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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전히, 그는 도왔다
의사자 고(故) 곽한길
(1975~ 2024)

편집자주

고인을 기리는 기억의 조각, 그 곁을 치열하게 마주한 뒤 비로소 전하는 느린 부고. 가신이의 삶엔 어떤 이야기가 남아 있을까. 별세, 그 너머에 살아 숨쉬는 발자취를 한국일보가 기록합니다.

곽한길씨는 늘 다정한 아빠였고 아이들도 다정한 사람으로 살아가길 바랐다. 일러스트=신동준 기자


인간은 남을 돕는다. 어떤 이는 수행(修行)하듯 이를 증거한다. 하물며 목숨이 걸려있을지라도.
오승현(50)
씨는 이 사실을 곱씹으며, 병원 대기실에 창백하게 앉아 있었다. 곧 넋을 잃을 표정인데, 눈은 화면을 떠나지 않는다.

'사고 차량 수습 돕던 40대, 갓길 덮친 트럭에 그만.'
뉴스 헤드라인이 귀에 꽂혔다. "수습을 도우러 갔던 40대 운전자, 그리고 사고 차량 안에 있던 운전자 모두 숨졌습니다. 불과 10분 사이 벌어진 일입니다. 다른 사람을 도우려던 착한 마음은 보상받지 못했습니다."

꽤 일찍 하루를 시작했다. "엄마! 괜찮아?" 검푸른 새벽을 기습한 꿈에 승현씨가 소스라치자
큰아이(18)
가 물었다. 낯선 검은 형체가 목을 훑고 사라졌다. "엄마, 지금 새벽 1시도 넘었어." 꿈이었구나. "엄마가 꿈꿨나봐." 곤히 잠든
딸(13)
을 당겨 안으며 다시 눈을 붙였다. 잠깐의 고요, 이른 아침 전화벨이 울렸다. 남편과 일하는 후배다. 남에게 전화 걸기엔 망설일 시간. "삼촌, 무슨 일 있어?" 울음 소리만 들렸다.

남편이 숨졌다니. 고속도로에서 생면부지 남을 돕다가? "정신 똑바로 차리자. 애들 생각도 해야 해." 눈물을 훔치며 승현씨는 정신을 다잡았다. 사고 지점인 천안의 병원으로 향했다. 신원 확인을 기다리는 동안 대기실의 뉴스 소리가 주변 사람들 목소리에 뒤섞인 채 웅성웅성 들렸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어머, 대단한 사람이다." "아이고, 어쩌면 좋아." 숨졌다는 화면 속 무명의 40대 운전자를 그는 단번에 알아챘다.

"아아, 당신이구나." 이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경부고속도로 2차 교통사고로 2명 심정지' 같은 멀건 명제가 아니었다. 미소가 예쁜 내 남편, 아들의 낚시 친구이자 딸이 좋아하는 꽃을 묻던 아빠, 대가족의 막내,
곽한길씨 별세. 향년 49세.


아내 오승현씨는 "예쁜 옷을 입고 데이트를 나갔는데 어느새 한길씨를 따라 어르신 리어카를 밀어주고 있는 날도 많았지만 둘은 늘 웃음뿐이었다"고 했다. 유족 제공


웃음이 예뻤다. 남편 그리고 아빠



여수. 그래, 열일곱 살 한길씨를 처음 만난 건 전남 여수시였다. 친구 소개로 처음 본 날, 184cm의 큰 키로 걸어오는 모습에 그는 생각했다. "남자도 저리 예쁘게 웃는구나." 다른 학교 같은 학년 친구로 지내다 연인이 됐고, 스물다섯이 되던 2000년 결혼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에 취업 시장은 살벌했다. 아르바이트로 제3금융권 추심 일을 어렵게 구한 한길씨는 부지런히 출근했다. 반년쯤 지났을까. 술에 취해 귀가한 한길씨가 한참 헛웃음만 지었다. "자기야. 미안한데, 나 이 일은 아닌 것 같아." 4년 넘는 특전사 생활도 버텼는데, 그런 약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날 알았다. 한길씨가 매일 눈물 속에 서성였다는 것을. 돈을 갚지 못한 채 사라진 아들 소식을 되묻는 할머니 집 앞에서. 젖먹이를 부둥켜안고 눈물만 흘리던 젊은 엄마의 집 앞에서. 그러다 돈 얘기는 차마 꺼내지 못하고, 지갑을 털어 분유, 기저귀를 사주고 빈손으로 터덜터덜 그 골목을 나왔다는 것을. 승현씨가 다독였다. "난 자기 길 아닌 거 알고 있었는데. 이제 느꼈어?" 그 후 한동안 포장마차를 꾸렸고, 두 차례 사업을 거쳐 전기 통신 설비 일을 시작했다.

설비 일은 남다른 의미로 적성에 꼭 맞았다. "자기야, 나 다 왔어. 주차 중이야." 귀갓길 한길씨는 이렇게 말하고도 30~40분씩 보이질 않았다. "왜 이제 왔어?"하면 가게 이름이 줄줄 나왔다. "문구점 할머니가 혼자 계시는데 불이 깜빡여서." "잠깐 고쳐드리느라. 슈퍼에."

1남 1녀를 낳았다. 다정한 아빠로 아이들도 다정하길 바랐다. "세상 절대 혼자 사는 것 아니다." "항상 인사 잘해야 한다." 네 식구가 외식차 스쳐가는 식당에서도 에어컨 고장을 해결하고 설비를 봐줬다. 고맙다며 김장김치를 매년 보내주는 곳만 세 군데가 됐다.

베풂의 대가가 물론 없진 않았다. 내 것을 챙길 줄 몰랐고, 남을 잘 믿는 통에 사업이 휘청이거나 송사를 겪기도 했다. 아내 입장에선 서류 정리나 채무 문제로 고뇌했던 시간이 안타깝기도 했다. 그럴 때면 "자기야, 욕심도 좀 부려봐"하고 가벼운 핀잔을 건네봤지만 말 없는 웃음이 돌아올 뿐이었다. 그랬던 그가 지난해 1월 초 조카 결혼식 때 처음 장담을 했다. "누나, 이제 우리 집사람 고생 안해도 될 것 같아." 일이 잘 풀린다며 올라가는 입꼬리에 진심이 묻어났다. 사고 3주 전이었다.

병원 대기실에 틀어 둔 뉴스는 시간 차를 두고 반복됐다. "이렇게 보니 당신 영화배우 같네. 참, 너라는 사람은 왜 그런 걸 지나치지 못하니. 그래도, 왜 이렇게 일찍 갔어. 애들이 아빠 그리워할 텐데."

고인은 늘 분주하게 전기 통신 설비 일을 하며 주변과 가족을 돌봤다. 유족 제공


전장으로 뛰어든 의인



서정필 고속도로순찰대 제2지구대장
(현 대전 중부서 경비안보과장)은 사고 현장 폐쇄회로(CC)TV 영상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일반 시민이 운전자를 구조하겠다고 뛰어들다니. 전날 사고 현장이 떠오르면서,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발 딛고 보면 한밤중 고속도로는 공포 그 자체다. 2~3km 전방부터 순찰차로 지그재그 서행을 하며 트래픽 브레이크를 걸고 '불봉'을 흔들어도, 차들은 사정없이 수습 현장을 덮친다. 앞을 보지 않거나, 조는 운전자는 늘 있었다. 가슴팍까지 죽음이 닥치는 기분을 대원들은 자주 겪는다. 목숨을 잃은 경찰도 여럿이다. 서 대장은 발령 직후 순직한 네 분의 영정을 1층 현관에 걸었다. "매일 목례합시다."

곽한길씨의 목숨을 앗아간 사고의 시작과 끝. 그래픽=이지원 기자곽한길씨의 목숨을 앗아간 사고의 시작과 끝. 그래픽=이지원 기자


화면이 비춘 건 1월 31일 새벽 1시 경부고속도로 서울방향 334.5km 지점, 천안 분기점 인근이다. 4차로를 달리던 4.5톤 트럭이 돌연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쓰러졌다. 충격 지점에 불길이 치솟았다. 차 3, 4대가 주춤했지만 화면 밖으로 이내 사라졌다.

앞쪽 갓길에 정차한 파란 1톤 트럭 한 대가 보였다. 신고가 접수된 시간과 겹쳤다. 목격자 중 유일하게 멈춰 내린 건 한길씨였다. 대원 한 명이 담당하는 고속도로 구간은 45km 정도, 바로 출동해도 10분쯤 걸린다.
사고차 운전자(61)
는 그때까지 나오지 못했다. 운전석 차문은 바닥에 맞닿아 열 수 없었다. 왼쪽 뒷바퀴엔 불이 붙고 있었다.

3분 정도 흘렀을까. 화면 속 한길씨가 넘어진 차를 향해 뚜벅뚜벅 걸었다. 다시 2분 후, CCTV 화면이 퍼뜩 확대됐다. 통제실에서 화면을 당긴 거였다. "아, 사람이구나!" 금세 한길씨가 조수석 문 위로 올라섰다. 운전자를 붙들고 밖으로 꺼내려 안간힘을 썼다. 꺼내려다 내려앉고, 꺼내려다 내려앉고. 필사적이었다. 7대의 차량이 한길씨 옆을 쏜살같이 내달렸다.

구출의 사투가 1분 10초 정도 흘렀다. 멀리서 16.5톤 카고(Cargo·화물) 차량이 심상치 않은 속도로 돌진했다. "안 돼, 안 돼!" 서 대장은 속으로 외쳤다. 16.5톤 화물차가 '쾅' 하는 굉음과 함께 현장을 덮쳤다. 2차 사고였다. 한길씨와 그가 구하려던 운전자는 현장에서 숨졌다.
2차 사고를 낸 운전자(49)
는 경상을 입었다.

서 대장은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27년 경찰 생활, 현장에서 이런 일은 처음 봤다. 언론의 사고 취재가 이어졌고 기자 한 명이 "권하기엔 위험한 행동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다. 서 대장은 천천히 입을 뗐다. "정말 위험해요. 권하긴 어렵습니다." 말을 더 보태야 했다. "그러니 대단하죠.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쓰러진 전우를 구하려 뛰어드신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다시 확인한 화면. 주변이 민가라 비교적 조명이 밝았다. 어두워 CCTV라도 안 남았다면 더 억울해 어쩔 뻔 했을까. 입 안으로 쓴 침이 고였다. "의사자 관련 법안 좀 찾아봅시다." 평소 업무는 아니었지만 손이 다급히 움직였다. 사색이 된 유족에게 꼭 의사자 신청을 하시라 당부했다. "사람들이 하루라도 더 기억해야 합니다."

꽃과 나무를 사랑한 막내



'의사자? 그런다고 동생이 살아 오나.'
곽한옥(51)
씨는 영정을 보며 입술을 다물었다. 비보가 날아올 때 형제는 생업에 분주했다. 넷째 형 한옥씨는 여수 광양항만에서 선박 정비를, 셋째 형
곽한호(54)
씨는 삼천포 화력발전소에서 설비 수리를 하고 있었다. 5남 1녀 중 막내. 한길씨 영정 앞 국화를 멍하니 보던 한호씨는 잊었던 돌산읍 마당에 핀 국화를 떠올렸다.

어린 한길이가 어느 하루, 화분을 잔뜩 안고 왔다. 미화 담당인데 학교에 심고 많이 남아 얻어 왔다며 눈을 반짝였다. "형, 국화라고 다 같은 게 아니야. 이름도 다르고 피는 때도 달라!" 꽃이 필 때 마다 막내는 달뜬 얼굴로 흥얼거렸다. "형! 내 말 맞지?" 그 뒤로도 딸기를 심어 애지중지하고, 동백나무를 구해 마당에 심었다. '등발(덩치의 방언) 좋은 우리 막내가 꽃을 저리 좋아하는 줄이야.'

양친은 갓농사를 지었다. 훈장이었던 할아버지 영향인지 아버지는 사람 도리를 매섭게 중시했다. 옛 서당 방식으로 천자문, 사서삼경을 가르쳤다. 사람 노릇 해야 한다며 일도 꼭 시켰다. 넷째와 막내는 소를 먹이거나, 나무를 해왔다. 일을 시키면서 늘 다짐을 뒀다. "혼자서는 살 수 없다. 도와야 일이 된다. 늘 인간 도리를 해라." 막내도 알아들었을까.

넷째와 막내는 선장을 해 보탬이 되겠다며 국립부산해사고에 입학했다. 3학년, 1학년에 나란히 다니던 해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형, 집에 엄마도 안 계시는데 부산까지 도저히 못 가겠다." "그래, 내키는 대로 해라." 그 길로 막내는 여수공고에 진학했다.

의사자가 되면 현충원에 묻힐 수 있다는 말에, 막내의 의젓한 아들 녀석이 말했단다. "거기 가면 아빠 외롭잖아요. 삼촌들 계시는 여수가 낫죠." 학교를 옮길 정도로 여수를 떠나기 싫다던 애비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걸까. 저 예쁜 걸 두고 막내는 어찌 그리 허망하게 눈을 감았을까. 요즘 세상엔 끈덕지게 내 것을 챙기는 영리한 이들이 참 많은데 어째 그러질 못했을까. 사고 당일에도 막내는 일을 하나라도 더 하려 광주에 아르바이트를 다녀오던 길이었다.

한옥씨의 전화벨이 울렸다. 아내였다. "어떤 남자 분이 한길씨 산소를 찾는다면서 가족까지 데리고 왔어요. 군 후배래요." 묘를 쓴지 두 달이 지났을까. 수화기 너머의 사내는 외국에서 뒤늦게 부고를 접했다며 물어 물어 찾아왔다고 했다. 그 뒤로도 비슷한 방문이 이어졌다. "한길이가 그렇게 잘해줬단다." "군에서는 원수가 되기도 하던데 어찌들 지냈기에."

고향 선산을 오르는 사내들 모습에 형제는 사무쳤다. 네가 그리 살았구나. 사람들이 그 먼 걸음을 할 만큼. 그랬으니 그 도로에서도 그냥 가질 못했구나. 이제야 알겠네. 가족도 아닌데 네 영정 앞에서 목놓아 울던 사람들 눈물의 뜻을. 한길아, 그 후배들은 잘 만났냐. 동백도 봤지? 좋아하던 너 보라고 묘 옆에 심었는데. 꽃이 피었드만.

5남 1녀의 막내였던 고인은 한때 선장이 돼 집안에 보탬이 되겠다며 국립부산해사고에 진학했다. 뒷줄 오른쪽부터 고인과 형들. 앞줄 왼쪽부터 부친, 조모, 모친이다. 유족 제공


강하지만 허풍 없는 이웃



돌산에 동백이 핀 초겨울, 성큼성큼 걸어오는 사내에
이윤성(55)
씨가 흠칫 놀랐다가 이내 옷깃을 여몄다. "참 그렇지, 곽 소장일 리가 없는데. 헛 게 보이나." 둘은 스치던 인연이었다. 식당 주인 윤성씨가 처치가 곤란한 어항을 내놨는데, 지나가던 한길씨가 버릴 셈이면 쓰겠다고 한 뒤로 15년 인연이 됐다. 그날로 싹싹한 동생이 생겼다. 식당 전기가 말썽이면, 지방 출장 후에도 들러 고쳐 놓곤 했다. 고마우면서도 늘 걱정했다. "아니, 맨날 남의 일을 해주고 다니면서…" 한길씨는 답했다. "에이, 형님. 제가 만지면 금방 하는데. 잠은 죽어서 실컷 자면 돼요."

함께 다닐 때도 한길씨는 노인이 미는 손수레를 지나치지 못했다. "매번 차까지 세우고 너도 참 대단하다"하면 "어르신 힘든데 잠깐 해주면 되잖아요"하는 답이 왔다. '굳이, 내가, 왜' 대신 '할 수 있는데'를 말하는 모습을 보며 윤성씨는 자주 혼잣말을 했다. "강하다는 건 이런 사람한테 쓰는 말이구나. 동생이 아니라 형이네, 형."

한길씨를 '형 같은 사람'이라고 부르긴
박계운(45)
씨와
김혁수(53)
씨도 매한가지였다. 이들은 전기 통신 설비 현장에서 만나 30년을 동고동락했다. 둘은 듬직한 한길씨를 '비빌 언덕'이라고 불렀다. 일 마치고 한잔씩 기울일 때 한길씨는 동네방네 옆 테이블에서 붙는 싸움을 말리는데 선수였다. 그 강한 사람이 신기하게 허풍은 없었다. 과시할 법도 한데 오히려 군 얘기엔 말수가 적어지고, 4월이면 조용히 국립대전현충원 참배를 다녀올 뿐이었다.

"나이 들면 여수에서 편히 낚싯배나 하자더니." 윤성씨는 형 같은 동생을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예전엔 무슨 그런 말이 다 있냐 했는데. '하늘은 때론 좋은 사람을 먼저 데려 가신다'는 말, 이제는 믿는 수밖에."

여전히 의로운 동지



동백이 지고 봄꽃이 필 무렵,
조길제(50)
씨는 군 동기를 통해 전해진 한 줄 부고에 정신이 얼얼했다. 무심코 지나친 뉴스 화면 속 사내가 너였다니. 그때도 한길이는 다리가 참 길었는데. 전역 후 벌써 25년이다. 제5공수 특전여단 23대대의 '꽉길이'. 힘든 훈련으로 지쳐도 표정이 여유롭던 그를 동기들은 이렇게 불렀다. 제 발로들 찾아왔지만 고된 훈련 탓에 스무 살 앳된 얼굴엔 무거운 책임감이 그득했다.

길제씨 뇌리엔 1996년 백두대간 천리행군이 선명했다. 밤새 한숨 못 자고 무거운 군장을 멘 채 산과 들을 헤집던 그날, 얼어붙은 산자락에서 밥을 짓던 누군가 산불을 냈다. "불이다!" 고함이 허공을 가르고, 발이며 무릎이 상할 대로 상한 대원들이 절룩거리며 겨우 발을 떼는 모습은 서글프기만 했다. 그때, 누군가 성큼성큼 뛰었다. 한길이었다. 길제씨는 두고두고 말했다. "키가 큰 줄은 알았지만 불을 향해 뛰는 그 한길이 다리는 진짜 길어 보였어."

98년 천리행군은 비통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행군하던 나흘 내리 찬 비가 내렸다. 닷새 차인 4월 1일 흑룡부대 장병 258명이 충북 영동군 민주지산(1,242m) 정상을 향했다. 빗줄기는 아무도 모르게 눈으로 바뀌었다. 4월의 폭설. 눈은 30㎝ 높이로 무릎을 붙들었다. 덮친 격으로 시속 55㎞ 강풍까지 불었다. 하나둘 의식을 잃어갔다.

"일어나! 일어나! 눈 떠서 가자!" 눈밭은 절규로 가득찼다. 아비규환이었다. 심폐소생술이 계속됐지만 삶과 죽음은 이미 한 발 차이였다. 체감온도 영하 20도 이하. "제발! 제발!" 절규는 점차 애원이 됐고, 지옥을 빠져나오는 길은 길고 험했다. 의무 주특기였던 한길이도 눈물을 떨궜다. 끝내 6명이 숨진 이날 일을 세상은
'특전사 민주지산 순직 사태'
라고 불렀다. 순직자들은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그때 우리 동기, 그 한길이가 사람을 구하다 숨졌다고? 장지를 찾아 여수로 향하며 길제씨는 곱씹었다. '그때를 너는 가슴에 품고 살아 왔을까. 어쩌면 잊었을까. 때론 애달파 잊기 위해 애썼을까. 세월이 흐르면 타성에 젖어 입만 놀리는 속물이 되기도 하던데. 넌 아니었구나. 변치 않고 구하는 사람, 돕는 사람으로 남아, 언제 빨려 들지 모르는 어둠 속으로 또 달려갔으니. 너는 그대로였구나. 그래, 한길이었으니까.'

군 복무 시절 고인의 모습. 그의 동기, 선후배들은 제5공수 특전여단 23대대의 '꽉길이'를 잊지 못한다. 유족 제공


비범한 희망을 남기다



승현씨의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88), 한길씨 장모
다. 곧 사고 1년째인데 장모의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한길씨는 "나 낚시 하고 올게"하고 서울 집을 일찍 나선 뒤 처가를 향하곤 했다. 여수에서 배로 2시간 들어가는 섬. "아이고, 한길이가 치킨을 사가지고 왔다. 밖에 화장실 어둡다고 불 달아주고 간단다." 그렇게 기뻐하던 장모가 오늘도 사위 얘기를 한다. "감나무에 새가 와서 우는데, 한길이가 와서 저렇게 이야기를 하나 싶다. 외롭지 말라고."

승현씨는 어느 해보다 하늘을 많이 봤다. 어느 날은 저녁 밥을 한술 뜨던 큰아이가 물었다. "엄마, 혹시 가해자 알아?" 2차 사고 운전자를 묻는 거였다. 복잡한 마음을 누르며 승현씨가 되물었다. "왜 궁금해? 아빠랑 나이는 같은데. 아이가 있는 가장일 수도 있고, 어느 집의 효자 아들일 수도 있고, 혼자 사는 사람일 수도 있고. 그렇겠지." 조용히 듣던 아이가 답했다. "그 사람도 참 난처하겠네."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아이가 왜 거기까지 생각하나. 그런 마음은 대체 어디에서 오나. 그러다 깨달았다. "한길씨, 당신 참 잘 살았구나. 내가 전에도 말했었지. '아들 롤모델이 아빠래' 하고." 빈소에 온 한 후배도 아들을 붙들고 한참을 말했었다. "너희 아빠, 정말 멋진 사람이었으니까 어깨 쫙 펴고 살아라."

종교가 없는 승현씨는 요즘 매일 기도를 한다. "그리운 한길씨, 우리가 이렇게 기억할게. 퍽퍽하고 숨도 쉬어지지 않는 이런 세상에 당신처럼 빛나고 의로운 사람도 있었다고. 정말 행복했어. 가슴 뜨겁게 사랑해. 하늘이 허락하는 날 다시 만나자. 그리고 꼭 기억해. 당신 참 잘 살았어. 이렇게 정말 잘 살았어."

더 충분히 기억되지 못한 이들 곁을 찾아갔다. 마음 한 편에만 남아 빛나는 기억을 조각조각 길었다. 일러스트=신동준 기자




■ 한국일보 엑설런스랩
팀장: 김혜영 기자
취재: 손영하 · 이서현 기자, 이지수 인턴기자
데이터 분석: 황수현 기자
플랫폼: 박인혜 플랫폼서비스팀장
영상: 김가현 인턴PD

회차순으로 읽어보세요

  1. ① 교수, 장관, 회장의 별세만 특별할까…"미처 몰랐던 보통 삶의 비범한 희망"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11309550004945)
  2. ② 생면부지 남을 구하러 목숨을 던졌다..."다시 돌아와도 또 도울 사람"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11309570000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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