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물산·제일모직 부당 합병 혐의에 대한 항소심 선고가 열린 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법으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출석하고 있다. 김영원 기자 [email protected]
삼성물산-제일모직 불공정 합병을 통한 승계 의혹으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2심에서는 지난해 서울행정법원이 내린 ‘삼성바이오로직스(삼성바이오)의 회계부정을 인정’하는 판결을 받아들일지 여부가 쟁점이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항소심 재판부가 한국채택국제회계기준(K-IFRS)을 적용해 해석하면서 이 회장의 무죄 판단은 달라지지 않았다.
서울고법 형사합의13부(재판장 백강진)가 지난 3일 선고한 부정거래행위 및 시세조종(자본시장법 위반)과 업무상 배임, 외부감사법 위반 등 19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850여 쪽에 달하는 이 회장의 판결문에서도 재판부는 부정회계 쟁점을 240여쪽을 할애해 설명했다.
2심에서 판단의 핵심 근거가 된 기준은 ‘원칙 중심 회계’다. 2011년부터 도입된 한국채택국제회계기준(K-IFRS)은 “회계처리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을 두기보다 원칙을 제시하고, 실제 회계처리에 있어서 담당자와 감사인의 전문적인 판단을 존중하도록 하는 기준”이다. 합리적 이유와 근거만 있다면, 결론에 이르는 과정에서 규정에 얽매이지 않는 방식도 존중하는 등 여러 주관적 판단이 개입될 여지를 인정한다는 취지다.
이로 인해 서울행정법원과 형사 사건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이 갈렸다. 앞서 서울행정법원은 삼성바이오가 금융위원회 산하 증권선물위원회의 처분을 취소해달라고 제기한 소송에서 삼성바이오의 손을 들어주면서도 “2015년 삼성바이오의 에피스 회계 처리 기준 변경은 삼성바이오의 ‘자본잠식’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판단한 바 있다. 그러면서 “특정한 결론을 정해 놓고 사후에 합리화하기 위하여 회계처리를 하는 것은 재량권을 남용한 것”이라고 판시했다.
하지만 ‘원칙 중심 회계’에 따른 2심의 판단은 달랐다. 2심은 원칙 중심 회계를 해석하면서 ‘합리적 이유와 근거’는 객관적으로 최선의 대안을 선택해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면 충분하고,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그것이 ‘주관적 선의’에 기초한 것인지까지 심사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봤다. 회계처리 결과가 최종적인 사실과 상황(경제적 실질)에 맞는다면 주관적 의도에 집중하는 판단을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다만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삼성 쪽이 부당한 여론 조성을 하고, 일부 공시가 미흡했다는 잘못을 일부 인정하기는 했다. 검사는 공소사실에서 삼성의 ‘일일 동향 보고’ 문건을 제출하며 당시 합병을 반대한 헤지펀드 ‘엘리엇’과 관련해 삼성 쪽의 부당한 영향력 아래에서 보도된 기사들을 스크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2심 법원은 최종적으로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다고 판단했지만, 삼성 쪽이 합병 성사에 긍정적인 언론보도가 이루어지도록 언론사들을 설득했다 해도 “삼성 쪽에서 해당 기사들의 주제목이 아닌 문단별 소제목까지 스크랩해둔 것이 다소 의문스럽고, 삼성 쪽이 주요 설득 취지 또는 논거별로 언론사에 구체적인 기사 제목이나 표현 등을 사전에 지정해 제시했고 그것이 그대로 보도된 사실을 강조해 정리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또 “콜옵션이 행사되면 삼성바이오가 지배력을 잃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위험이기에 이 당시에 공시를 했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공시가 미흡했음을 지적했다. 하지만 “금융감독원의 지도 차원에서는 행정 처분을 할 여지가 있지만, 형사 처벌을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중과실일지라도 증거가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입증되지 않았다면 형사책임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봤다.
삼성바이오 회계부정 논란은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과정에서 삼성바이오가 2011년 미국의 제약기업 바이오젠과 합작으로 설립한 삼성에피스(이하 에피스) 회계 조작을 했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당시 제일모직의 자회사였던 삼성바이오는 기업 가치가 크게 평가돼야 할 필요가 있었다. 에피스는 2011년 설립 이후 줄곧 적자 기업이었는데, 삼성바이오는 2015년 바이오젠이 콜옵션(매수 선택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커졌다며 에피스를 관계회사(공동지배기업)로 변경했다. 이를 통해 삼성바이오는 4조5000억원의 평가이익을 재무제표에 반영했다. 검찰은 이 회장의 경영권 승계 수단이었던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이 이 회장에게 유리하게 진행되도록 이러한 내용의 회계부정이 이뤄졌다고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