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혜영의 읽고사니즘
또 다른 민주주의 투쟁 현장 동덕여대
족벌세습 사학비리 본질·맥락 지워져
테러만 강조됐던 과거 여성 투쟁 떠올라
또 다른 민주주의 투쟁 현장 동덕여대
족벌세습 사학비리 본질·맥락 지워져
테러만 강조됐던 과거 여성 투쟁 떠올라
2월9일 오후 ‘민주 동덕에 봄은 오는가’ 집회가 서울 종로구 안국역 일대에서 열려 동덕여대 학생 등 집회 참석자들이 조원영 동덕학원 이사장 사퇴 및 총장 직선제를 요구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김영원 기자 [email protected]
먹고사는 일만큼 읽고 사는 일이 중요하다.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종이나 화면에 적힌 글자의 의미를 파악하는 행위만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책도 읽지만 무엇보다 세상을 읽는다. 사람들에게는 세상과 인생에 대한 나름의 독법이 있다. 누군가는 책을 많이 읽지 않아도 몸으로 터득한 삶의 이치에 비추어 눈앞의 세상을 날카롭게 통찰한다. 다른 누군가는 수백권의 책을 읽고도 눈앞에 뻔히 보이는 진실을 이해득실의 저울 위에 올려 그 눈금을 읽기 바쁘다. 이런 인생의 독법은 곧 인생의 화법이 된다. 자기 이익에 따라 곧은 것을 굽었다고, 굽은 것을 곧다고 말하는 이가 주변에 있으면 피곤하다. 하물며 그런 이가 우두머리인 세상은 말해 무엇 할까. 윤리와 가치의 보편적 기준이 사라지고 오로지 살려면 강자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하는 세상이 싫어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한다.
12·3 내란이 일어난 지도 두달이 훌쩍 넘었다. 우리 사회 곳곳에는 민주주의를 되찾고 지키기 위한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그중 한곳이 바로 동덕여대다. 그런데 당신은 ‘동덕여대 투쟁’을 어떻게 읽었는가? 투쟁하는 동덕여대 학생들은 이 싸움을 사학비리와 반민주적 학교 운영에 맞선 ‘학내 민주화 투쟁’이라고 정의한다. 학교 당국은 이 투쟁을 ‘젠더갈등’ ‘폭력사태’라고 규정한다. 개혁신당 이준석 의원은 학생들의 투쟁이 윤석열 대통령 지지자들이 일으킨 서울서부지방법원 폭동과 유사한 “야만적 폭력”이라고 맹비난한다. 이 상반된 말들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동덕여대 투쟁이 지금처럼 미디어에 보도되며 격화된 시점은 지난해 11월, 학교 쪽이 경영상의 이유로 남녀공학 전환을 검토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다. 동덕여대 학생들은 이른바 ‘과잠 시위’와 트럭 시위, 근조 화환 배송, 래커 칠과 설립자 동상 훼손, 취업박람회장과 학교 본관 점거 등으로 반대와 분노를 표현했다. 미디어는 이런 행위를 집중적으로 보도하며 ‘난장판’ ‘전쟁터’ ‘다 때려 부쉈다’ ‘젠더갈등’ 등의 수식어를 기사 제목으로 뽑았다. 이준석 의원이 소셜미디어에 동덕여대 시위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출근길 지하철 시위에 비유하며 조소한 글도 아무런 비판적 검토 없이 인용되어 기사로 재생산되었다. 동덕여대 학생들이 왜 이렇게 싸우는지 그 배경과 맥락을 조명한 기사는 거의 볼 수 없었다. 마치 긴 영화에서 이야기와 상관없이 폭력이 벌어지는 한 장면을 갈무리해 그 폭력이 얼마나 심각한지 끝없이 얘기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동덕여대의 학내 민주화 투쟁은 2024년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이 투쟁은 20년이 족히 넘는 긴 투쟁이다. 2003년, 당시 동덕여대 총장이자 현 이사장 조원영은 교육부 감사에서 교비 78억원을 횡령한 등의 비리가 드러나 형사고발을 당한 뒤 불명예스럽게 사퇴한다. 당시 동덕여대 학생들은 집단 유급을 각오한 집단 수업거부를 단행하며 치열하게 싸웠다. 그러나 2015년 박근혜 정부의 교육부는 사학비리로 학교를 얼룩지게 한 3대 세습 족벌경영의 주인공을 화려하게 학교 이사로 복귀시킨다. 이듬해 동덕여대의 이사장에 취임한 그는 곧바로 부친에게 상속받았지만 개인 채무로 법원 경매에 넘겨진 18억원짜리 평창동 고급 주택을 다시 교비로 사들인다. 이런 비정상적 족벌경영 아래 학교 운영이 제대로 될 리 없다. 그러나 학교 당국은 사학비리라는 방 안의 코끼리를 외면한 채 난데없는 남녀공학 전환 카드를 수습책이라며 만지작거렸다. 이를 안 학생들의 분노가 폭발하자 학교는 학생들을 폭도로 규정하고 공격했다. 시위에 참여한 수십명의 학생을 업무방해와 건조물침입으로 형사고소하고 학내에서의 구호, 노래 제창, 펼침막 게시, 사진 부착 등을 금지시켜달라는 가처분을 법원에 신청했다. 다행히도 법원은 집회·시위 및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며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지만 학교는 법원 결정과 상관없이 학내 대자보 규제와 학생 형사고소를 계속하겠다는 입장이다.
2월9일 오후 ‘민주 동덕에 봄은 오는가’ 집회가 서울 종로구 안국역 일대에서 열려 동덕여대 학생 등 집회 참석자들이 교화인 목화꽃이 인쇄된 손팻말을 들고 있다. 김영원 기자 [email protected]
동덕여대 투쟁을 ‘야만적 폭력’ ‘젠더갈등’으로 읽어내고 규탄하는 이들은 보수 정치권의 입김이 강하게 개입된 끈질긴 족벌세습 사학비리와 비민주적 학교 운영에 침묵한다. 이 강약약강의 독법으로 동덕여대 학생들의 투쟁을 학내 민주화 투쟁이 아니라 학생들의 과도한 폭력이나 젠더갈등으로 읽어낼수록 사학비리는 숨겨지고 반여성정치는 득세한다. 묻고 싶다. 3대 세습 사학비리는 야만이 아닌가? 반여성정치의 결과로 여성들이 겪어야 하는 폭력은 폭력이 아닌가?
여성들의 저항을 야만적 폭력으로 몰아가며 정작 그들이 무엇에 저항했는지 감추고 기득권을 유지하는 이런 식의 독법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참으로 유구하다. 약 100년 전, 영국과 아일랜드와 일본에서 각각 여성의 참정권과 독립, 사상을 위해 싸웠던 에밀리 와일딩 데이비슨, 마거릿 스키니더, 가네코 후미코의 투쟁을 다룬 브래디 미카코의 ‘여자들의 테러’가 바로 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상은 이들이 저지른 ‘테러’에 집중하지만 브래디 미카코는 이들이 각각 삶에서 겪어온 폭력과 이에 맞선 이들의 저항을 읽어낸다. 삶의 생생한 맥락 속에 행위가 놓이니 의미는 분명해지고 마음 아프도록 그 의미가 어떻게 퇴색되는지 드러난다.
“지금이야 에밀리의 죽음이 여성 참정권 운동 투사의 비극적인 최후로 여겨지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자폭 테러를 기도했다가 실패해 죽음에 이른 광신도라는 인상 정도밖에 없었던 것이다. 에밀리가 입원한 엡섬 코티지 병원에는 화난 시민들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 경찰이 파견되었다.”
동덕여대에 봄은 오는가. 분명한 사실은 대학이 바로 서지 않고 교육이 바로 설 수 없으며, 교육이 바로 서지 않고 나라가 바로 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민주 동덕의 학생들이 열어젖힌 광장에 나가 이야기를 듣는다. 무한 반복되는 한장의 갈무리 화면을 넘어 오랫동안 이어져온 이야기를 만나기 위해. 아무리 왜곡되고 공격당하더라도 기어코 무엇이 굽은 것이고, 무엇이 곧은 것인지 알리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사람들과 연대하기 위해.
장혜영 전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