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쏘아 올린 '관세 전쟁'에 전 세계가 혼돈에 빠진 가운데, 우리 정부가 오늘(15일) 반도체 산업 지원 방안을 발표했습니다.
세부 과제는 15개. 가장 눈에 띈 건 반도체 산업에 ' 직접 보조금'을 주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반도체 기업이 투자를 결정하면, 정부가 현금 보조를 해준다는 겁니다.
정부로서는 처음 해보는 정책입니다.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분야 중소·중견 기업이 대상입니다. 신규 투자 금액의 30~50%를, 최대 200억 원까지 보조받을 수 있습니다.
■ "보조금을 보조금이라고 부르지 말자"
지금까지 우리 정부는 반도체 기업들에 직접 보조금을 주는 데에 부정적이었습니다. 해외 사례를 들며 업계가 요구해도 손사래를 쳐왔습니다. 이미 시행 중인 세제 지원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지난해 9월 반도체 등 전략 산업에 최대한 지원할 생각이라면서도 "특정 대기업이 정부의 직접 보조금을 원하고 있다거나, (보조금이) 대기업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정부가 가장 신경 쓴 건 세계무역기구(WTO)였습니다.
WTO는 한 국가 내에서 자국 산업에 지급하는 보조금을 규제하는, 이른바 '보조금 협정'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하면, 특정 국가가 국내 기업만 재정적으로 도와서 다른 회원국의 기업에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다른 회원국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면 상계관세를 매길 수 있게 했습니다.
국회에서의 '반도체 특별법' 입법 과정에서도 정부의 이런 고민이 엿보입니다.
지난 2월, 국회에선 반도체 특별법의 구체적인 내용 논의를 위한 법안소위원회가 열렸습니다. 거기서 정부 측은 '사실상' 보조금이더라도, "보조금"이라고 명시하진 말자는 의견을 냅니다. 분쟁 우려가 있다는 거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박성택 산업통상자원부 1차관은 "상계 관세라든지 통상 분쟁의 소지가 여전히 남아 있다"며 "미국의 칩스 액트(Chips Act, 반도체법)에서도 구체적으로 '서브시디(subsidy, 보조금)'라는 그런 표현을 쓰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 회의에선 정부가 너무 소극적이란 질타도 있었습니다. WTO 협정의 '안보 예외 조항'을 활용하면 되는데 왜 걱정하느냐고 야당 의원이 지적했습니다.
WTO 탄생의 토대가 된 GATT 제21조는 어떤 회원국이 '국가 안보'를 이유로 내세울 경우, 협정상 의무를 면제받을 수 있다는 내용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명분을 마음껏 활용하는 대표적인 나라가 있죠. 바로 미국입니다.
■ 문제를 삼으면 문제는 되지만…
정부는 사업명을 '보조금'이 아닌 '투자 지원금'으로 정했고, 투자 지원금 대상이 '경제 안보' 목적의 공급망 안정화 품목, 전략 물자로 정했기 때문에 예외 조항에 해당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WTO 보조금 협정은 이름이 무엇이건 실질적인 내용을 따집니다. 누군가 문제를 제기할 여지는 충분하다는 게 전문가 견해입니다.
국제 통상 분쟁 전문가인 한창완 변호사는 "(이번에 발표된 보조금이) 어떤 구조든, 결국 특정하고 한정된 분야의 기업 또는 지역 기업에 경제적 혜택을 준다면 보조금에 해당할 수 있다"며 "협정 위반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미국도, 중국도, 일본도, 유럽도 모두가 대놓고 '보조금'을 주는 시대에 누가 문제로 삼을까 싶기도 합니다. 이미 반칙이 일상화된 시대입니다.
■ WTO 모범국가 한국마저…
우리 정부가 내내 거부하던 직접 보조금을 선택한 이유,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시급성'입니다. 최상목 부총리는 오늘 오전 열린 경제관계장관회의 겸 산업경쟁력강화 관계장관회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국 정부가 상호관세 부과를 90일간 유예했고, 반도체·의약품 분야도 품목별 관세 부과가 예고돼 있습니다. 글로벌 통상 전쟁을 맞이한 우리 기업의 전력 보강을 지원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입니다."
한창완 변호사는 "사실 우리나라는 WTO의 협정을 '식물화'에도 불구하고 잘 지켜온 모범 국가"라며 "규범 위반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정부 입장에선 반도체 산업 자체의 흥망이 달려있다 보니, 당장 우리 기업을 살리기 위해 리스크를 감수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설명했습니다.
보다 근본적인 둘째 이유, 앞서도 언급된 WTO의 '무력화'입니다. 앞서 국회에서도 논의됐듯, '보조금'이라고는 명시하지 않지만, 많은 국가는 실질적으로 국내 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WTO는 먼저 나서서 이걸 규제하지도 못합니다.
허윤 서강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는 "우리가 보조금을 준다고 해서 (WTO에서) 당장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피해를 본 기업들이 상계관세를 물리거나 WTO에 제소해야 한다"며 "그런데 전 세계가 '산업정책 2.0' 내지는 '산업정책의 부활'을 말하는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
먼저 이번 보조금이 반도체 대기업을 비롯한 전체 산업이 아니라 소부장이란 특정 분야, 또 그중에서도 중소·중견기업이란 점에서 다른 국가에 끼치는 '피해'가 그렇게 크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을 거란 분석이 나옵니다.
게다가 실제로 우리의 보조금 정책, 다른 나라에 비하면 다소 늦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각국의 제조업 보조금 규모는 2021년을 기점으로 가파르게 늘어, 지난해에도 5천억 달러, 우리 돈으로 700조 원이 넘었습니다. 미국, 중국뿐 아니라 일본, 인도, EU 등 많은 곳에서 재정을 통해 보조금을 지급합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이런 '산업정책의 부활'의 대표적인 정책으로 보조금을 쓰고 있다면서, "(미·중·EU 사이의 데이터를 보면) 한 나라가 특정 산업에 보조금을 주면, 다른 나라도 같은 산업에 비슷한 조치를 1년 이내에 시행할 확률이 평균 73.8%에 달한다"고 분석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는 약 700억 원 규모를 올해 처음 도입하겠다고 한 겁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어떤 국가가 한국의 보조금 때문에 피해를 당하였다고 WTO에 제소한다면 어떨까요? 허 교수는 그런 상황 자체가 "쉽지 않다"고 말합니다. " 1심에서 이긴들 2심도 작동이 안 되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WTO의 분쟁 해결은 쉽게 말해 2심제입니다. 1심은 WTO에서 구성한 패널들이 누가 잘했고 못 했는지 판단하는데, 사건의 약 70%가 이 판단에 불복합니다. 그럼 2심 격인 상소기구로 사건이 넘어갑니다. 그런데 2019년부터 이 상소기구에서 판단을 해줄 상소위원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WTO의 분쟁 해결 능력이 마비됐다는 건 이 상황을 말합니다.
정리하면, 누군가 '걸면' 걸리겠지만 ① 딱히 그럴 사람도 없고(모두 다 보조금을 주고 있기 때문에) ② 그걸 해결해 줄 사람도(WTO 분쟁해결절차가 무력화됐기 때문에) 없다는 게 지금 국제통상 환경입니다.
WTO '모범생'이었던 한국 정부가 결국 각자도생의 길을 택한 건, 결국 한국이 처한 환경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뒤처지도록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 "큰 흐름 바뀌기 전까진 암울한 현실"
그렇다면 누가 WTO 식물화에 가장 책임이 클까요.
미국입니다. 미국이 WTO 상소위원 선임을 막고 있습니다. 재판소는 있는데 재판관을 비워둔 의도는 말하지 않아도 뻔합니다.
미국의 이러한 정책들은 이른바 세계화의 폐해를 말하는 '러스트 벨트' 노동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합니다. 이러한 여론의 큰 흐름이 바뀌지 않는 한 단기적으로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화해한다고 해도 '제2의 트럼프'는 반복해서 나타날 거란 전망이 나옵니다.
허윤 교수는 "물가가 오르고, 금융 시장이 불안해지고, 경제 성장은 둔화하고, '정말 다신 이쪽(자국우선주의·보호무역)으로 가선 안 되겠다는 유권자들의 인식이 있어야 재세계화가 될 거란 측면에선 굉장히 암울하다"고 설명했습니다.
지난달 한국과 중국, 일본의 통상 수장들이 만나 WTO의 개혁과 '자유무역 수호'와 '규범·규칙 기반의 질서 유지'를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2주 뒤 'WTO 모범국' 한국마저 직접 보조금을 선택했습니다.
현재 국제 통상의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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