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시계 산업은 초기에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정밀 산업이었다. 그러나 디지털화되면서 양산 조립업으로 변했다. 이후 패션업으로 변모했고 최근에는 보석 산업에 가깝게 됐다.”
30년 전 이건희 삼성 회장은 업의 본질에 대해 말하며 시계 산업 예를 들었습니다. 업의 본질을 알아야 승부처를 찾아낼 수 있고, 같은 산업도 시대에 따라 본질이 달라지기 때문에 쉼없이 그 본질을 따라가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얘기였습니다.
지난해부터 삼성전자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이 들려옵니다. “재벌 걱정이 가장 부질없는 짓”이라고 했지만 삼성전자의 위기는 곧 한국 경제의 위기이기에 관심이 높은 것은 당연합니다.
이건희 회장이 남긴 말을 통해 현재 삼성 반도체의 상황을 살펴봤습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업의 본질’은 현재를 설명하기에 딱 맞습니다.
엔비디아가 세계 최대의 반도체 회사가 되고, 퀄컴은 반도체의 상징이었던 인텔 인수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엔비디아와 퀄컴은 공장이 없는 회사입니다. 반도체 패권 경쟁의 축이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넘어갔다는 뜻입니다.
삼성은 소프트웨어 경쟁에서 명함도 못 내밀고 있습니다.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존재감이 급속히 떨어지는 이유입니다.
다음은 수주산업에 대한 이건희의 말입니다. “수주업은 자기가 먹던 감이라도 내어줘야 한다.”
입에 있는 것이라도 내주는 ‘을’의 자세가 있어야 수주를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삼성이 100조원을 투입했다는 파운드리 산업의 본질은 수주업입니다. 기술력 중심인 메모리 반도체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일감을 얻으려면 자세를 낮추고, 고객이 필요로 하는 것을 일일이 맞춰줘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노하우도 축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삼성 반도체 부문은 ‘을’이었던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수주업에 맞지 않는 문화를 갖고 있다는 말이겠지요.
또한 삼성 파운드리 경영자 대부분은 메모리 반도체 출신들입니다. 전혀 다른 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 어쩌면 낮은 경쟁력의 원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경영자와 관련해 이건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삼성에서 일하는 동안 후계자 제대로 안 키우고 나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중에 성공하는 사람 못 봤다. 후계자가 없으니 그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삼성 반도체는 지난해 마땅한 경영자가 없어 일선에서 물러난 전임 경영자를 다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것을 보면 이건희 회장의 말은 미래를 예견한 듯합니다.
삼성전자 분기 이익이 사상 처음 10조원을 넘어선 2010년 봄 이건희는 회장으로 복귀합니다. 그의 일성은 “10년 후 삼성이 세계 1위 하는 제품은 모두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였습니다. 하지만 “10년 후를 준비하라”는 그의 음성은 삼성에서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대신 “당장 돈 되는 사업이 중요하다”는 분위기 속에 삼성 반도체는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인재에 대해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천재가 모여 경쟁해야 발명이 나온다. 이것이 미국이 전화기부터 반도체 소프트웨어, 하드웨어를 다 점령한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천재들을 스카우트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삼성전자가 데려온 천재들은 하나둘 떠나고 있습니다. 천재를 붙잡을 최고경영자가 그 역할을 못 하고 있거나 제조업 중심의 문화가 이들을 밀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2000년대 중반 LG가 휴대폰 사업에 치고 올라올 때 이건희는 이렇게 말합니다. “댐은 비행기가 폭격을 해도 끄덕없지만 바늘구멍이라도 있으면 점점 커지다가 결국 무너진다. 조그만 것이라도 경쟁사에 지기 시작하면 이게 점점 확대된다. 한번 지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삼성 반도체는 그동안 수많은 바늘구멍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무시하고 지나친 것이 오늘의 결과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합니다.
과거 삼성 반도체 사업부에는 이런 캐치프레이즈가 있었습니다.
“성공에 안주 말고(정신무장), 익숙했던 것들과 결별하고(창조적 파괴) 끊임없이 변화를 즐기고(혁신과 도전), 시련과 고통을 이기고(건강과 부서화합), 꿈과 희망을 공유하자(비전 공유).”
삼성 반도체가 미국, 일본 업체들을 제치고 세계 1위로 도약한 그 시절의 DNA를 되찾기를 기대해 봅니다.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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