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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 임원 교육자료 '지행33훈' 살펴보니
삼성, 4월 말까지 임원 상대로 '삼성다움' 교육
삼성전자 서초사옥./이솔 기자

삼성이 모든 계열사 임원 2000명을 긴급 소집했다. 2월 말부터 4월 말까지 두 달에 걸쳐 경기도 용인에 있는 삼성인력개발원에서 ‘삼성다움 복원을 위한 가치교육’을 실시하기 위해서다.

삼성전자뿐만 아니라 삼성물산, 삼성생명 등 전 계열사의 국내외 임원 2000여 명이 교육 대상이다.
삼성이 맞딱드린 위기를 극복하고 근원 경쟁력을 되찾자는 취지
다. 주된 강의 내용은 위기 극복을 위한 임원의 역할과 책임, 조직관리 중요성 등인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 관계자는 “경제 상황이 어려워지고 있고 직원들 중 젊은 세대가 많아짐에 따라 조직관리를 위한
임원의 리더십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보고 임원교육을 부활
시켰다”고 말했다. 교육은 관련 분야 교수 등이 주로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이 전 계열사 임원을 비상소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9년 삼성은 전 계열사의 사장, 부사장 등 최고위급 경영자들을 용인 교육장으로 불렀다.
전 세계가 금융위기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였다.
삼성전자도 10년 만에 분기 적자
를 기록할 정도였다.

당시
이들 앞에는 교육 자료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문서 제목은 ‘삼성의 경영철학으로 본 위기극복 방안’으로 ‘신지행33훈’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지행33훈’은 이건희 선대 회장이 했던 발언을 기초로 그의 경영철학을 33가지로 정리한 것
이다. 삼성이 강조하는 ‘삼성다움’이 여기에 모두 담겨 있다.


삼성전자는 2009년 이건희 선대회장의 경영철학을 정리한 '지행33훈'을 임원 긴급 교육 자료로 배포했다./연합뉴스

사상 초유의 위기를 맞이한 삼성이 전 계열사 임원을 불러들인 것을 두고 업계에서는 2009년을 떠올린다.


삼성전자는 2009년 임원 소집 이후 이건희의 경영철학으로 재무장했다. 그리고 금융위기를 뚫고 삼성전자는 2분기, 3분기 연속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당시 일본 기업들은 줄줄이 실적 추락의 쓴맛을 볼 때 삼성전자는 분기이익 10조원을 넘봤다. 금융위기의 승자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2010년 경영일선에 복귀한 이건희의 일성은 정반대였다.
이건희 선대 회장은 “10년 후 삼성이 세계 1위를 하는 제품은 모두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이는 지금까지 삼성을 지켜온 위기의식이다.

2024년 상황은 2009년 초를 연상시킨다. 4년 전만 해도 삼성전자의 시가총액보다 낮았던 엔비디아는 이제 그 격차를 20배로 벌렸다. 30년간 유지해오던 ‘메모리반도체 1위’ 자리도 SK하이닉스에 내줬다. 사상 초유의 위기를 맞이한 삼성이 16년 전 위기 때 펼쳐봤던 이건희의 ‘지행33훈’을 다시 살펴봤다.
1. 생각의 힘 : 위기경영은 기업가의 본능
2023년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열린 이건희 회장 3주기 추모 삼성 신경영 3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 참석자들이 이건희 회장 신경영 관련 영상을 지켜보고 있다./뉴스1

이건희는 위기의식을 경영자가 갖춰야 할 첫 번째 덕목으로 꼽았다. “위기의식을 온몸으로 느끼고 남들보다 앞서 미래를 내다보고 맨 앞에서 변화를 이끄는 것이 경영자다”라고 정의했다.

그가 2010년 회장직에 복귀하면서 10년 후 삼성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내다본 이유다.
이대로 가면 앞으로 삼성의 생존마저 보장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글로벌 삼성의 출발점
이었다.

이건희가 신경영을 선언한 1993년 삼성은 국내 최고 기업이었다. 하지만 이건희의 생각은 달랐다. 이건희는 삼성을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인 회사”라고 평했다.

그는 삼성 간부와 직원들이 “망할 줄도 모르고 국내 1등이라는 자만심과 부서 이기주의, 사업부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회사를 망하는 길로 이끌고 있다”고 질타했다. 삼성에 대한 가장 냉혹한 평가를 한 사람은 이건희다. 전자, 자동차, 조선 산업의 가장 중요한 핵심 기술이 일본에 발목 잡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건희가 삼성에 대해 남들과 다른 진단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했기 때문
이다. 1993년 당시 삼성에는 반도체를 제외하면 세계 무대에 내놓을 만한 제품이 없었다. 제대로 된 기술도 없었다. 특히 일본에 대한 의존도는 절대적이었다.

이건희는 위기 때마다 주제 파악을 하라고 강조
했다. 그는 “주제 파악이 안 되면 전략이 나올 수 없고 전술 개념이 없어지고 대소완급의 판단력이 흐려진다”고 했다.

주제 파악은 항상 위기론으로 연결
된다. 특히 외부 환경의 변화는 조직에 변화를 강요한다. 이건희는 변화에 적응하는 출발점이자 가장 중요한 수단이 ‘위기의식’이라고 주장한다.
나의 처지를 파악하고 기업이 처한 위치를 알면 위기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이건희가 던진 끝없는 위기론은 삼성이란 조직의 위기감지 능력을 고도로 발전시켜왔다. 2008년 금융위기가 터지자 이 문화는 힘을 발휘했다.

삼성은 직원들의 일회용 커피나 개인용 난방용품까지 수거했다. 직원들은 이런 분위기를 몸으로 감지했다. 위기의식이 조직 전체에 전달되는 속도는 삼성을 따라갈 조직이 없었다. 이런 위기경영은 이건희가 보기에는 기업가의 본능에 가깝다.
2. 업의 본질 : 양산업에서 수주업으로지행33훈 2장의 주제는 사업전략이다. 사업전략에는 업의 개념, 기회선점, 1등 전략이 담겼다. 업의 개념은 이건희가 국내에서 처음 사용한 말이다. 사업의 본질을 알고 사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업의 개념은 결국 본질에 대한 집착
이다. 이건희는 전자산업의 본질이 ‘타이밍 산업’이라고 했다. 카드업은 ‘물장사(술장사)’, 유통업은 ‘부동산업’이라고 규정했다. 호텔은 ‘장치산업’이라고 했다. 장치산업은 보통 대규모 장치가 필요한 석유화학, 중공업을 칭할 때 쓰는 말이다. 이건희는 호텔 방 하나에는 1300개 정도의 비품이 들어간다. 이 비품을 누가 더 잘 갖추느냐에 따라 호텔의 성패가 좌우된다고 설명했다.

반도체산업은 양산업이었다. 좀 더 빨리, 좀 더 싸게 제조해 쌓아두면 고객사들이 와서 사갔다. 이제 반도체산업의 본질이 바뀌었다. 기술은 기본이고 여기에 고객과의 파트너십이 중요해지면서 ‘수주업’에 가까운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이런 수주업을 해본 적이 2000년대 이후로는 거의 없다. 오랜 기간 시장에서 1위를 독주해온 영향이다.

이건희 회장은 이와 관련 “수주업은 자기가 먹던 감이라도 내어줘야 한다. 일부 사업에서 초기에 실패한 것도 여기에 원인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조선업에 대한 얘기였지만 현재 AI 반도체 사업에 대입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듯한 말이다.
3. 기업의 존재는 앞서나가는 것“사업이 안되다 잘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사업이 잘되다 안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그의 말은 이를 증명한다. 이건희는 “기업 경영에서 기회선점이 진정한 이익의 개념이다”라고 했다. 그는 반도체 1위에서 얻은 성공 경험을 다른 사업부로 이식했다.

이건희는 “5년, 10년을 내다보고 기술 투자를 시작해 준비하지 않으면 삼성은 존재하지만 이익은 내지 못한다”고 경고했다. 이건희에게 기업이 존재한다는 것은 곧 앞서나간다는 의미였다.

4. 천재경영론
“천재가 모여 경쟁해야 발명이 나온다”
이건희가 주장한 천재경영의 3대 요소는 인재, 경영, 공간이다. 천재들이 한곳에 모여 경쟁하는 곳이 이건희가 꿈꿨던 삼성의 모습이었다.

이건희는 인재가 공부뿐만 아니라 끼, 학습능력, 효율, 창의성을 갖춰야 한다고 했다. 일찌감치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이건희는 빌 게이츠를 천재의 전형으로 꼽았다.

이건희는 천재가 기업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될 것이라고 수차례 강조했다. “21세기 경영은 사람 경영이다. 좋은 사람을 얼마나 데리고 있느냐 하는 전쟁이다”라고 말한 시기가 2006년이었다.

이건희의 천재경영론은 S급 인재영입이라는 전략으로 이어졌다. 이건희는 “S급 1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A급 10명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낫다. A급 1명이 B급 10명보다 낫다. 이는 경영의 아주 기본이다”라고 말했다.

S급 인재에 대한 집착은 말에 그치지 않았다. 철저하게 성과주의 보상을 했고 천재급 이공계 학생은 조기에 양성해 채용했다. 또 인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삼성 인력을 데려가면 문제가 된다는 인식을 심어주라”고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5. 기업문화 : 창조와 도전, 실패지행33훈 마지막 장은 삼성의 기업문화를 다룬다. 지행33훈도 같은 이름의 항목이다. 창의와 도전, 정도경영, 그룹공동체, 사회공헌 등이 세부항목이다.

이건희는 “자유롭게 분출할 수 있는 문화가 곧 경쟁력”이라고 정의했다. 1993년 이미 창조적 기업문화를 얘기하고 있었다. 이건희는 창조와 도전의 과정에서 치러야 할 비용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실패와 창조는 물과 물고기 같아서 실패를 두려워하면 창조는 살 수 없다”고 말하며 창조의 전제조건으로 실패란 키워드를 제시했다. 이건희에게 기업문화 키워드는 창조와 도전, 실패였다.

삼성의 전 계열사 임원 교육은 약 10년 만에 재개되는 것이다. 2009년 지행33훈 배포 이후 2016년까지 이어졌던 임원 교육은 2017년 이재용 회장이 사법 리스크에 휘말리면서 중단됐다. 올해 임원 교육이 부활하자 이 회장이 경영의 고삐를 바짝 죄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직원들의 떨어진 사기를 끌어올리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 상황에서 ‘삼성 DNA’를 심는 작업이 부활했기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그룹 컨트롤타워 재건을 위한 사전 작업이 진행됐고, 올해 임원 교육까지 부활하면서 ‘이재용식 뉴삼성’ 구축에 속도가 붙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인수합병(M&A)이나 신기술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앞두고 변화와 혁신을 주도할 리더십을 강화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한경비즈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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