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BAR_엄지원의 측면지원
대통령경호처 누리집.
“여러분은 생일에 친구들이 축하 파티나 생일 축하송 안 해주나요? 업무적인 걸 떠나서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책상 옆에 앉아 있는 동료가 생일이어도 그렇게 해 주지 않습니까?”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 집행을 방해한 혐의로 체포된 김성훈 대통령경호처 차장(처장 직무대리)이 17일 오전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에 출석하면서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2023년 경호처 창설 60주년 행사와 윤 대통령의 생일을 겸해 열린 행사에서 경호처 직원들이 “하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대통령”이라는 등 윤 대통령을 칭송하는 합창을 했다는 지적이 나오자 ‘그럴 수도 있는 게 아니냐’는 취지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내놓은 겁니다. 김 차장은 이 행사의 기획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경호를 받는 요인과 경호원의 관계를 ‘친구’, ‘동료’에 빗댄 김 차장의 이날 발언은 ‘김용현 경호처장 체제’에서 망가진 경호처의 내부 상황을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윤석열 정부 출범과 함께 ‘충암파’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경호처에 부임하면서 김 전 처장의 신뢰를 얻은 김성훈 차장과 이광우 경호본부장, 김신 가족부장 등이 대통령 부부와 필요 이상으로 밀착했다는 게 경호처 내부를 잘 아는 이들의 설명입니다. 윤 대통령 1차 체포 시도 과정에서 경호처가 국민의 상식과 법적 절차를 외면하고 위법한 ‘방탄’에 나선 것은 단순히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상처가 곪아터진 것에 가깝다는 것이지요.
경호 대상자와 ‘긴장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건 경호 업무 종사자들의 불문율입니다. 한겨레와 인터뷰한 복수의 경호처 간부들은 ‘브이아이피’(VIP·대통령 및 가족)를 표현할 때 거듭 ‘모닥불’이라는 수사를 사용했습니다. “너무 가까이 가면 타 죽고 너무 멀리 가면 얼어 죽으니까, 대통령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게 선배들로부터 전수된 가르침이에요.”
‘촉수 거리(손에 닿는 거리)의 원칙’도 강조했습니다. 촉수 거리의 원칙은 위험 요인이 발생했을 때 ‘내 손이 닿는곳에 브이아이피가 있으면 내가 커버한다’는 경호 원칙입니다. 그러나 경호처 직원들에겐 액면을 넘어선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이는 반대로, 촉수 거리를 지키라는 뜻이기도 해요. 브이아이피에게 너무 가까이 가지 말고 거리를 지키라는 거죠.”
김성훈 대통령경호처 차장(처장 직무대리). 김경호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민주화 이후 역대 대통령들 역시 경호처(경호실)와 이런 거리 감각을 유지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 등은 경호관들을 ‘감시자’로 여겨 불편하게 생각하기도 했다는군요. 근접한 거리에서 늘 대통령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는 존재들이니까요. 경호처 관계자들이 스스로를 “생각하는 그림자”로 묘사하는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그러나 윤석열 정권에서 경호처의 시계는 어쩌면 ‘차지철 시대’로 회귀했는지 모릅니다. 유신 시대에 차지철 경호실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핵심 실세’로 군림했듯 윤 대통령의 전적인 신뢰를 받은 충암고 선배 김용현이 처장에 임명되며 ‘각하의 심기까지 경호’하는 시대로 돌아간 것입니다.
특히 김건희 여사가 ‘김성훈·이광우·김신’ 등 수뇌부 3인방과 밀착하며 경호처를 마치 부속실처럼 부렸다는 게 경호처 관계자들의 설명입니다. “경호처인지 비서실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였습니다. 부속실이나 총무비서관실이 할 일도 경호처에서 처리했고, 안보실에서 해야 할 일까지도 경호처가 나섰습니다. 대통령 부부가 힘을 실어줬고,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했지요. 일부 간부들이 김건희 여사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했고, 이런 모습에 후배들과 중간 간부들이 많이 허탈해 했습니다.” 몇 년은 걸렸어야 할 대통령실 이전이 1년 만에 마무리된 것도, 이런 “절대 충성파”들의 속전속결 덕분이었다는 게 이 간부의 설명입니다.
김 여사를 담당하는 가족부장도 아닌 김성훈 차장은 김 여사에게 경호처의 대소사를 직접 보고하며 신뢰를 쌓았다고 또다른 간부는 설명했습니다. 경호처가 제작하는 창설 기념 선물을 정하거나 출입증 비표 색깔을 고르는 등 사소한 일까지도 김 여사가 개입했다는 겁니다. 준비팀까지 꾸려 성대하게 거행된 경호처 60주년 행사(겸 대통령 생일 파티)에도 김 여사는 반려견 세 마리와 함께 모습을 내비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사는 그런 식으로 경호처에 애정(?)을 보여준 거죠. 사실상 한 가족처럼 대했습니다.” 또다른 간부는 “경호처가 브이아이피를 잘못 모신 게 계엄이라는 엉뚱한 판단을 하실 수 있는 작은 단초를 마련한 게 아닌가 싶어 후회스럽기도 하다”고 했습니다. 윤 대통령 부부가 ‘수명’(명을 받듦)을 철칙으로 삼은 경호처를 수뇌부 3인방을 통해 ‘사조직’처럼 장악했고, 이에 따라 가장 가까이에서 대통령을 접하는 이들이 과도하게 대통령 부부에게 충성함으로써 대통령의 정상적인 판단을 흐렸다는 취지입니다.
윤 대통령은 체포돼 구속을 기다리는 몸이 됐고, 김 차장 역시 이날 아침 체포됐습니다. 18일 경찰 조사를 받는 이광우 본부장도 곧바로 체포될 것으로 보입니다. “친구” 같은 관계니까 구치소 밥도 함께 먹게 되겠지요. 이들의 오판으로 망가진 경호처를 바로 세우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겠고요.
오랫동안 경호처에 몸 담은 간부는 “대선 투표를 한번도 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 간부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저는 정치 성향이 없습니다. 원래부터 없었고 그 ‘없음’을 너무나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근무했어요. 혹시나 내가 뽑지 않은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내 직무에 사심이 개입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에 경호처에서 일을 시작한 뒤 단 한번도 대선에서 투표를 하지 않았습니다.” 경호처 내부에는 공적 사명을 받든 직원들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경호처는 ‘차지철의 시대’와 ‘김용현의 시대’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