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대선 어젠다 ②
[기고] 이관후 국회 입법조사처장
혐오 먹고 자라는 극우
폭력화 넘어 정당화·제도화 시도
말 아닌 폭력 앞세운 정치혐오
인간사회를 원시상태로 되돌려
[기고] 이관후 국회 입법조사처장
혐오 먹고 자라는 극우
폭력화 넘어 정당화·제도화 시도
말 아닌 폭력 앞세운 정치혐오
인간사회를 원시상태로 되돌려
지난달 29일 울산시 남구 번영사거리 일원에서 개신교 단체 세이브코리아 주최로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헌법재판소는 민주주의와 헌법, 그리고 정치를 말했다. 초등학생들도 이해할 수 있는 말들이었다. 헌재는 상식을 말했고, 상식은 명문이 되었다. 상식이 명문이 된 나라는 불행하다. 과거에 누군가, 우리가 10년도 지나지 않아 두번이나 대통령을 탄핵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면, 나는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아무리 형편없이 무너지더라도 그런 정도는 아니라고 답했을 것이다. 쿠데타나 탄핵은 남반구의 나라들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지, 시민들의 피와 땀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한 나라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웃었을 것이다. 오만했다.
다시, 죽은 자들에 빚진 대한민국
죽은 자들이 또 산 자들을 살렸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될 때 국회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파면될 때, 광화문에서 오열한 사람들은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이었다. 헌법재판소가 밝힌 대로, 12월3일의 밤에 계엄의 실질적 발동을 멈춘 것은 시민들의 저항과 동원된 군경들의 소극성이었다. 5월18일의 광주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다. 상시적으로 시민의 희생을 요구하는 민주주의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민주주의는 제도적 안정성과 실질적인 문제해결 능력을 갖춰야 한다. 갈등을 발굴하고 조정하고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반복적으로 나쁜 정치인이 선출되거나,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기는커녕 조장하고 이용하는 일이 되풀이된다면, 국민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잃고, 서로를 혐오하게 된다. 정치적 불신과 양극화가 극대화되는 시점이다.
극우는 혐오를 먹고 자란다. 극우의 본질적인 속성 중 하나는 혐오의 폭력화다. 다음 단계는 혐오의 정당화이고, 최종적으로는 혐오의 공식화와 제도화가 시도된다. 혐오 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정치에 대한 혐오’다. 그것은 폭력을 정당화하며 일체의 토론을 중단시킨다. 혐오는 한 사회 내의 소수 세력과 이방인을 향한다. 혐오는 스스로를 다수로 포장하는 사람들이 폭력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활용하는 정념적인 도구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정치를 발명했다. 폭력이 아니라 말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인간 공동체를 지속시킬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에 대한 혐오는 인간 사회를 원시 상태로 되돌린다. 그것은 과학적·경제적 발전과 관계가 없다. ‘유대인은 죽여도 돼’, ‘조센징은 죽여도 돼’라는 말들은 발전된 국가들에서 구상되고 실현되었다. 나와 정치적 견해가, 종교가, 민족이, 국적이, 출신 지역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혐오는 극우가 자라나는 토양이 된다.
지난해 7월30일 프랑스 북부 에냉보몽에서 극우정당 국민연합(RN) 지지자들이 총선 1차 투표 결과를 보고 환호하고 있다. 에냉보몽/AP 연합뉴스
극우 포퓰리즘은 세계적 현상
헌재의 선고는 절반의 민주주의였다. 그것은 4·19에서 이태원 참사까지 피를 먹고 자란 민주주의의 최후 방어선이었다. 헌정질서의 테두리 안에서 내전의 발발을 막아낸 민주주의의 마지노선이었다. 그러나 마지노선을 지켜냈다고 민주주의가 저절로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이번 계엄과 탄핵 사태에서 증명된 것이 있다. 민주주의와 정치를 위협하는 ‘혐오’라는 전염병이 에스엔에스(SNS)와 일부 종교집단을 매개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고, 대통령도 그것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혐오를 내재화하고, 그것을 가감 없이 표출하며, 이를 폭력적 수단을 통해서도 정당화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규모가 대단히 커졌다. 혐오가 일정 규모로 조직화·장기화되면 이것은 내전의 씨앗이 된다.
계엄으로부터 123일째 되는 날 탄핵 선고가 났다. 이 기간 동안 대한민국은 극우 세력과 반극우 세력 간의 심리적 내전을 겪었다. 이런 상황은 비단 우리만 경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극우 포퓰리즘의 발호는 전세계적 현상이다. 이는 탈냉전 이후의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전개, 신자유주의가 광범위하게 구축한 불평등의 심화, 다자주의적 국제질서 속에서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의 새로운 발흥, 정당정치와 대표 체제의 근본적 위기, 디지털 기술과 결합된 정치·언론 환경의 변화가 지구적 수준에서 가져온 정치적 변화에 기인한다. 개별 국가들에서는 선동적 정치인과 그를 추종하는 대중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매개의 종류, 수단, 양상, 범위, 강도에 따라 극우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처럼 극우 포퓰리즘은 보편성과 특수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 그에 대한 대응도 이를 포괄하는 차원에서 다양하게 모색되어야 한다.
극우를 넘어서는 다섯가지 방법
우선, 혐오의 일상화를 막아야 한다. 혐오가 상투적인 것이 될 때, 극우는 금세 제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이 혐오의 평범성이다. 혐오는 전염되면서 증폭된다. 세월호 유가족의 단식에 가해진 ‘관장사’라는 폭언과 ‘폭식투쟁’을, 우리는 그저 해프닝으로 여겼다. 그로부터 ‘빨갱이는 죽여도 돼!’라는 말이 나오기까지 불과 1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홍성수 교수의 말처럼, 말은 칼이 되었다. 혐오의 일상화를 막지 못하면, 우리는 극우에 무감각하게 된다.
둘째, 혐오의 정치화를 막아야 한다. 외국인에 대한 근거 없는 공격이 극우의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은 세계적 현상이다. 과거 중국과 일본에서 나타나는 혐한을 저열하고 비문명적인 것으로 여겼는데, 이제는 한국에서 혐중이 정치적 수사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탄핵 재판 과정에서 보듯이, 외국인 혐오와 관련한 어떤 주장도 제대로 된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이런 주장들이 정치적 공간에서 용인되고 확산된다면, 그보다 더한 주장들도 곧 퍼지게 된다. 외국인 혐오는 국내적으로는 극우의 자원이 되고, 국제적으로는 외교적 걸림돌이 된다.
셋째, 혐오의 상업화를 막아야 한다. 서울서부지법 사태 때, 경찰은 증거 수집이 필요 없었다. 불법과 폭력을 저지른 자들 스스로가 자신의 범죄를 촬영하고 공개했다. 혐오가 돈이 되기 때문이다. 상업화된 극우는 법적 처벌로 막기 어렵다. 그들에게 처벌은 훈장이 되고, 이 훈장으로 또 돈을 번다. 극우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동원하고 모금하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혐오와 차별, 극우의 상업화는 정치화보다 더 무섭다. 폭력을 조장하는 극우의 돈벌이를 범죄 수익으로 환수하는 것을 검토해야 한다.
넷째, 혐오의 공식화를 막아야 한다. 민주적·정치적 해결책을 거부하는 극우는 폭력성을 본질로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폭력을 통해서 불법적으로 민주주의를 위반하다가, 나중에는 선거나 쿠데타를 이용해 합법적 공권력을 획득하고 동원하려고 한다. 법치의 외형을 통해 혐오 폭력의 정당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제도적 측면에서 혐오가 공식화되는 것을 철저하게 막아야 한다. 입법과 정책에 차별과 배제를 강화하는 반민주적 요소가 스며드는 것을 특히 주의해야 한다.
다섯째, 혐오의 기반이 되는 불평등을 줄여야 한다. 이민자에 대한 공포와 적대는 신자유주의의 산물이다.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는 자본의 광범위한 이동을 보장했고, 이를 통해 확장된 국제 분업체계와 노동력의 국제적 이동은 국민국가들에서 저임금 노동자들의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극우는 이 상황을 을과 을의 가짜 대결로 단순화하고, 외국인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를 조장한다. 그러니 극우의 선동에 대한 비판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극우를 불러낸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구조적으로 시정되지 않으면, 극단적인 해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잦아들지 않을 것이다.
지난 1월19일 극우 시위대의 기자 폭행 장면을 담은 문화방송(MBC) ‘뉴스데스크’ 보도 장면. 문화방송 누리집 갈무리
민주주의의 전제, 인간의 오류가능성
맹신의 시대다. 알고리즘의 늪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진리라고 확신한다. 이런 곳에서는 민주적 정치가 존재하기 어렵다. 정치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차이를 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극우 파시즘이란 결국 정치의 부재다. 거기에는 옳은 하나의 의견만이 존재한다. 여기서 모든 말은 힘을 잃는다. 이 언어의 공백 상태에서는 힘에 의한 통치만이 가능하다. 이 힘은 물리적 폭력을 통해서 나타나기도 하지만, 다수의 이름으로 시민들을 통제하기도 한다.
우리가 자주 망각하는 민주주의의 핵심 개념 중 하나는 ‘오류가능성’이다. 누구의 의견도 완전할 수 없고, 자신의 주장을 진리라고 강요할 수 없다는 이 발상이 근대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했다. 이것이 바로 탄핵 재판에서 잘못 이해되었던 ‘계몽’의 본래 뜻이다. 계몽된다는 것은 회의한다는 것이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대통령이든, 지휘관이든, 유명 유튜버든, 종교 지도자든, 일단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누구의 말도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며, 오류를 저지르는 평범한 사람들의 여러 생각들 속에서, 만사를 의심해가면서, 근거 없는 주장들을 배제해 나가는 다소 지루한 과정을 통해 세상을 운영하자는 것이 민주주의다. 확신과 열정으로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고, 내 말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민주적 지도자가 아니다.
계엄과 탄핵, 심리적 내전 상태를 지나 치러지는 대선을 앞두고 있다. 민주주의와 정치, 상처받은 공동체를 복원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탄핵 재판에서 이긴 것은 헌재도, 특정 정치세력도, 변호사들도 아니었다. 민주주의와 시민, 우리를 지켜준 죽은 자들과 그들이 남긴 역사였다. 여기에는 극우가 설 자리가 없고, 자신을 앞세울 수 있는 사람도 없다. 극우와 싸우겠다면서 혐오와 배제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미국 워싱턴 링컨기념관에 있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대리석 조각상. 한겨레 자료사진
링컨 같은 지도자는 정녕 꿈인가
공동체의 통합과 미래에 대해 충분히 말할 수 있는 대선이기를 바란다.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고,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어제가 아니라 오늘이다. 분노와 미움으로는 나라를 통치할 수 없다. 마음 같아서는 내전 이후 국가의 재건과 통합에 온 힘을 기울였던 에이브러햄 링컨 같은 지도자가 나오기를 희망한다. 링컨은 어떤 적과도 대화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고, 분열과 갈등을 넘어 소통과 포용, 타협과 조정이라는 정치의 힘을 믿었던 대통령이었다.
링컨을 존경했던 정치학자 버나드 크릭은 썼다. ‘성공한 정치인은 권력을 획득한 후에도 자신이 받았던 모욕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그에게 수많은 비열한 의혹을 제기한 상대를 원칙적으로 따져가며 대응하거나 불경죄로 다루는 사적 보복을 하지도 않는다. 정치인은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링컨은 말했다. ‘사람은 인생의 절반을 싸움에 보낼 시간이 없다. 누군가 나에 대한 공격을 멈춘다면, 나는 그에 대한 과거를 결코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위대한 시민은 위대한 지도자를 가질 자격이 있다. 전쟁과 학살과 군부독재와 불법계엄도 이겨낸 우리가 왜 그런 지도자를 갖지 못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