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산불 한달’ 복구 막막한 안동·하동
“다 타서 빨리 복구해야 하는데…”
“다 타서 빨리 복구해야 하는데…”
지난 14일 오전 경북 안동시 임하면 산 바로 아래 산불 피해를 입은 주택이 있다. 김혜윤 기자 [email protected]
“바람이 쌩 부니께 나무들이 휘떡휘떡 넘어져. 비 많이 오면 산사태 날까 겁난다카이.”
지난 14일 경북 안동시 임하면 추목리에서 만난 주민 김봉란(76)씨는 새까맣게 탄 마을 뒷산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전날 강한 비바람이 불어 불에 타 죽은 나무들이 이리저리 넘어졌다고 한다. 지난달 22일 산불이 휩쓸고 20여일 지났지만 마을엔 아직도 매캐한 연기 냄새가 가득했다.
임하면행정복지센터 앞에는 “산불 피해 가구 상하수도 전액 감면” “산불 피해 긴급생활지원금 신청” “산불 피해 농업인 농기계 무상 임대” 등 안내 펼침막이 여러 개 붙어 있었다. 행정복지센터 앞 버스정류장과 농협은 시커멓게 타서 뼈대만 남아 있었다.
행정복지센터 건너편 신덕1리 마을에 들어서자 불에 타 부서진 집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산 아래쪽 집들은 형태를 짐작하기 어려울만큼 완전히 무너졌다. “집이고 뭐고 마구 다 태았어. 정부에서 빨리 복구를 해줘야 하는데, 아직 하나도 안 했잖아.” 밭일을 하던 김아무개(87)씨는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행정당국은 지난 15일까지 현장 피해 조사를 마쳤다. 하지만 본격적인 복구는 중앙재난대책본부 심의를 거쳐 최종 복구 계획과 예산 등이 확정되는 다음 달 초에나 시작할 수 있다고 한다. 김씨는 “워낙 피해가 심하니까 시간이 걸리겠지”라며 답답함을 삼켰다.
집이 타 지인의 빈집에서 지낸다는 주민 이아무개(62)씨는 "대피하던 날 입은 옷 달랑 한 벌 밖에 남지 않았다. 지인의 집이라 대피소보다는 편하지만, 내 집이 아니다 보니 먹고 자고 하는게 불편할 수밖에 없다. 이 생활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겨우 집을 살려낸 주민도 막막하긴 마찬가지다. 불이 넘어오던 지난달 26일 새벽 3시까지 직접 불을 껐다는 이용칠(84)씨는 "농협에 하나로마트도 다 타는 바람에 장보기도 힘들다. 농사짓는 사람은 비료를 사려고 읍내나 옆 마을까지 차를 타고 나가야 한다. 이 마을에서는 아무것도 못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은 "우리 동네가 많이 탔다고 기자들이고 유튜버고 전국에서 구경와서 카메라를 들이댄다. 정말 짜증난다"고 화를 내기도 했다.
지난 19일 경북도가 낸 자료를 보면, 이날 현재 이재민은 3494명(안동 1132명, 의성 507명, 청송 867명, 영양 141명, 영덕 847명)으로 경로당과 마을회관에 741명, 호텔과 모텔에 619명, 연수원과 교육원에 174명, 친척 집에 403명, 체육관과 학교 49명, 기타 시설에 128명, 임시주택에 5명이 생활하고 있다. 주택은 3819채(안동 1379채, 의성 351채, 청송 787채, 영양 124채, 영덕 1178채)가 탔다.
경남 산청·하동 산불은 지난달 21일부터 30일까지 열흘 동안 이어져 주택 29채 등 건물 84곳이 불탔다. 이 때문에 주민 1309가구 2158명이 긴급 대피했는데, 20일 현재까지도 15가구 25명은 한국선비문화연구원에 머물고 있다.
지난 14일 오전 경북 안동시 임하면 새까맣게 타버린 산 인근에서 한 주민이 밭일을 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email protected]
무너진 집 뒤로 불에 탄 나무들과 시커멓게 그을린 흙더미가 나뒹굴었다. 임하면 오대리 약산홍은사 뒤 등산로는 쓰러진 나무들이 뒤엉켜 길이 사라졌다. 겨우 서 있는 활엽수도 뿌리까지 새까맣게 탔다. 흙은 바싹 메말라 발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바스러져 내렸다. 이번 산불피해 현장조사에 나선 양대성 한국치산기술협회 산사태연구실장은 “활엽수들은 당장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토양에 미생물이 다 죽었기 때문에 2∼3년 뒤에는 고사한다. 우선 죽은 소나무들부터 빼내어 정리해야 한다. 흙이 메말라 있고 나무뿌리가 흙을 잡고 있는 힘이 없는 상황이라 많은 비가 오면 흙이 쓸려 내려오기 쉽다”고 말했다.
국립산림과학원이 펴낸 ‘2025년 산불 제대로 알기’를 보면, 2000년 동해안 산불 피해 지역의 토사량을 2년 뒤 측정한 결과 일반 산림부터 3∼4배 높게 나타났다. 산불로 토양의 물리적 성질이 약해져 빗물이 흙 속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산불로 나무뿌리가 상하면서 토양을 붙잡고 있는 힘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장마철이나 집중호우가 쏟아지면 토양이 쉽게 무너질 수 있어 대형 산불 지역일수록 산사태에 취약하다.
지난 14일 오전 경북 안동시 임하면 약산홍은사 인근 산림 지대 지반이 산불 피해로 약해져 나무들이 쓰러져있다. 김혜윤 기자 [email protected]
당장 올 여름 폭우에 대비해 당국은 주민 생활권과 가까운 위험 지역과 일반 지역으로 나누어 피해 복구 계획을 세우고 있다. 산림청과 지자체 등으로 구성된 피해조사반이 합동으로 산불 피해 지역을 조사한 결과, 응급 복구가 필요한 곳은 경북 의성·안동·청송·영양·영덕 등 5개 시·군에 69곳으로 잠정 집계됐다. 이들 지역은 긴급 벌채를 하고, 산사태 등 2차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마대 쌓기, 옹벽 쌓기, 수로 내기 등 사방사업을 할 예정이다.
양 실장은 “생활권과 가까운 위험 지역은 오는 6월 장마철이 오기 전에 응급복구를 할 예정이다. 다행히 사방댐이 있는 곳은 토사가 쓸려 내려오는 것을 일차적으로 막아주는 효과가 있다. 응급복구 대상지를 먼저 선별하고, 사방댐 설치나 조림 등 시간이 걸리는 복구가 필요한 지역은 차년도에 복구하기 위해 두 가지로 나누어 현장을 조사한다”고 말했다.
산림청이 2022년 산불진화와 산림경영관리 목적으로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뒷산 중턱에 설치한 임도. 임도 설치 이후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서 산사태가 잇달아 일어나고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산사태로 인한 2차 피해 우려가 높은 가운데 산불 진화에 필요하다며 ‘임도’를 개설하는 것도 논란을 빚고 있다.
임도는 산림 경영·관리를 위해 산에 설치하는 도로이다. 하지만 산림청은 산불 진화용 임도 개설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지난달 21~30일 경남 산청산불 당시에도 산불현장통합지휘본부에서 국립산림과학원 전문가 브리핑까지 여는 등 산불 진화인력의 신속한 접근을 위한 임도 개설·확대가 시급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최근 환경운동가들과 상당수 산림전문가들은 “임도는 산불이 발생했을 때 불길에 산소를 공급하는 바람길 구실을 해서 산불을 확산시키는 부작용을 낳는 것은 물론 평소 산사태의 주원인이 된다”라며 임도 추가 개설에 강하게 반대한다.
대표적 사례가 지리산국립공원에 인접한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뒷산 중턱에 설치한 임도이다. 산림청은 지난 2022년 산불진화와 산림경영관리 목적으로 이곳에 길이 1.68㎞의 임도를 개설했다. 임도 개설 전까지는 워낙 가팔라서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소방차가 통과할 수 있도록 3m가량 폭으로 개설된 임도는 사람 접근을 용이하게 했고, 결과적으로 산불 발생 위험을 높였다. 또 계속해서 산사태가 발생하고 있다.
지난 14일 임도 현장에 갔더니, 임도 시작지점에는 “임도시설 이용시 발생하는 안전사고에 대하여는 전적으로 본인에게 책임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라고 적힌 함양국유림관리소장 명의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가파른 언덕을 깎아서 임도를 개설하는 바람에 임도 위쪽으로는 5~10m 높이의 절벽이 형성돼 있었다. 최근 큰비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위에서 쏟아져 내린 큰 돌들이 임도 곳곳에 나뒹굴었다. 중장비를 동원해서 치우지 않으면, 소방차 진입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임도 아래쪽으로는 산사태로 무너진 돌덩이가 물길을 따라 수십m씩 쌓여 있었다.
14일 오전 경남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에는 지난달 20일 산불로 집들과 나무들이 산불로 타버린 채 부서져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정정환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 지리산 사람들’ 운영위원은 “다양한 식생으로 안정된 숲이고 사람 접근도 불가능한 지역이라서, 산불 발생 위험이 거의 없고 발생하더라도 큰 피해를 걱정할 필요 없는 곳이었다”라며 임도를 개설한 산림청을 비판했다. 정정환 운영위원은 또 “과학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큰 산불은 사람이 끄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의해 꺼지는 것이다. 따라서 큰 산불이 났을 때 소방당국은 불을 끄러 산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인명과 재산 피해가 나지 않도록 주력하면 된다”라며 “산불이 꺼진 뒤 그대로 두면, 산은 산불에 강한 식생으로 자연복원된다. 단지 사람들이 복원되기까지 기간을 견디지 못해서 급한 마음에 인공조림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병성 기후재난연구소 상임대표도 “최근 산청산불과 의성산불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큰 산불이 났을 때 산불진화대가 임도에 접근해서 진화한 곳은 없다. 오히려 산불은 임도를 따라 번졌다. 그래서 ‘임도는 불길’이라고 한다”라고 말했다. 최병성 상임대표는 또 “산림청은 ‘임도는 주불 진화보다 잔불 정리에 꼭 필요하다”라고 하는데, 정말 그렇다면 임도를 모든 산에 거미줄처럼 설치해야 한다.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라며 “임도는 더 이상 만들지 않아야 하고, 산림 경영·관리에 필요한 최소한의 임도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복원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한편, 지난달 21일부터 30일까지 열흘간 이어진 대형산불로 인한 영남지역 전체 피해면적은 10만4천㏊로 잠정 집계됐다. 지역별로 경북 9만9289㏊(의성 2만8853㏊, 안동 2만6709㏊, 청송 2만655㏊, 영양 6864㏊, 영덕 1만6208㏊), 경남 3397㏊(산청 2403㏊, 하동 994㏊), 울산 1190㏊다. 지자체가 1차로 조사한 뒤 중앙재난피해합동조사단이 2차 조사한 것으로, 최종 피해 면적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서 확정된다. 경북 산불은 국내 단일 산불로는 가장 큰 피해 규모를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