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타믹스 대표 모델인 A3500i와 다른 제품들 모습. 출처: 바이타믹스 공식 사이트
40대 워킹맘 A 씨는 2년 전 아이 이유식을 시작하며 장만했던 바이타믹스 블렌더를 싱크대 구석에서 다시 꺼냈다. 건강을 위해 아침마다 사과케일주스를 갈아먹기 위해서다.
제품 구매 당시에는 경쟁 제품들의 2배 이상인 가격에 망설이기도 했지만 ‘블렌더계의 샤넬’이라 불릴 정도로 성능이 좋다는 후기를 믿고 결국 ‘지르게’ 됐다. 실제로 딱딱한 과일 씨앗까지 갈아버리는 성능에 지금까지 만족하며 해당 제품을 쓰고 있다.
어느새 ‘XX계의 샤넬’ 또는 ‘XX계의 에르메스’로 유명한 생활용품들이 A 씨의 집 곳곳을 채우게 됐다. 블렌더, 헤어드라이어 등 소형가전부터 고기 집게, 치약, 때밀이 수건까지 다양하다.
A 씨는 “예물로 산 샤넬백은 장롱에 모셔두게 되지만 XX계의 샤넬은 일상생활에서 삶의 질을 높여주기에 만족도가 더 크다”며 “가격이 타 제품에 비해 다소 비싸더라도 진짜 명품과 달리 감당할 수 있는 소비 수준”이라고 말했다.
불황기에 소비 양극화가 두드러지면서 고품질 생활용품이 각광받고 있다. 소비시장이 침체할수록 평소에 저렴한 물품을 사용하더라도 특정 물품은 비싼 것을 구매하는 ‘일점호화소비’ 현상이 실생활 관련 제품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블렌더·의자부터 영양제까지
‘XX계의 샤넬’이라 불리는 제품은 다양하다. 공통점은 해당 업계에서 최고 품질로 인정받고 있으며 가격도 동종 경쟁 제품보다 비싸다는 것이다.
블렌더 브랜드 중 양대산맥으로 알려진 바이타믹스, 블렌텍은 보급형 모델은 최소 60만원에서 100만원대에 판매되고 있다. 고가 제품은 수백만원대가 기본이다. 두 브랜드는 모두 컨테이너에 내장된 칼날이 날카롭지 않은 상태에서 강력한 모터 성능으로 재료를 갈아버린다는 공통점이 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바이타믹스는 제품보증을 10년간 할 정도의 내구성, 블렌텍은 디자인에 더 특화됐다.
영국 기업 다이슨도 모터 탑재 제품으로 XX계의 샤넬을 연달아 탄생시켰다. 국내에서 다이슨의 명성을 지금의 위치에 올려놓은 제품은 스틱형 무선청소기 브이(V) 시리즈와 헤어드라이어 슈퍼소닉, 에어랩 등이다. 에어랩과 슈퍼소닉에 탑재되는 디지털 모터는 11만rpm으로 회전하며 초당 40회 바람 온도를 측정하는 열제어 시스템으로 모발 손상을 최소화한다. 에어랩 제품의 국내 공식판매 가격은 60만~70만원대다.
미국 가구 브랜드인 허먼밀러의 뉴에어론(에어론)은 ‘업무용 의자의 에르메스’라는 칭호를 받고 있다. 탄탄한 매시 소재가 척추 등 체형을 잡아주어 장시간 앉아 있어도 신체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국내 매장가격은 각종 옵션에 따라 다르지만 가장 대중성이 높은 풀(Full)체어 모델이 200만원대에 형성돼 있다. 높은 국내 가격으로 인해 해외직구 수요가 많다.
업무시간이 긴 소프트웨어 개발자 등 IT업계에서 입소문을 타던 허먼밀러 에어론은 네이버, 카카오에 도입된 바 있다. 그러다 2022년 SK하이닉스가 전 사업장에, 하이브가 용산 신사옥에 제공하면서 ‘대기업 복지’를 상징하는 제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밖에도 캐나다 요가복 브랜드 룰루레몬은 ‘레깅스계의 샤넬’, 동아제약에서 수입하는 독일 고용량 멀티비타민제 오쏘몰은 ‘비타민계의 에르메스’, 이탈리아 마비스도 ‘치약계의 샤넬’로 유명하다. 룰루레몬 레깅스 얼라인(Align)은 10만원대, 오쏘몰 이뮨 30일분은 10만원 초반대, 마비스 치약은 85mL 한 개에 1만9900원으로 가격대가 높은 편이다. 불황에도 실적 성장
이들 브랜드 대부분은 명품 브랜드와 마찬가지로 지난 수년간 급성장한 국내 소비시장과 함께 몸집을 키워왔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제로금리 상태가 이어지면서 시장에 유동성이 넘쳐나자 과시적 소비가 일상화한 것이다.
그런데 2022년 미국 중앙은행(Fed)이 금리를 올리면서 상황은 급격히 바뀌었다. 돈줄이 마르면서 명품 소비는 급감했다. 명품 브랜드 선호도가 높은 국내에서도 해외여행 등 대체할 만한 소비처가 생기면서 주요 명품 실적이 감소했다.
2023년 루이비통코리아 매출은 1조6511억원으로 전년 대비 2.4% 감소했고 영업이익도 2867억원으로 31.3% 줄었다. 같은 기간 샤넬코리아는 7% 증가한 1조7038억원 매출을 기록했으나 판관비 증가로 영업이익은 34%나 감소했다. 가방을 사러 매장 앞에서 대기하는 일명 ‘오픈런’이 사라지면서 마케팅 비용이 증가한 것으로 분석된다. 비슷한 흐름은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계속되고 있다.
반면 바이타믹스를 판매하는 아이피씨는 2023년 매출과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크게 증가했다. 나이스평가정보에 따르면 아이피씨 매출은 292억5000만원으로 2022년보다 15.96% 늘었다. 영업이익도 200% 넘게 증가했다. 아이피씨는 관계자는 “구체적인 실적을 밝히기는 어려우나 지난 2023년과 2024년 연이어 역대 최대 매출을 기록했다”며 “올해 초에는 판매가 다소 주춤했지만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을 달성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설명했다.
다이슨코리아 2023년 실적도 성장했다.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다이슨코리아의 2023년 연매출은 7942억9000만원으로 2022년보다 17.9%, 영업이익도 244억8000만원으로 23.8% 늘었다. 룰루레몬애틀라티카코리아도 2022년 2월부터 2023년 1월까지 전년 대비 38% 증가한 1173억원 매출을 기록했다. 이 기간 영업이익은 81억7000만원으로 127%나 증가했다.
오쏘몰은 지난해 1302억원 매출을 기록했다. 이는 2023년보다 8% 성장한 것으로 박카스와 함께 동아제약의 실적성장을 이끌고 있다. 허먼밀러는 지난해 7월 와디즈에서 진행한 첫 해외직구 프리오더에서 진행 8일 만에 7억3000만원을 달성했다. 2018년 한국에 진출한 마비스 치약은 지난해 말까지 400만 개가 팔렸다. 품질·마케팅 어우러져 시장 신뢰도↑
동아제약 오쏘몰 이뮨 제품 사진. 동아제약 제공
이 같은 제품 대부분은 높은 품질로 입소문을 타면서 자연스럽게 ‘XX계의 샤넬’이라는 명성이 자리 잡은 경우다. 계면활성제가 아닌 천연 민트를 함유한 마비스 치약은 처음에 유럽여행 기념품으로 국내 시장에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미 브랜드가 자리 잡은 오쏘몰 등의 제품은 ‘미투 제품’이 난립하는 가운데에서도 자기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허먼밀러나 다이슨 제품은 디자인과 기능을 흉내낸 ‘짭먼밀러’, ‘차이슨’으로 대체할 수 없는 기능을 뽐내면서 오히려 명성을 유지하는 사례다.
여기에 고급 마케팅 전략이 더해지면서 실적 성장을 견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 기업 마케팅 관계자는 “처음부터 의도하고 ‘XX계의 샤넬’로 홍보를 하지는 않았겠지만 결국 해당 제품군에서 ‘최고’라는 인식이 자리 잡으면 높은 가격에도 강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며 “인플루언서 마케팅에서는 ‘XX계의 샤넬’이나 ‘에르메스’라는 키워드를 부각시키는 사례가 많다”고 설명했다.
최지혜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박사는 “불황기에는 소비 양극화가 심화한다는 측면에서 ‘일점호화소비’ 현상이 더욱 강하게 나타날 수 있다”며 “샤넬 등 실제 명품은 브랜드가 보유한 ‘상징’에 가치를 두는 반면 ‘XX계의 샤넬’은 실제 성능이 높은 값어치를 한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불황기에도 높은 가격과 판매량을 유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