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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는 극우 성향 정당이 집권해도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움직인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선 극우 세력이 헌법기관에 대한 공격을 공공연히 자행할 뿐 아니라, 집권당이 이를 비호하고 지원한다. 이는 일반적인 극우 문제가 아니다. 극우 파시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 8일 오후 동대구역 광장에서 개신교 단체 ‘세이브코리아’가 국가비상기도회를 열고 윤석열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며 석방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신진욱 |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지난주 토요일 전광훈과 자유통일당이 광화문에서 개최한 탄핵 반대 집회를 끝까지 지켜보았다. 수만명이 모인 이 집회는 교인들과 당원들, 나라를 구하겠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같은 날 개신교 단체인 세이브코리아가 대구에서 연 국가비상기도회에는 10만명이 넘게 왔다. 풀영상을 보면 청소년과 청년들도 많이 보인다.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태극기 집회에 여러 차례 참여하여 관찰했는데, 규모는 그때도 작지 않았으나 지금 감지되는 열기는 특별하다.

무대 위 연사들은 계엄을 칭송하고, 대통령을 지키자며 헌법재판소 파괴를 외쳤고, ‘공산당’, ‘종북좌파’, ‘민주당 간첩’, ‘빨갱이 노조’를 죽이자, 처단하자 절규한다. 하지만 무대 아래 시민들은 증오의 눈빛을 하고 있지 않다. 그들에게서 전달되는 감정은 진실한 애국심과 자부심, 감격, 헌신, 그리고 두려움이다. 이처럼 광기 어린 지도자와 선한 의도의 대중이 만나 일어나는 거대한 폭력, 누구도 악인이 아니지만 인간에 대한 집단적 악행에 동참하는 비극, 그것이 바로 파시즘이다.

12월3일 우리는 이런 시간이 오리라 상상하지 못했다. 시작은 위로부터의 쿠데타였다. 그런데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윤석열은 극우 사회세력을 정치 무대로 끌어들였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극우의 차원도 넘어섰다. 극우는 위험한 존재지만 그것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정도는 다양하다. 유럽에서는 극우 성향 정당이 집권해도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움직인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선 극우 세력이 헌법기관에 대한 공격을 공공연히 자행할 뿐 아니라, 집권당이 이를 비호하고 지원한다. 이는 일반적인 극우 문제가 아니다. 극우 파시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학문적으로 파시즘의 이론은 다양하며, 개념 정의도 강조점에 따라 다르다. 그래서 어떤 현상을 놓고 파시즘이냐 아니냐를 이분법적으로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논쟁이 될 때가 많다. 그래서 그보다는 어떤 면에서, 어느 정도로 파시즘적 특성이 짙은지를 가늠해보는 것이 유용하다. 파시즘으로 불리는 많은 역사적 사례에 관한 연구들은 큰 틀에서 다음과 같은 발전 과정을 발견했다.

첫째 공동체를 위협하는 ‘적’에 대한 공포와 증오의 확산, 둘째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원하고 재건한다는 애국적 열정을 결집하는 대중행동과 조직화, 셋째 지도자들과 대중이 적으로 규정한 집단과 공공기관에 대한 물리적 공격, 넷째 보수 정치권과 기득권층의 묵인과 협력하에 정치권력 획득, 다섯째 국가기구를 장악한 뒤에 대중을 억압하는 테러독재 체제의 수립. 물론 현실은 단계적으로만 진행되지 않는다. 어떤 곳에서는 압축적이고, 다른 곳에서는 순서가 바뀐다.

한국에선 첫째와 둘째 단계인 파시즘의 사회적 토양과 잠재력은 예전에도 상당했지만, 그것은 많은 나라에서 마찬가지다. 그런데 12·3 이후 진정으로 위험한 셋째와 넷째 단계, 즉 헌법기관을 공격하고 ‘적’으로 규정된 집단에 폭력을 행사하는 수준까지 순식간에 나아갔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도 파시즘 논의가 많았는데, 그때 나는 그런 경향성에 대한 우려에 공감하면서도 당시 정치 상황을 파시즘으로 규정한 적이 없다. 하지만 12·3 이후의 전개되는 사태는 예사롭지 않다.

이 상황은 우리에게 매우 낯설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집단적 경험과 기억은 독재국가에 시민이 맞서는 구도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와 달리, 지금과 같은 사회 내의 집단적 증오와 폭력은 두렵고 혼란스러운 것이다. 우리가 국가의 폭력과 싸울 때는 사회의 보호와 지지로 힘을 얻는다. 하지만 국가폭력과 사회의 폭력이 연결되었을 때, 우리는 누구와 싸워야 할지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사회’라는 것 자체가 와해함을 느낀다.

이런 현실을 민주화 이후 거의 40년이 지난 오늘날 맞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파시즘은 민주주의와 대중정치의 정립이라는 역사적 조건 위에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독재와 국가폭력을 파시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대중의 자발성, 증오와 열정의 결집이 추가되어야 파시즘의 특질이 생긴다. 그래서 군부독재 때는 관변단체는 있지만 폭민의 광란은 없다. 파시즘은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며 역사의 창조자라는 의식 위에 탄생하는 폭력이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먹으며 민주주의를 공격한다.

그런 특성 때문에 포퓰리즘적 정서와 언어는 파시즘의 유기적 일부가 된다. 파시스트들은 민주주의, 헌정, 자유, 국민, 애국, 저항권, 혁명 같은 언어로 그들의 정체성과 행동에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그들만의’ 민주주의와 자유, 헌정이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저항과 혁명이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이 언어들의 역사적 의미를 교란하고, 오염시키며, 해체한다. 그처럼 모든 질서가 무너진 폐허 위에, 그들은 그들만이 주인인 새 나라를 세우려는 것이다.

윤석열이 극우와 손잡고 열어젖힌 문으로 쏟아져 나온 이러한 폭력적 에너지는 앞으로 정치 무대에서 부상과 침잠을 반복하며 계속 증식해갈 가능성이 크다. 어떻게 할 것인가? 미래는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한국은 오랫동안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를 위한 집합적 노력의 경험을 축적해온 나라인 만큼, 퇴행의 힘을 이겨낼 저력이 있다. 현시점에서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를 나누고 싶다.

첫째 엄격한 법집행은 파시즘의 성패를 가른 변수였다. 폭력, 협박, 선동을 관용하고 묵인하면 나중에는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다. 둘째 정당정치의 안정적 운영이 중요하다. 극단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정당과 정파가 이 문제에서 확고하게 협력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셋째 시민사회는 조직적 역량과 연대의 네트워크를 단단히 세워야 한다. 흩어진 개인들은 결집된 증오의 힘에 맞설 수 없다. 넷째 시민들은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 다양성이 대한민국의 가치임을 분명히 선포해야 한다. 모호한 상대주의와 무규범은 파시즘의 진군에 길을 터준다.

한국은 지금 미국, 유럽 등 세계의 모든 발전된 민주주의 나라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고농도로 응축하여 겪고 있다. 세계는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만약 한국이 이 국가적 위기를 잘 극복한다면 진실로 세계에 빛을 선물하는 나라가 될 것이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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