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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관의 고금유사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의 한 장면. 쇼박스 제공

1780년(정조 4년) 5월11일 사간원 정언 정익조(鄭益祚)는 정조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대저 밭에서 흘린 땀으로 거둔 곡식과 베틀에서 손가락이 찢어지도록 짜낸 옷감은 허망하게도 부호들이 독차지하는 물자가 될 뿐입니다. 이 때문에 한번 번곤(藩閫)을 거치면 곧 거창한 집을 짓고, 기름진 고을 수령을 하고 나면 농토를 광점(廣占)합니다. 지금 근기(近畿)에서부터 호남과 해서(海西)에 이르기까지 물길이 편리한 곳은 깡그리 경화거실(京華巨室)의 소유물이 되었고, 그 땅에 사는 백성은 밭을 갈고 그 반을 얻어먹는 데 불과합니다. 이것이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지는 까닭입니다.”

번곤은 관찰사와 병사·수사, 곧 지방 행정의 최고위직인 관찰사와 지역 병권(兵權)의 총책임자인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다. 관찰사와 병사·수사 아래에는 주(州), 부(府), 군(郡), 현(縣)을 다스리는 수백개 수령직이 있었다. 정익조의 말인즉 관찰사와 절도사, 수령을 거치면, 거창한 집을 짓고, 농토를 광점한다는 말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던가? 이들이 민(民)의 생산물과 노동력을 수탈하는 방법은 실로 다양하였다. 그중 하나를 보자. 수령은 봄에 환곡을 높은 값으로 팔아 돈을 챙긴다. 그러고는 돈을 조금 남겨 가을에 곡식값이 쌀 때 채워 넣는다. 이것은 ‘입본’(立本)이란 방법이다. 입본은 하나의 예일 뿐이고, 환곡을 가지고 농민을 이중, 삼중으로 착취하는 방법은 허다하였다.

여러 곳의 수령을 지내고 관찰사와 절도사까지 역임하면 거창한 재산을 형성한다. 서울과 가까운 경기와, 수운(水運)이 편리한, 곧 곡식을 손쉽게 서울로 옮길 수 있는 호남과 황해도 바닷가 고을의 토지가 모두 ‘경화거실’의 소유인 것은 이런 방법을 통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관찰사와 병사, 수사 자리는 18세기 이래 예외 없이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의 거대한 사족가, 곧 ‘경화거실’의 독점물이었다. 이들은 흔히 벌열(閥閱)로 부르는데, 벌열은 과거 합격자를 집중적으로 배출하고, 중앙의 청요직(淸要職)을 독점하였다.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문음(門蔭)으로 지방 수령직을 차지했다.

이병정(李秉鼎)은 1766년 문과에 합격한 이래 설서(說書), 수찬, 응교, 부제학, 대사간, 대사성, 충청도 관찰사 등 청요직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1780년 7월3일 정언 홍주익(洪柱翼)은 이병정을 충청도 관찰사 재직 시의 부패 혐의로 탄핵했다. 조사에 의하면, 이병정은 소의 불법 도살에 대한 속전(贖錢, 벌금) 1876냥을 추징하여 사용했고, 고을과 역(驛)에 공문을 보내 자기 생일 잔치에 물품을 강제로 징수하였다. 찰방 홍창원(洪昌源)을 협박하여 자신의 전지(田地)를 이인(利仁) 역(驛)의 좋은 위전(位田)과 바꾸었고, 안면도의 금송(禁松) 16그루, 판재(板材) 70판을 베어낼 때 홍산(鴻山) 등의 백성 1600명을 품삯 없이 동원하였다. 또 부자 천광주(千光周) 등의 좋은 전지를 자신에게 강제로 팔게 하였다.

지방관들은 관찰사의 불법에 협조했다. 찰방 홍창원은 위협과 공갈에 겁을 먹고 땅을 바꾸어주었고, 수사 유진열(柳鎭說)은 안면도 금송의 벌채를 묵인했고, 남포 현감 이상현(李尙顯), 홍산 현감 서직수(徐直修), 비인 현감 이가환(李家煥), 청양 현감 이명우(李命瑀)는 이병정의 말을 듣고 백성을 돈 한푼 주지 않고 강제로 동원했던 것이다.

이병정을 단천부(端川府)에 정배하면서 정조는 탄식해 마지않았다.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는 가문’(世祿之家)이 예(禮)를 지키는 경우가 드물어, 조정에 서면 헌신하는 자세가 없고, 벼슬을 하면 제 잇속만 챙긴다는 비방이 있다. 불행하게도 2, 3년 이래 죄를 저질러 형벌을 받은 자는 탐오(貪汚)가 아니면 역적질을 저질렀다. 그 결과 조정이 텅 비어 일망타진된 것과 같고, 이와 같은 경우를 모면한 사람이 드물다. 아아,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어찌 세신(世臣)만의 불행이랴. 곧 국가의 불행인 것이다.”

세록지가, 즉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는 가문’이 곧 ‘세신’이고 벌열이다. 18세기 이래 조선의 모든 관직은 수십개 벌열 가문의 독점물이었다. 벌열의 관심사는 관직의 독점을 통해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데 있었다. 백성과 나라는 관심사가 아니었다. 권력과 치부(致富)를 위해 이들은 정조의 말처럼 역적질까지 서슴지 않았다.

무슨 대학의 무슨 학과를 나와서, 무슨 고시에, 무슨 시험에 합격하고, 검사, 판사, 장관, 차관과 국회의원과 시장과 지사를 지냈거나 지금 그 자리의 명함을 갖고 있는 사람들 중 어떤 자들은 내란을 내란이라 부르지 못하고, 폭동을 폭동이라 하지 않는다. 국민이 빈곤해지건 나라가 망하건 그들의 관심은 오직 자기 권력의 유지에 있을 뿐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의 벌열이 아닌가?

아, 이병정은 어떻게 되었냐고? 귀양지에서 놀다가 돌아와 억울하다는 말을 늘어놓았고, 같은 패거리의 도움으로 다시 관로(官路)에 들어섰다. 사헌부 대사헌, 사간원 대사간, 홍문관 제학, 강원도와 함경도 관찰사를 거치고, 이조판서, 병조판서까지 올랐다. 과연 벌열이었다.

사족. 만약 대한민국에 개혁이 있어야 한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가?

인문학 연구자

강명관 인문학 연구자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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