터 두지리 청년회장도 맡았다. “내 고향이 좋은 점요? 경치 좋죠. 바람도 시원하고. 아이들 정서 발달에도 좋아요. 저도 어릴 적에 가재, 개구리, 두더지 잡고 놀고 그랬죠.” 여덟 살 첫째는 종종 농사일을 돕겠다고 나선다.
그러다 두지리가 34만5000V 송전탑 후보지가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압 송전탑이 지나는 농촌 마을은 암 발병률이 높다는 기사가 떠올랐단다. 자기 몸보다 아이들이 더 걸렸다. “아이들이 송전선로 밑에서 뛰노는 모습을 상상하면 미안하고, 끔찍해요.” 물론 한전은 고압 송전탑에서 나오는 전자계와 암은 연관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마을을 떠나는 게 낫지 않냐’고 물었다. 박씨가 답했다. “저도 나서는 거 엄청 싫어해요. 제게는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사는 게 제일 중요해요. 그걸 지키는 게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내 본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평화로운 일상에 갑자기 고압 송전탑이 끼어든 거죠. 우리 가족의 일상을 지키려면 계속 싸우는 수밖에 없죠.”
금산은 시작에 불과하다. 호남의 재생에너지 전력을 수도권으로 올려보내기 위해 정부는 여러 곳에 새로운 송전선로 건설을 계획하고 있다. 재생에너지 전력이 늘어난 만큼 전력을 쓰는 곳도 있어야 하는데 호남에는 공장이 많지 않아 전력과부하로 블랙아웃(대정전)이 벌어질 가능성도 크다. 송전탑을 늘려 전력을 수도권으로 보내면 블랙아웃을 막을 수 있다.
지방리 주민이자 송전탑 대책위원장인 박범석씨는 “언제까지 지방에서 전력을 만들어 수도권으로 보내야 하냐. 전력을 많이 쓰는 공장들이 자꾸 수도권에만 지어지니까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라며 “지역에서 생산한 전기를 그 지역에서 쓸 수 있도록 산업 구조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 경제’ ‘국가 안보’를 위해 많은 농촌 마을이 희생된다. 주민들은 ‘부수적 피해자’로만 여겨진다. 댐과 송전탑이 세워지는 양구와 금산 사례는 일부에 불과하다. 지금도 의료 폐기물 처리장, 쓰레기 소각장, 포 사격장 등이 들어서는 걸 막기 위해 싸우는 농촌 주민들이 있다.
농촌은 갈수록 살기 힘들어진다. 댐과 고압 송전탑 건설 계획은 그 고단함과 가난의 틈을 파고들어 분열과 갈등을 만든다. 분열의 저 멀리에 용인의 반도체 공장이 있다. 도시 사람들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가가 뛰길 바라고, 용인 부동산 시장이 들썩이는 데 환호한다. 다들 삼성과 SK만 바라보는 동안, 농촌 주민들은 평온했던 일상을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선다.
경기 평택 일대에 있는 고압 송전탑. 서성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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