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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진 룸의 문을 열자 무거운 공기가 몸을 덮쳤다. 양주와 몇 가지 마른안주가 놓인 테이블, 그 주위로 검은 양복의 조폭 10명이 둘러앉았다. 광주 충장OB파 조직원이던 이현수(53·이하 존칭 생략)씨의 1년 위 ‘형들’이었다.

“우리 현수 기다리다 눈알이 빠져불 것다. 형님들보다 늦게 다녀도 되버리냐.”

이현수가 서울 역삼동 르네상스호텔 지하 나이트클럽으로 불려간 건 2010년 봄. 마흔이 됐을 때다. 평소와 다르게 비아냥거리는 투의 인사말을 들을 때부터 뭔가 좋지 않은 조짐을 느꼈다.

“현수야. 이제 너는 조직에서 손을 떼라. 우리도 형 노릇 해야 하지 않겄냐. 너 없이도 우리가 알아서 잘 할테니께.”

퇴출 통보였다. 웃는 낯으로 던진 얘기지만, 눈가 주름은 힘을 주는 듯 떨렸다. 10명이 모인 자리이니 거부할 수 없는 협박이었다. 대들기에는 형들의 세력이 예전보다 너무 컸다. 억울했지만 도리가 없었다.

이현수는 14세부터 조직에 몸을 담았다. 몸집도 크고, 배짱과 ‘깡’도 있어서 ‘에이스’로 꼽혔다. 보스들은 다른 조직원보다 나이가 어린 이현수를 먼저 찾아 일을 시켰다.

‘사업 수완’이 좋아 돈도 곧잘 끌어모았다. 불법 오락실·카지노바가 서울 강남 일대를 휩쓸던 2000년대 초반, 이현수는 전라도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와 불법 카지노바를 차렸다. 들쭉날쭉했지만, 매달 20억원대의 거액을 만졌다고 한다. 하루 수천만원을 술값으로 탕진하며 사치를 누렸다. 돈을 잘 벌고, 잘 쓰니 ‘힘’도 세졌다.

“무서울 게 없었습니다. 형들을 좀 무시했어요. 형들이랑 회식을 하면 선심 쓰듯 돈을 내고 일찍 자리를 떴습니다. 고까웠겠죠.”

광주 충장OB파에 몸담았던 전직 조폭 이현수(53)씨가 8월 5일 광주 한 거리에서 기자와 만났다. 양수민 기자
몇 년 후, 고향 형들도 서울로 올라와 비슷한 사업에 뛰어들어 큰 돈을 주물렀다. 더는 이현수에게 술값을 구걸하지 않고 대등한 반열로 올라섰다. “너 때문에 무시당했던 지난 세월을 생각하니 울컥한다”며 눈치와 핀잔을 줬다. 서서히 형들의 눈 밖에 났다.

이현수는 그렇게 조직에서 밀려났다. 30여 년간 조폭으로만 살았던 그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무작정 속초로 갔다. 통장 잔고는 0원. 가지고 있던 돈은 후환이 두려워 선후배에 빼앗기다시피 고스란히 물려줬다. “강남에서 카지노바 할 때, 동생들이 지저분한 사건 처리를 도맡았습니다. 동생들에게 집이랑 차랑 다 주고 나왔습니다. 안 그러면 신체적으로 험한 꼴 당합니다.”

몸 누일 곳도 없었다. 허름한 여관방을 월세 25만원에 빌렸다. 생계를 위해 하루 6만5000원을 받고 속초 중앙시장에서 막일을 했다.

“코를 찌르는 비린내를 참고 건어물을 날랐죠. 어쩔 수가 있습니까? 그때는 앞이 캄캄했습니다.”



행동대장→간부, 3040이 조폭 은퇴 기로
전남 영광군 염산면 배상윤 KH그룹 회장의 선산에 서 있는 배씨에 대한 공덕비(功德碑). 공덕비에는 KH그룹의 계열사들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석경민 기자
하얏트호텔·알펜시아 리조트 인수로 유명해진 배상윤(56) KH그룹 회장과 같은 ‘로열 조폭’은 극소수다. 배상윤은 4000억원대 배임과 650억원대 횡령 혐의로 해외 도피 중인데 몰락의 길로 빠져들고 있다. 조폭에서 기업인으로의 변신에 한때 성공했던 ‘배상윤 모델’은 조폭들의 이뤄질 수 없는 신화에 불과하다.

대다수 조폭은 어떤 삶을 살까. 취재 중 접촉한 전‧현직 조폭들의 고백은 공통됐다. 20대에는 형님을 도와 일을 배우고, 30대에는 불법 도박이나 사채업·룸살롱 운영으로 뭉칫돈을 만진다. 40대에는 벌어둔 종잣돈으로 번듯한 사업체를 만들어 운영해야 한다. 돈이 있어야 동생들을 부리고, 세력을 키워 두목급으로 올라갈 수 있다. 이때 조직에서 자리를 못 잡으면 강제로 떠밀려난다.

이 나이대에 권력 투쟁에서 쫓겨난 뒤 재기하지 못한 이들은 ‘늘어진 조폭’으로 불린다. 돈이 없어 동생들에게 형 대접을 못 받아 축출되듯 조직을 떠난 뒤 그런 취급을 받는다.

인천에서 활동했던 A(37)가 조직과 연을 끊은 이유도 마흔을 앞두고 미래가 불투명해 보여서다. A는 수차례 감옥을 들락거리는 바람에 모아둔 돈도, 변변한 사업체도 챙기지 못했다. 동생들을 거느리며 목숨과 같은 ‘가오’를 부릴 뒷돈이 없었다. A의 실토다.

" 심정이 어떤지 아십니까? 자존심이 바닥을 찍습니다. 조직 생활 때문에 감방에 다녀왔는데 밑에 애들은 치고 올라오죠, 내 자리는 없죠. 돈 없는 형을 대접해 주는 동생은 한 명도 없고, 형들도 저를 투명인간 취급합디다. 조폭의 의리? 그것도 다 돈과 힘이 있어야 나옵니다. "
경찰로 일하며 30년 넘게 조폭 수사를 했던 안흥진 국제범죄연구소장은 조직 내 권력 다툼은 필연적이라고 말한다. 폭력조직은 위에서부터 ▶두목 ▶부두목 및 간부 ▶행동대장 ▶행동대원으로 이뤄진다. 말단 행동대원-행동대장-간부로 올라가는 계급사회로서의 조폭에서 탈락자가 생기는 건 당연하다. 돈벌이에 후배에게 밀리는 조폭은 퇴출된다. 조폭 세계에 벌어지는 ‘토사구팽(兔死狗烹)’의 법칙이다.
2007년 영화 '친구'의 주인공이었던 조직폭력배 준석(유오성 분)의 모델로 알려진 폭력 조직 칠성파의 전 행동대장의 결혼식이 열린 부산의 한 호텔 정문 모습. 중앙일보

영화·드라마에선 조직을 떠나는 사람을 배신자로 지목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영남권의 한 전직 조폭은 “떠나려는 조직원에게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장면은 영화 이야기일 뿐이다. 형들 돈을 떼먹거나 사고 치고 도망갈 때나 몸담던 조직에서 보복을 가한다. 철저히 돈의 논리로 조직이 운영된다”고 말했다.

이에 눈치 빠른 조폭은 20~30대에 손을 떼기도 한다. 할 일이 많은 나이대지만 조폭 바닥에선 ‘가정을 꾸리는 문제’에 대해서는 관대하기 때문에 결혼·출산을 계기로 조직 생활을 접는 일이 많다. 부산에서 활동했던 전직 조폭 B(41)는 “모아놓은 돈이 하나도 없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결혼을 앞두고 조폭 일에서 손을 뗐다”고 말했다. ‘건달은 돈 벌지 않느냐’는 질문에 “500만원을 벌어도 1000만원을 쓰는 게 건달이다. 남들 일할 때 룸살롱 가서 술 마시는데 남는 게 있겠느냐”며 답했다.



조직서 밀려나도 범죄 굴레
지난 6월 25일 오후 부산 중구 한 호텔에서 열린 신20세기파 두목 A씨의 결혼식장 주변 도로에서 건장한 남성들이 서 있다. 연합뉴스

‘늘어진 조폭’의 삶은 처량하다. 편의점 알바, 건설현장 일꾼, 환경미화원, 유튜버…. 자본금이 들지 않는 모든 직업이 전직 조폭의 일자리로 몰리는 이유다.

인천간석식구파에서 활동했던 전직 조폭 C(37)는 온라인 구직 사이트를 전전하다 세후 290만원을 주는 환경미화원 모집에 지원했다. 기자에게 C는 이렇게 답했다.


" 가오 때문에 이런 일을 못 한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생존은 현실이에요. 폭행 전과 때문에 취업이 안 될까 봐 덜덜 떨었는데 일 시켜주니 오히려 다행이죠. "
(계속)
끝내 가오를 버리지 못한 조폭들은 어떻게 될까요.
폼 잡던 조폭들의 말로,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87911


〈조폭의 세계〉 더 많은 기사를 보시려면?

“눈데 와가 사진 찍습니꺼!” 살 떨린 ‘두목 결혼식’ 잠입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76171

“상계파 힘 쓰는 형이 상주” 빈소서 목격한 조폭 인증법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77902

“이제 건달 아녀, 기업인이여” 하얏트 거머쥔 배상윤의 몰락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86207

“형님은 손 뗐다” 감싸줬더니…“저놈이 부두목” 배신당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7963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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