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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돌봄, MZ가 MZ에게

타인 기준 맞춘 성취는 내 것 아냐
내 욕구 존중해주는 타인은 ‘산소’
자신의 인정욕구에 관대해질 필요
스스로 이뤄낸 성취가 나와 동떨어진 것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이 진짜로 자기 자신을 채워주는 경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저는 올해 의대에 입학한 학생입니다. 사람들과 노는 것을 즐기지 않고 공부를 통해 얻는 성취감이 커 공부가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두 가지 고민이 있습니다. 하나는 제가 선택한 분야가 하고 싶은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 다른 하나는 시험이라는 뚜렷한 목표가 없을 때 무기력증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저는 인문학을 좋아합니다. 지난해부터 소설과 철학, 사회 관련 책을 읽는 것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해 제 생각을 블로그에 정리하고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만든 콘텐츠를 자주 접했습니다. 그러면서 콘텐츠를 제작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다는 꿈이 생겼습니다. 아이디어가 샘솟아 한동안은 버스로 이동할 때도, 잠깐 쉴 때도, 산책할 때도 온통 그 생각만 했습니다.

그러다 갑작스러운 무기력이 찾아왔습니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본 뒤부터입니다(생각보다 잘 봐서 100점이 나왔는데 이것도 무기력함에 한몫했습니다). 시험만 끝나면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부담으로 느껴지고 ‘내 콘텐츠는 각광받을 수 없어’, ‘어차피 예과 생활을 하는 2년 동안만 즐길 수 있고 그다음부터는 포기해야 할 거야’ 하는 부정적인 생각만 듭니다. 동시에 토익 같은 또 다른 시험을 보면서 불태워보자는 의지도 생깁니다.

시험처럼 단기적인 목표가 없으면 사람은 원래 무기력해질까요? 저는 ‘어떤 의사가 되겠다’와 같은 추상적인 목표로는 동기부여가 되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남에게 보이는 것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시험을 치르고 점수를 자랑하는 것을 좋아하며 남이 알아줬을 때 성취감을 느낍니다. 남에게 좋은 말을 기대하는 사람이 아니라 제가 저에게 좋은 말을 해주고 그것만으로 만족감을 느끼고 싶은데 여전히 타인에게 묶여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안주영(가명·22)
시인 김사인의 ‘이게 뭐야?’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시에서 화자는 보는 것마다 이게 뭐냐고 묻는 순진무구한 아이의 질문 세례에 울음이 터지려 합니다. 자신 역시 모르는 것투성이인 아이와 다르지 않다는 고백을 피할 수 없는 순간에 놓였기 때문입니다. 여기가 어딘지, 어디로 가는지, 내가 누군지 모른다는 것조차 잊고 살아오다 자신이 완전히 무지하다는 사실, 그 막막함과 아득함으로부터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합니다. 마치 중독된 것처럼 시험 보길 거듭하다 시험이 끝나는 순간 무기력에 빠지는 주영님도 결국 이런 정체성과 관련한 질문을 마주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시험이 끝난 뒤 바람 빠진 풍선처럼 늘어져 있다 보면 ‘이제 뭐 하지?’ 하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이 질문은 남아도는 시간을 뭘 하며 때우냐는 문제를 넘어 삶의 방향성과 정체성을 묻고 있습니다. 어딜 향해서 가야 하는지, 뭘 할 때 삶이 충만해지는지, 내가 언제 살아나고 언제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가 되는지 하는 질문은 답하기 쉽지 않습니다. 시험이라는 마개가 풀리면 답을 미뤄뒀던 이러한 질문들이 물밀듯이 새어 나오고, 막막함을 견딜 수 없는 우리는 다시 시험이나 손에 잡히는 목표에 열중하며 마개를 닫아 질문을 틀어막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니 시험 후에 찾아오는 무기력감은 마개가 마개의 기능을 다했음을 알려주는 신호이자, 전력 질주하고 있지만 이 방향이 맞는지 모르겠다는 진솔한 몸의 언어일지 모르겠습니다.

높은 점수를 자랑하고 인정받을 때 성취감을 느낀다고 말씀하시지만 저는 괄호 안에 담긴 문장에 더 눈길이 갑니다. 만점을 받고 기쁨과 자부심을 느낄 새도 없이 무기력에 빠졌다는 내용이요. 스스로 이뤄낸 성취가 ‘내 것’으로 경험되지 않고 나와 동떨어진 것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이 주영님을 진짜로 채워주는 경험이 아니기 때문일 겁니다. 정신분석가 도널드 위니컷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의 욕구와 감정을 바탕으로 한 ‘참자기’(true self)가 아닌 타인의 기준에 맞춰 만들어진 ‘거짓 자기’(false self)의 목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짓 자기로 사는 삶이 비대해지면 나를 잃어버렸다는 상실감과 공허함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참자기는 타인의 반응에 대한 기대를 접는 방식으로는 회복되지 않습니다. 역설적이게도 타인이 꼭 필요합니다. 이때 타인은 아무나가 아니라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인정해주고, 존중해주고, 적절히 반응해주는, 공감하는 타인입니다. 정신분석가 하인즈 코헛은 이를 ‘자기대상’이라고 칭하며 산소에 비유했습니다. 자기애적 욕구를 기쁨 어린 반응으로 채워주고, 그 욕구가 좌절될 때 진정시켜주는 타인이 심리적 생존에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대상을 통해 공감받고 안정되는 경험이 충분히 쌓여야 스스로 그 기능을 할 수 있고, 스스로 그 기능을 담당할 수 있어야 타인의 반응이 없을 때도 어느 정도 자기 가치감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비로소 독립적일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흔히들 칭찬과 인정을 갈망하는 모습을 미성숙하게 여기며 그 욕구를 단념하게 합니다. “남들 시선 신경 쓰지 말고 너의 삶을 살라”고 하거나 “관종이냐?”며 경멸하는 식으로요. 이 때문에 자기애적 욕구는 수치스럽게 느껴져 깊숙이 억압합니다. 코헛의 ‘산소’라는 비유를 계속 활용해보자면, 이런 억압은 숨을 참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심리적 질식 상태에서는 누구라도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어렵게 느껴질 거예요. 그러니 주영님의 인정 욕구에 좀 더 관대해져 보세요. 자신은 타인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자신을 깊은 곳에서부터 채워줄 타인을 만날 기회도, 그 만남을 통해 인정에 목말라 있는 내면 아이가 숨 쉬며 성장할 기회도 생길 테니까요.


박아름 심리상담공간 숨비 대표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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