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우크라이나인 음악가 나탈리아 볼로슈코(47)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난민으로 살고 있다. 전쟁으로 그의 삶은 송두리째 무너졌다. 유엔난민기구(UNHCR)의 협조로 지난 18일 화상 인터뷰한 굴곡진 인생 역정을 그의 시선으로 되짚어봤다.

우크라이나 난민 나탈리아 볼로슈코가 지난 18일 중앙일보와 화상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 줌 캡처
하르키우의 얼어붙은 공기를 폭음이 때렸다. 의식이 새벽 잠에서 우악스럽게 꺼내지면서 눈을 떴다. 창문 너머로 무너져 내리는 TV 송신탑이 보였다.

다시, 전쟁이었다.

14살짜리 아들의 손을 잡고 9층의 임대 아파트에서 뛰어내려왔다.

2022년 3월 2일 우크라이나 제2 도시 하르키우의 경찰서 건물이 러시아군의 포격에 불타고 있다. AFP=연합뉴스
내가 운영하던 음악학원에 지하실이 있었다. 수강생들의 학부모들에게 연락했다. 갈 곳이 없으면 내 학원으로 대피하자고 했다. 2022년 2월 24일 그날 밤은 학원 지하실 바닥에서 뜬 눈으로 보냈다.

돈바스 출신인 나는 8년 전 전쟁을 이미 겪었다. 돈바스에선 친러시아 반군과 우크라이나군이 서로 죽이고, 죽었다. 하르키우로 몸을 피했다. 피아니스트인 나는 하르키우에 음악학원을 차리고 안착했다. 그러나 또 전쟁이 시작됐다.

지하실에 모여든 남자와 여자, 아이들의 눈에는 공포와 눈물이 어른거렸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기도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전날인 2022년 2월 23일 볼로슈코가 고국에서의 마지막 음악 수업을 하는 모습. 사진 본인 제공
날이 밝자 아들을 데리고 폴란드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천운이었다. 오도 가도 못하는 차와 경적 소리가 역으로 향하는 도로를 메웠다. “러시아가 공격했다”는 절규와 울부짖음이 뒤섞여 있었다.

피란민으로 가득한 기차는 때때로 멈췄다. 전기가 공급되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물과 먹을 것, 빛이 없는 검은 밤길을 기차는 스무 시간을 달렸다. 원래는 두 시간 거리다. 전쟁 발발 사흘 후인 27일 오전 12시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땅을 밟았다. 그리고 이틀 후, 러시아의 미사일 폭격을 받은 하르키우가 함락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볼로슈코가 찍은 피란 열차의 내부 모습. 발 디딜 틈 없이 피란민으로 가득한 상황에서 가다 서다를 반복, 전기까지 끊어져 열차 안(오른쪽)이 어두웠다고 한다. 2022년 2월 26일 오후 4시에 출발한 열차가 폴란드에 도착하기까지 20시간이 걸렸다. 사진 본인 제공
폴란드인들이 우리를 반겨줄까. 과거 폴란드는 우크라이나를 지배했다. 독립한 우크라이나에는 한때 친러시아 정부가 들어서서 폴란드와 맞섰다. 난 폴란드어도 몰랐다. 일주일 내내 침대맡에서 울기만 했다. 그러나 폴란드인들은 우리 모자에게 마음을 열었다. 잠잘 곳과 구호품을 제공했다. 다른 나라와 국제기구도 우리를 도왔다. 새로운 친구들도 사귀었다.

나는 함께 터전에서 쫓겨난 우크라이나 어린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기로 했다. ‘우크라이나 어린이교육센터’와 ‘볼로슈카 뮤직’ 두 곳을 설립했다. 뮤지컬과 오페라, 피아노 소리에 전쟁에 상처 입은 아이들이 마음을 열고, 웃음을 되찾기를 바랐다.

지금 미국과 러시아는 전쟁을 끝내려 한다. 우리를 러시아의 일부로 취급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크라이나인이고, 러시아인이 아니다. 우리는 작지만, 독립된 나라다.

2023년 8월 24일 폴란드 바르샤바 마리오트 호텔에서 열린 음악 콘서트 '우크라이나여, 일어나라'에서 우크라이나 난민 어린이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 콘서트는 볼로슈코가 기획했다. 사진 본인 제공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차이코프스키. 러시아가 벌인 전쟁으로 조국 우크라이나와 우크라이나인은 고통받고 있다. 동시에 나는 음악을 통해 우리 아이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랑은 전쟁을 이긴다. 차이코프스키의 음악도 영원할 것이다.

우리 우크라이나인의 영혼 역시 깊다. 전쟁이 끝나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도 폴란드에 계속 남아서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칠 것 같다.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이고, 이 미친 현실에서 아이들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난민 나탈리아 볼로슈코
폴란드 바르샤바에 거주 중인 우크라이나 난민 나탈리아 볼로슈코. 사진 본인 제공
러시아 접경지인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에서 태어났다. 2014년 ‘돈바스 내전’으로 북동부의 하르키우로 이주했다. 음대 졸업 후 우크라이나 문화부에서 8년간 일했고, 이후 음악학원을 열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폴란드 바르샤바로 대피해 난민으로 살고 있다. 2023년에 우크라이나 어린이교육센터(재단), 볼로슈카 뮤직(학교)을 세웠다. 우크라이나 난민 어린이들의 정신적 치유를 위한 음악 교육 프로그램 등을 기획·운영하고 있다.


중앙일보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46800 김경수 "탄핵연대, 국정운영도 함께 해야"‥'한국형 연정' 거듭 제안 랭크뉴스 2025.02.24
46799 라면 1개 외상 달라던 청년…취업 후 슈퍼 사장에 20만원 봉투 랭크뉴스 2025.02.24
46798 홍준표 "대선 열리면 시장 사퇴…마지막 도전에 뒷배 놓을 수 없다" 랭크뉴스 2025.02.24
46797 '출산 한 달 전 미국행' 이후 4년 체류했어도 법원 "원정 출산" 랭크뉴스 2025.02.24
46796 팬데믹 이후 '삶의 만족도' 첫 하락... 행복까지도 '부익부 빈익빈' 랭크뉴스 2025.02.24
46795 탄핵반대 집회 간 이장우, 격려의 ‘불끈’…계엄 땐 출근도 안 하더니 랭크뉴스 2025.02.24
46794 PC방용 GPU로 연구하는 한국 대학원… 중국에 뒤지는 건 실력 아닌 인프라 [대륙의 AI가 온다] 랭크뉴스 2025.02.24
46793 민주당 “극우 돼가는 국힘”…윤석열 제명 포함 3가지 제안 랭크뉴스 2025.02.24
46792 홍준표 시장 “만약 조기 대선 오면…시장직 사퇴” 랭크뉴스 2025.02.24
46791 한전·한수원, 원전 수출 주도권 놓고도 갈등 랭크뉴스 2025.02.24
46790 건설경기 침체에 구원투수 나선 LH, “비수익 사업 보전 한계” 내부 경고 랭크뉴스 2025.02.24
46789 지겨워진 롱패딩, 내일 낮부턴 벗으셔도 됩니다 랭크뉴스 2025.02.24
46788 신지호 "국힘, '쌍권' 위에 '쌍전'…전광훈·전한길 영향력이 더 커" 랭크뉴스 2025.02.24
46787 서울 경찰 "헌재 탄핵심판 선고날 갑호비상 발령 건의" 랭크뉴스 2025.02.24
46786 "직원에 반값 아파트 선물이 목표"…73세 女기업인 놀라운 선행 랭크뉴스 2025.02.24
46785 어머니 묘역 벌목하던 아들 참변…15m 나무에 깔려 숨졌다 랭크뉴스 2025.02.24
46784 질병청 "中서 발견됐다는 신종 박쥐 바이러스, 인체 감염 사례 없다" 랭크뉴스 2025.02.24
46783 한국인 삶의 만족도 4년 만에 하락…OECD 38개국 중 33위 랭크뉴스 2025.02.24
46782 “관절염인데 아랫배가 아파요”··· 주변 부위로 통증 퍼지는 ‘이 질환’ 랭크뉴스 2025.02.24
46781 명태균 측 “오세훈, 김영선에게 SH 사장 약속했다”…오 “공상소설 쓰나” 랭크뉴스 2025.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