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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그는 그저 일했다
택배노동자 고(故) 정슬기
(1983~2024)

편집자주

고인을 기리는 기억의 조각, 그 곁을 치열하게 마주한 뒤 비로소 전하는 느린 부고. 가신이의 삶엔 어떤 이야기가 남아 있을까. 별세, 그 너머에 살아 숨쉬는 발자취를 한국일보가 기록합니다.
고인이 택배 배송을 하는 모습. 유족이 제공한 고인 사진을 토대로 일러스트를 그렸다. 일러스트=신동준 기자


"오늘 밤이 제 휴무이긴 한데, 쉬고 나서도 몸이 안 좋으면 혹시 내일 근무를 바꿔주실 수 있나 해서요.
몸이 영 안 좋네요.
"

지난해 5월 28일 아침 7시를 갓 넘긴 시각, 정슬기씨는
동료 택배기사
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느 날처럼 야간배송을 마친 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슬기씨는 오후 9시부터 다음 날 오전 7시까지 서울 중랑구 상봉동 일대로 택배 상품을 배송했다. 1년 넘게 거의 매주 화요일에만 쉬었다. 주6일 근무. 명절 연휴에도 일했고, 아파도 일을 거르지 않았다.

전날 밤부터 몸이 심상치 않았다. 본인이 고용한 아르바이트 기사에게 "지금부터 배달을 해달라"고 부탁한 게 밤 10시 30분쯤이었다. 평소 오전 2시부터 아르바이트 기사에게 물량 40~100개 정도를 맡겼지만, 이날만은 오후 11시 30분부터 물량 400개 중 234개를 맡겼다. 중간에 30분간 차 안에 누워서 휴식도 취했다. '시간과의 싸움'인 이 일을 하면서 흔치 않은 일이었다.

평소보다 택배 100개 정도를 덜 배송했지만, 몸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런 몸으로 다음 날 일하는 건 무리라고 봤다. 다행히 동료는 "오늘 밤 하루 쉬어보시고, 그래도 몸이 안 좋으시면 근무 바꿔드리겠다. 연락 달라"고 답했다.

집에 도착하니 장모님이 아이들 등교를 돕고 있었다. 비에 젖은 옷을 벗었다. 건조기가 얹혀 있는 일체형 구조라, 드럼 세탁기로 옷을 넣으려면 상체를 앞으로 구부려야 했다. 몸을 앞으로 숙이자 입에서 신음 소리가 터져나왔다. "아침 드세요"라는 아이들 목소리도 듣는 둥 마는 둥, 복층에 올라가 누웠다. 휴대폰으로 '팔이 저리고 숨이 안 쉬어지는 증상'을 검색했다.

막내와 병원에 갔던
슬기씨 아내(41)
가 오후 1시쯤 집에 도착했다. 슬기씨는 그때까지도 쉬고 있었다. 아내는 아이들 학원 보내랴, 저녁식사 준비하랴 분주하기만 했다. 평소라면 5시에 귀가해야 할 둘째가 이날은 6시까지 집에 오지 않았다. 둘째가 이틀 전 교회에 휴대폰을 놓고 와 연락할 수단이 없었다. 아내는 복층에 있는 슬기씨에게 부탁했다.

"둘째 좀 찾으러 갔다 올게. 지금 막내 밥 먹고 있으니 밥 먹는 것 좀 도와줘."

"알겠어."

아내는 슬기씨 답을 듣고 집을 나섰다. 그런데 10분 뒤, 남편 번호로 전화가 왔다. 둘째 목소리였다. 길이 엇갈려 집에 먼저 도착한 듯했다. 그런데.

"엄마,
아빠가 쓰러져서 움직이지 않아.
"

아내는 119신고 먼저 하라고 한 뒤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남편은 부엌 냉장고 앞에 쓰러져 있었다. 넘어지면서 부딪혔는지, 냉장고에 움푹 파인 자국이 있었다. 몸이 굳은 채 식은땀이 흘렀고, 새파래진 입술 사이로 분비물이 흘러나왔다. 6시 20분쯤 구급대원이 도착했지만, 이미 슬기씨의 의식은 없었다. 구급대원은 심폐소생술을 진행한 뒤, 30분 정도 지나 병원으로 출발했다. 아내가 구급차에 함께 올랐다. 병원 도착 시간 오후 7시.

'병원만 가면 살 수 있겠지.' 아내의 소망은 무참히 깨졌다. 전기 충격도 아무 효과가 없었고, 병원은 결국 심폐소생술을 중단했다. 오후 7시 22분,
사망 판정이 내려졌다.
사인은
심실세동과 심근경색
이었다.
향년 41세.


교회 피아노 도맡던 소년, 택배기사로



슬기씨가 40대에 택배기사로 일하다 과로사했다. 과로사? 택배기사? 그는 사실 배달원보다는 예술가가 어울렸다. 슬기씨가 중학생일 때 교회 주일학교 교사였던
남기업(55)씨
는 그를 '음악 재능이 아주 출중한 친구'로 기억했다. 절대음감을 지녔고, 처음 듣는 곡도 곧바로 따라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청음 능력이 탁월했다. 중학생으로 교회 성인 예배 찬양팀 피아노 반주를 맡았다. 가족이 잠시 수원을 떠났을 때에도 1호선 지하철을 타고 수원에 있는 교회를 찾아 피아노 반주를 했다. 교회에서 "그 집은 엄마, 아빠가 집사가 아니라 아들이 집사 아니냐"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열심이었다.

고인이 생전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모습. 유족 제공


고등학교 1학년 같은 반 친구였던
진순용(42)씨
에게 슬기씨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친구였다. 이성, 동성을 가리지 않고 잘 어울렸다. 당구장, PC방에 가면 늘 이겼지만 우쭐대지 않았다. 그러면서 친구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등굣길에 만나는 친구에겐 오른손을 들며 "에이~ OOO"이라고 별명을 외치며 하이파이브를 청했다. 슬기씨 별명은 코미디언 '심형래'였다. 친구들은 그를 "형래야"라고 불렀지만, 화내는 법이 없었다.

슬기씨는 동아방송예술대에서
작곡을 전공했다
. 순용씨가 대학 근처로 놀러가면 그는 생맥주 한 잔에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도, "악상이 안 떠오른다"며 밤을 지새우곤 했다. 대학 졸업 후 당연한 듯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근처에 있는 녹음 스튜디오에 취업했다.

아내도 음악으로 만났다. 교회에서 페이 연주자로 일하다 인연이 됐다. 슬기씨는 피아노를, 아내는 오르간을 연주했다. 3년 연애 끝에 2011년 결혼했다. 그 후로도 4, 5년 정도 녹음 스튜디오에서 일했다. 신혼집을 마련한 수원에서 차를 몰아 출퇴근했다.

2015년 '조금의' 일탈을 시도했다. 아내가 둘째를 낳은 뒤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수입이 안정 궤도로 오르면서, 작곡가의 꿈이 스멀스멀 되살아났다. 아내와 상의하고 스튜디오를 그만뒀다. 녹음, 미디(MIDI) 작업, 편곡 등을 도맡아 하면서, 작곡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학원 일을 조금씩 돕는 것 외엔 집에서 육아와 작곡에 시간을 쏟았다.

벌이는 역시나 신통치 않았다. 저작권협회에 몇 곡이 등록됐지만,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느덧 자녀는 둘에서 넷으로 늘었고, 아내도 기존 학원을 접고 새로운 도전에 나서면서 슬기씨의 조력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사는 집도 수원에서 남양주로 옮겼다.

고인이 생전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모습. 유족 제공


택배기사는 '벼룩시장' '알바몬' 같은 사이트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일자리였다. 진입 장벽이 낮았다.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어차피 잠깐 하는 건데 어때'라는 생각이 앞섰다. 운전도 자신 있었다. 화물운송 사업자로 등록해 경기 오산시 홈플러스에서
택배기사로 일을 시작
했다. 2022년 3월이었다.

일은 만만치 않았다. 오전 9시 30분쯤 출근해 온라인 주문 상품을 배송한 뒤, 오후 7~8시에 퇴근하는 일과를 주 6일 반복했다. 결혼 후 살집이 붙은 체형을 유지해 왔지만, 처음 하는 육체 노동에 살이 쭉쭉 빠졌다. 물론 적응에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체형도 금세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러면서 택배 일에 더 욕심이 났다. 아내에게 "이쪽 일을 좀 더 확장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동료기사와 함께 마트와 배송기사를 연결하는 운송사 사업을 하려 했다. 아내는 "할 수 있으면 한 번 해보라"며 지원했다.

하지만 사업이 술술 풀릴 리 만무했다. 일이 꼬였고, 경제적 어려움만 커졌다. 결국 사업은 금방 관뒀다. 그사이 다른 하청업체가 더 좋은 조건에 입찰을 따내면서 홈플러스에서 계속 일하기도 어려워졌다. 아이 넷에 나가는 돈만 늘어가는 상황. 당장 돈 벌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아야 했다.

"제가 애가 넷이나 돼요"



동아줄은 유튜브에 있었다. 슬기씨가 아내에게 유튜브 영상을 보여줬다. 제목은 '쿠팡 플렉스가 사실은 이렇습니다'였고, 썸네일(영상 대표 이미지)에는 '쿠팡 퀵플렉스 수익 계산/ 실수령액 780만 원-부가세-유류비-보험비-유지비=순수익 @유가보조금'이라고 적혀 있었다. 슬기씨가 홈플러스에서 받던 돈의 2배였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똑같은 일인데 이렇게나 된다고?"

"그치? 괜찮지? 그래, 그러면 내가 1톤 트럭 하나 구해 갖고 한번 시작해볼게."

슬기씨는 쿠팡로지스틱스서비스(CLS) 남양주2캠프 굿로지스대리점과 택배기사 위수탁 계약을 맺고
'쿠팡 퀵플렉서'
로 일하기 시작했다. 2023년 4월 13일이었다.

그날부터 약 13개월간, 그의 야간 일과는 다음과 같았다. ①오후 8시 40~50분 남양주 다산동 자택에서 남양주2캠프로 출근 ②오후 9시, 담당 지역 택배물품 바코드를 스캔해 배송차량에 적재 ③오후 9시 30분~10시, 배송지인 상봉동으로 이동 ④밤 12시 10~20분, 캠프로 복귀 ⑤오전 1시, 2차 적재 후 배송 ⑥오전 3시 10분, 3차 적재 후 배송 ⑦오전 7시, 배송 완료 후 퇴근.

매일 밤 남양주 캠프와 상봉동을 3회 왕복하고, 담당 구역을 3회 돌았다.
배송 물품을 실은 간선트럭이 오후 8시, 오전 1시, 오전 3시 세 차례 캠프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한 집에서 쿠팡 새벽배송으로 주문한 물건 3개가 오후 8시, 오전 1시, 오전 3시 캠프로 들어오면, 하룻밤 사이에 이 집을 세 번 방문해야 했다. 2·3차 트럭에 어느 집 물건이 실려올지, 어느 정도의 물량이 들어올지 예상하는 건 불가능, 한 번에 모아 배송할 수가 없었다.

고 정슬기씨의 하룻밤 동선. 그래픽=송정근 기자


특히 그가 맡은 상봉동은 캠프에서 약 20㎞로 떨어져 있었다. 차로 20~30분이 걸렸다. 출퇴근 거리를 제외하고도 하룻밤 사이에 100㎞를 왕복해야 했다. 배송 사이사이 프레시백 회수 등 잡무도 많았다.

오전 7시를 넘겨선 안 된다는 불안감, 스트레스도 상당했다. 배송 마감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이른바 '던 미스(Done-miss)'가 전체 물량의 0.5%를 넘어서면 '구간 회수'(클렌징)에 해당, 불이익을 받았다. 대리점이 구간을 '클렌징'하면 배송기사는 일자리를 잃게 된다. 그는 특히 캠프에서 가까운 지역을 맡은 배송기사보다 1시간 30분쯤을 도로 위에서 더 보내야 했다. 빠듯한 배송 시간.
휴가도, 명절도 없었다.


배송기사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 도우며 사력을 다했다. 슬기씨도 배송을 일찍 마치는 날, 물량이 몰린 다른 택배기사 지원에 나섰다. 상부상조 방식이라 다른 기사 물품을 배송한다고 수당을 더 받는 것도 아니었다. 같은 대리점에서 일하는 동료는 아침 7시 전에 배송을 완료하지 못할 것 같은 위기가 오면, 슬기씨에게 급히 카카오톡을 보내곤 했다.

"몇 시에 끝나세요?" "일찍 끝날 수 있으세요?"

답은 한결같았다.

"한번 겁나 뛰어볼게요."

그러고는 헉헉 숨을 몰아쉬며 뛰어왔다. 일을 시작한 지 9개월이 지난 지난해 1, 2월에도 슬기씨는 '다른 택배기사 구역 도움이 시급하다'는 쿠팡CLS 직원 요청에 "
개처럼 뛰는 중요ㅜ
" "개처럼 뛰고 있긴 해요"라고 답했다.

쿠팡 일을 시작하고 한 달 만에 10㎏이 빠졌다. 홈플러스 때와 달리 시간이 흘러도 체형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내는 걱정이 앞섰지만, 남편은 오히려 담담했다.

"괜찮아. 충분히 할 수 있어. 그리고 나는 다른 동료분들에 비하면 굉장히 쉽게 일하고 있는 거야."

"이게 쉽게 일하는 거라고?"

"응. 내가 담당하는 지역은 엘리베이터도 많고. (서로 지원해주는) 파트너가 없었으면 아마 지금까지 일하지 못했을 거야. 파트너한테 고마워하고 있어."

지난해 4월 8일, 일한 지 1년 만에 담당 구역이 바뀌었다. 그간 대리점은 쿠팡과 중랑구 316A~D 지역을 위탁받아 슬기씨에게 316B, C 구역을, 그의 파트너에게 A, D 구역을 맡겼다. 어느 한쪽에 일이 과하게 쏠리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파트너가 일을 그만두고, 대리점이 기사를 새로 뽑지 않으면서 대리점은 A, B 혹은 C, D 지역을 '클렌징' 당하고 하나만 택해야 했다. 슬기씨는 물량이 많은 C, D 지역을 택했다. 다분히 수입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새 구역에는 혼자 감당할 수 없는 물량이 쏟아졌다. 아르바이트 기사를 고용해야 했다. 캠프에서 택배 물품을 실은 뒤 아르바이트 기사에게 물량의 4분의 1 정도를 건네주고, 물량 1개당 900원을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아내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알바까지 쓰면서 해야 하는 거야? 그냥 할 수 있는 물량만 하면 안 돼?"

"내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냐.
400개가 나오든, 500개가 나오든 그 구역은 내가 무조건 소화해야 해
. 소화를 다 못 하면 잘릴 수 있어. 그래서 다른 택배기사들도 알바 쓰면서 하고 있어."

고인의 생전 모습. 유족 제공


몸이 부하를 견디지 못했다. 단순히 물량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배달해야 하는 아파트 동 수, 빌라, 주택 수가 더 많아졌다. 차량 진입이 어려운 좁은 골목길에 딸린 집도 늘었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건물도 있었다. "무릎이 닳고 있는 것 같아." 구역이 바뀐 뒤 아내에게 토로하는 일이 잦아졌다. 캠프에서 만나는 동료에게 "엄청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 것도 이때쯤이었다. 배송 출발 전부터 창백한 얼굴로 땀을 흘리고 있었다는 목격담도 나왔다.

그나마
이를 악물고 버텼던 건 수입 때문
이었다. 월 500만 원 이상을 벌었다. 추석 등 명절이 있어 물량이 많은 달에는 600만 원 이상일 때도 있었다. 담당 구역이 변경된 뒤로는 700만 원대를 찍었다. 아르바이트 기사 급여, 하루 4만~5만 원의 기름값을 빼야 했지만, 아이 넷이 있었고 아내도 사정상 학원을 그만둔 상황에서 일을 멈출 순 없었다.

지난해 5월 8일, 어버이날을 맞아 슬기씨는 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했다. 어머니는 배송 일을 하는 아들이 걱정됐다.

"아들, 건강 잘 챙기면서 일해."

그는 부모님께 평소 하던 대로 "괜찮다" "걱정 말라"고 말할 수 없었다. 대신 이렇게 답했다.

"엄마, 제가 애들이 넷이나 돼요."

슬기씨는 그로부터 20일 후, 쓰러졌다. 외투 주머니에선 타이레놀 통이 발견됐다. 언젠가 슬기씨가 진통제를 찾길래, 아내가 건넸던 그 약이었다.

"어느 나라에서도 하지 않는 노동"



슬기씨의 아버지 정금석(70)씨는 아들이 사망할 때 방글라데시 시골마을에 있었다. 회사를 다니다 정년 퇴직을 했고, 10년 전부터 이곳에 학교를 짓고 선교 활동 중이었다. 여느 때처럼 아내, 다른 선교사와 기도를 준비하고 있을 때, 며느리에게서 전화가 왔다. "애들 아빠가 쓰러져서요. 지금 응급실에 가고 있어요. 다시 연락 드릴게요." 금석씨는 놀랐지만, 아들이 사망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건강한 아들이었다. 그러나 30분 후 막냇동생한테서 연락이 왔다. 슬기가 죽었다고.

금석씨는 아들 장례식 며칠 뒤 대리점 대표를 만나러 갔다. 산업재해보상보험을 신청하면 대리점이 곤란해진다는 얘기에, 대리점과 '좋게' 합의할 생각이었다. 대리점 대표의 말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산재 노무사는 저보다 훨씬 산재를 많이 경험해봤을 거 아니에요? 노무사랑 얘기해보니, 근무 중이 아니었다는 것과 퇴근 후 바로가 아니라 휴식을 취하고 일어나서 식사까지 하시고 저녁 때 그러신 거니까 (...) 물량이 증가되고서 한 게 6주에서 7주이기 때문에..."

산재를 인정받기 어려울 것 같다는 얘기였다. 그러곤 합의금 1억5,000만 원을 제시했다. 유감 표명은 없었고, 합의했을 때 세금이 어떻게 부과되는지로 말을 슬쩍 옮겼다. 금석씨는 대화를 마치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택배노조를 찾아갔고, 산재를 신청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지난해 10월 슬기씨의 산재를 인정했다.
공단 재해조사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겼다. ①발병 전 4주간 1주 평균 업무시간 74시간 24분(야간근무 30% 할증 적용 시) ②1월부터 사망일까지 하루 평균 배송물량 279개, 하루 취급 무게 446㎏ ③담당 구역 변경 후 하루 평균 325개 ④주 6일 휴게시간 없는 고정 야간근로.

임상혁 녹색병원 원장(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은 소견서에 이렇게 썼다. "망인은 업무로 인해 심근경색이 발생하여 사망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특히 야간노동, 정신적 긴장 등을 원인으로 꼽았다. "연속적인 고정된 야간노동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 논문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연속적인 고정된 야간노동이 건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너무 위험한 노동이라 어느 나라에서도 시행하지 않는 노동
이기 때문입니다."

고인의 아버지 정금석씨가 지난달 15일 서울 송파구 쿠팡 본사 앞에서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손영하 기자


금석씨는 아들의 부음을 듣고 한국으로 돌아오던 비행기에서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나름대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려고 애썼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손가락질 당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왜 저희한테 이런 아픔을 주십니까." 아무런 답을 들을 수 없었다.

산재가 인정되면서 유족들은 매달 유족보상연금을 받을 수 있게 됐지만, 금석씨는 방글라데시로 돌아가지 않았다.
택배노조 추산 쿠팡 퀵플렉서는 약 1만5,000~1만8,000명.
이 가운데 절반가량이 '연속적인 고정된 야간노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아들와 같은 사례가 반복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빠가 로켓배송 연료가 됐대"라는 첫째 손주, 사회를 향한 불신이 커져 "힘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둘째 손주도 눈에 밟혔다.

금석씨는 오랜 기다림 끝에 지난달 19일 홍용준 쿠팡CLS 대표에게서 대면 사과를 받았다. 강한승 쿠팡 대표도 이틀 뒤 국회에서 열린 '쿠팡 택배노동자 심야노동 등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청문회'에 참석해 과로사 노동자 유족에게 사과하겠다고 밝혔다. 강 대표는 또 연속 심야 노동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대화에 참여할 것을 약속하며 "사회적 대화를 통해 도출되는 (노동 문제 관련) 결론에 대해 성실히 이행하겠다"고 했다.

그사이 반년 넘게 금석씨는 아침을 먹지 않았다. 그 전과 똑같이 살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다. 그리고 하루 1시간씩 쿠팡 본사 앞에서 피켓을 들고 기도했다. 훗날 아들과 다시 만날 때, 어떤 말을 할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아들을 만나면 '내가 널 지켜주지 못해서, 남은 생 너 생각하면서 이렇게 살았다'고 말하고 싶어요. 네가 죽은 걸 잊지 않았고, 너를 항상 마음에 품고 살았다고요."

일러스트=신동준 기자


그래픽=김대훈 기자


■ 한국일보 엑설런스랩
팀장: 김혜영 기자
취재: 손영하 · 이서현 기자, 이지수 인턴기자
데이터 분석: 황수현 기자
플랫폼: 박인혜 플랫폼서비스팀장
영상: 김가현 인턴PD

회차순으로 읽어보세요

  1. ① 교수, 장관, 회장의 별세만 특별할까…"미처 몰랐던 보통 삶의 비범한 희망"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11309550004945)
  2. ② 생면부지 남을 구하러 목숨을 던졌다..."다시 돌아와도 또 도울 사람"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11309570000462)
  3. ③ 작곡가를 꿈꾼 택배 기사...'어느 나라에서도 안 하는 노동'을 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1131013000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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