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국회가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관리 특별법’ 등 에너지 3법을 통과시켰다. 사용후 핵연료를 저장할 공간이 없어 원자력발전소를 멈춰야 할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이 법안이 처음 발의된 것이 2016년 11월이니 8년여 만에 거둔 성과다. 사사건건 부딪치기만 하던 국회가 오랜만에 일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기쁜 마음까지 들었다. 여당과 야당, 정부가 서로 조금씩 양보한 결과다.
그러나 국회에 다시 실망하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야당은 이튿날 열기로 했던 국정협의회를 개최 직전에 취소했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와 우원식 국회의장, 권선동 국민의힘 원내대표,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등 정부와 국회의 수장들이 모여 시급한 법안을 논의하기로 했던 자리다.
야당이 회의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는 최상목 권한대행이 마은혁 헌법재판관을 임명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국민연금 개혁,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 반도체특별법 등이 논의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허사가 됐다.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계속 잡고 있는 것인데 문제는 이런 것들을 처리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이달 중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인용 여부를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결과와 관계없이 헌재의 결정이 나오면 정국은 당분간 요동칠 가능성이 크다. 우선 여야가 자신의 뜻과 다를 경우 헌재의 결정을 수용하지 않을 태세다. 게다가 탄핵이 인용되는 경우 바로 대선 국면이 시작될 것이라 경제 관련 법안 논의는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 경제 사정은 그래도 될 만큼 한가하지가 않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폭주로 지난달 말일 코스피 지수는 2600선을 다시 내줬다. 원·달러 환율은 하루 만에 20원 이상 폭등하며 1463원을 돌파했다.(오후 3시30분 종가 기준). 1~2월 폐업한 건설사는 100곳이 넘었고, 한국은행은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1.9%에서 1.5%로 낮춰 잡았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경제 관련 좋은 소식이 없는 상태다.
국회의원들의 눈에는 경제의 절박함이 보이지 않는 것인가. 나라를 걱정한다면 앞에서는 싸울지라도 뒤에서는 일을 해야 한다. 취약계층을 떠받치고 성장세를 회복하기 위해 추경 편성을 서둘러야 하고, 주력산업의 우위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반도체법도 시급히 마무리 지어야 한다. 다음 세대를 위한 국민연금 개혁이나 상속세법 개정 같은 민생 법안도 하나씩 진전을 보여줘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누군가의 양보가 필요한 것인데 서로 절반씩 포기한다는 심정으로 나선다면 못할 것도 없다. 현재 행정부와 의회의 권력은 팽팽한 상태다. 의회 다수를 차지한 야당이 단독으로 법안을 처리해도 정부는 거부권이라는 견제장치가 있다. 더구나 여당과 야당의 지지율이 의미 있는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한쪽의 주장이 다수 국민을 대변한다고 어렵다는 의미다.
여야는 열린 마음으로 협상에 나서야 한다. 서로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을 하나씩 인정하거나 이견이 정말 큰 사안은 빼고 법안을 통과시키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이렇게 통과된 법안도 결국 국민과 기업에는 도움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주당 52시간 예외 규정이 빠진 반도체법이 통과돼도 다른 지원책에 담긴 만큼은 반도체 업계에 득이 될 것이고, 추경에서 전 국민 지원금이 빠져도 기초수급자와 차상위층을 챙길 수 있다.
협상은 할 만큼 했고 판도 깰 만큼 깼다. 싸우느라 시간 다 보내고 아무것도 못한 무능한 국회가 현재 국민의 눈에 비치는 국회의 모습이다. 자신이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라면 이런 직원을 어떻게 했겠는가. 다 해고 대상임을 자각해야 한다. 앞으로 단 열흘만이라도 열심히 일해서 결과물을 만들어 밥값을 해 볼 생각은 없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