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이 지난 17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2026학년도 의대 모집인원 증원 0명 결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윤웅 기자
교육부가 의대생 10명 중 7명이 수업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의대 증원을 백지화한 것을 놓고 비판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강성 의대생에게 힘을 실어주는 ‘자충수’였다는 이유에서다.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국무총리실과 보건복지부 반대에도 ‘증원 0명’을 관철한 것인데, 관가에선 여러 해석을 내놓고 있다.
22일 국민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던 시기 의·정 갈등 문제를 총괄하게 된 이 부총리가 무리수를 뒀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14일,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는 지난해 12월 27일 각각 국회에서 탄핵안이 통과돼 직무가 정지됐다. 최 부총리가 이른바 ‘대행의 대행’을 수행한 기간은 87일이었다.
의·정 갈등을 직접 챙겨온 한 대행까지 직무가 정지되자 의대 정상화는 이 부총리에게 전권이 넘어왔다. 최 부총리는 외교 경제 등 시급한 국정 현안 때문에 의대 문제를 이 부총리에게 일임한 것으로 보인다. 한 대행과 달리 최 부총리는 의대 문제에 관여해오지 않아 사안을 잘 모른다는 점도 작용했다.
교육부는 줄곧 의대생 복귀와 의대 정상화의 열쇠를 의대 교수들이 쥐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전국 의대 학장들의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와의 물밑 협상에 공을 들였다. KAMC는 2026학년도 모집인원을 3058명으로 돌리면 의대생 설득이 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이 부총리는 KAMC란 우군을 얻기 위해 3058명안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 내에서 3058명안을 관철할 테니 의대생을 설득해달라는 ‘거래’를 한 것이다. 3월 새 학기를 앞두고 의대생 복귀가 비관적이라고 판단한 2월 무렵 이 같은 논의가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그 즈음부터 정부 내에서 증원 백지화 얘기가 본격적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교육부는 결국 지난달 7일 ‘3월 내 의대생 전원 복귀’란 조건을 달고 3058명안을 발표했다. 복지부 등이 강하게 반발했지만 최 부총리가 이 부총리에게 힘을 실어준 것으로 알려졌다. 한 대행은 당시에도 직무정지 상태였다.
한 대행이 복귀한 시점은 지난달 24일이다. 4월로 넘어가기 전 대다수 의대생은 등록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곧바로 ‘등록 후 수업 거부’ 카드를 꺼내 들었고 교육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교육부가 단순 등록은 복귀가 아니라고 의대생 압박에 나서자 이번에는 의대 학장 그룹에서 반발이 나왔다. 의대생들이 복학해 조건을 이행했으니 약속대로 빨리 3058명안을 확정하라는 것이었다. ‘수업에 들어와야 복귀’라는 교육부 입장에 “정부가 또 속였다”고 반발한 것으로 전해졌다.
교육부는 정부 내 고립무원의 처지가 됐다. 기댈 곳은 의대 학장들뿐이었다. 교육부는 수업 참여율이 20%대로 저조했지만 3058명안을 조기에 확정하기로 한다. 하지만 ‘증원 0명’을 처음 공식화했던 3월 7일과 달리 한 대행이 복귀한 상태였다.
한 대행은 반대 입장이었다. 의대생 수업 복귀를 조건으로 3058명으로 되돌린다는 것은 대국민 약속이니 지켜져야 한다면서 이 부총리를 질책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대행은 차라리 대학 자율에 맡기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이 부총리는 자신이 책임지겠다며 물러서지 않았다고 한다. 한 대행 입장에선 자신이 없을 때 이미 ‘엎질러진 물’이나 다름 없었다.
교육부도 되돌리기에는 너무 많이 온 상황이었다. 수업 참여율이 낮다고 5058명으로 되돌리는 것은 어렵게 수업에 참여하고 있는 의대생과 의대 교수들을 다시 적으로 돌리는 일이었다. 결국 지난 17일 이 부총리가 3058명안을 확정 발표했다. 복지부는 끝내 이날 브리핑에 참여하지 않았다.
한 정부 소식통은 “의사 사회는 개원의, 봉직의, 전공의 입장이 다 다르다. 의대생은 전공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병원도 대형 병원과 중·소규모 병원이 다르다. 어떤 하나의 그룹과 합의한다고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이들은 단 한 번도 단일안을 도출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결국 정부 원칙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 외에 답이 없는데, 이 부총리가 이런 의사들의 생리를 모르고 나이브(순진)하게 접근했다”고 했다.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지난 2월 11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제1차 사회관계장관회의를 주재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관가에서 이번 결정을 부총리의 개인적 욕심이나 공명심 때문으로 보는 시각은 거의 없다. 이 부총리와 교육부가 처한 상황을 들여다보는 게 올바른 접근법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 부총리 입장에서 내년 2024~2026학번이 동시에 1학년이 되는 ‘트리플링’ 상황만은 피하고 싶었을 것이란 얘기다. 의대 교육을 망가뜨린 교육 수장으로 기록되는 것은 불명예다. 재임 기간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다. 이런 이유로 이 부총리의 결정을 교육 수장으로서의 책임감에서 나온 결단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없지 않다.
교육부 관료 입장은 이 부총리보다 절박하다. 결국 의대 교육은 교육부 책임이기 때문이다. 한 대행이나 복지부가 떠맡아주지 않으며 결국 남은 문제는 고스란히 교육부 몫으로 돌아온다고 본다. 의대 교수나 의대생과 끝까지 각을 세우기 어려운 처지란 것이다. 트리플링이 불가피해진 상태에서 새 정부가 들어서는 것도 큰 부담이다. 교육부는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적폐’ ‘복지부동’ ‘교피아’ 등으로 폐지론이 거론돼 왔다. 의대 교육이 망가지도록 방치한 ‘무능’ 프레임이 덧씌워질 수도 있다.
교육부는 이 부총리가 던진 승부수에 대한 판단을 이달 말 혹은 다음 달 초까지 미뤄달라고 말한다. 교육부는 대다수 의대에서 이달 말 유급 시한이 도래하기 때문에 일부 강성 의대생을 제외하고 대다수는 돌아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를 위해 대학, 의대 교수 등과 함께 학생 설득에 나설 계획이다. 그 시작으로 이 부총리는 22일 서울 강남구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대한의료정책학교’ 주최 간담회에 참석해 의대생들과 만났다. 의대생 10명 안팎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