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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유죄 판결에도 거듭되는 ‘신체 재감정 요구’...길어지는 민사소송
2019년 2월1일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형사 2심 선고 공판을 방청하려던 여성들이 서울고등법원 들머리에서 경찰에 제지당하자 막아서는 이유를 물으며 법원을 향해 ‘유죄’라고 쓴 레드카드를 들어 보이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email protected]

“사람은 건물이 아닙니다. 우리(재판부)는 그(신체 재감정)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2024년 11월27일, 서울고법 민사3-3부(재판장 배용준)가 신체 재감정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피고 안희정의 변호인에게 한 말이다. 피고 쪽의 요구를 받아들여 이미 1심에서 신체 감정을 진행했고, 그 결과를 반영해 피해 정도를 산정한 바 있는데, 또다시 원고(피해자)에게 고통을 가할 것이 명백한 신체 감정을 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피고 안희정의 변호인(이장주)은 신체 재감정이 안 되면 법원 전문심리위원의 감정을 받아볼 필요가 있다며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위력에 의한 성폭력으로 형사에서 유죄가 확정된 뒤 2020년 시작한 민사 손해배상 소송이 아직 이어지는 이유다.

성폭행 인정했다가 뒤집고, 가혹한 증인신문

2024년 5월24일, 만 4년 정도를 끌었던 안희정과 충남도청을 대상으로 한 민사 손배 1심(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2부 재판장 최욱진)이 피해자 김지은씨의 일부 승소로 마무리(재판 진행 과정은 제1493호 가해자 안희정 출소했지만 피해자는 여전히 ‘재판감옥’ 참고)됐다. ‘안희정과 충청남도가 8400여만원을 공동 배상하라’는 판결이었다. 형사 유죄 확정판결을 받았음에도 손배 대상인 성폭력을 전면 부인하며 불법행위가 없었다는 피고 안희정, 그의 성폭력은 개인의 불법행위에 해당할 뿐 공무집행 중 발생한 것이라 볼 수 없어 배상책임이 없다는 피고 충남도청의 주장은 모두 배척됐다. 거기에 재판부는 안희정에게 전 배우자의 ‘2차 가해 행위(불법행위)’에 대해서도 방조 책임이 있다고 판시했다.

앞서 형사 1심 재판부는 안희정이 공론화 직후 성폭력 가해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했다가 이후 번복, 범행 사실을 부인하고 가혹한 증인신문을 한 행위에 대해 ‘피고인의 정당한 방어권 행사’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형사 2심 재판부(재판장 홍동기)가 공판 과정에서 피고인 쪽에 질타했듯, 형사 1심에서 5명의 피고인 쪽 변호인이 번갈아가며 피해자 증인신문을 16시간 동안 진행한 것은 피해자의 인격을 심각하게 침해한 것이다. 사실관계 확인을 빙자해 피해 사실에 대해 반복적으로 질문하고, 피해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하도록 강요하며, 허위사실을 들어 피해자를 모독하고, 사건과 관계없는 피해자의 사생활을 늘어놓으며 공격하는 행위가 어떻게 ‘정당한 피고인의 방어권 행사’라는 말인가?

취조형 증인신문 내몰린 성폭력 피해자들의 자살·자해

2011년 서울중앙지법에서 피해자 증인신문을 마친 성폭력 피해자가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형사재판에서 피해자 증인보호 절차가 마련되는 계기가 된 이 사건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성폭력 피해자들은 취조형 증인신문에 내몰리고, 증인신문 뒤 자살·자해 사고를 보인다. 특히 안희정 성폭력 사건은 형사재판에서 ‘피해자 괴롭히기’가 피고인 쪽 방어전략으로 자리잡은 계기가 됐고, 실제 전국 법원에서 가혹한 피해자 신문행위가 이어지고 있다. 피의자·피고인의 방어권을 두텁게 보호하는 것은 국가에 의한 인권침해에 대항하기 위한 장치이지 피의자·피고인의 권리가 피해자의 권리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이 아님에도, 한국 사법시스템에서는 여전히 방어권을 내세워 피해자의 인격권을 침해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추세다.

게다가 1심 재판부는 ‘권력형 성폭력 사건’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오히려 피해자가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공론화로 인해 확대된 추가 피해’ 정도로 인식하며 피고들(안희정, 충남도청)의 책임을 제한했다. 피해자가 얼굴을 드러내고 피해 사실을 알렸기 때문에 2차 가해가 극심해진 것이라 이에 대해서는 피해자가 감내할 지점이 있다는 취지다.

그러나 민사 2심 결심에서 피해자 쪽 변호인이 1심 재판부의 판단에 대해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달리다가 넘어진 사람에게 그건 뛰어간 네 탓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지적한 것처럼, 이 판단은 피해 사실의 외부 발화를 막고 가해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공개적으로 피해를 알린 이들을 두텁게 보호하지 않고 이를 추가·파생 피해를 공론화한 피해자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사법시스템이 보호하는 가치가 도대체 무엇인지 의심케 하는 지점이다. ‘권력형 성폭력’에서 ‘공론화’는 다양한 선택지 중 하나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유일한 방법일 뿐임에도 말이다.

결국 1심 재판부는 피고들의 책임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상식적 수준보다 훨씬 낮은 배상책임을 물었다. 이 사건이 위력에 의한 ‘권력형 성폭력’이었다는 점, 피해자가 생존을 위해 공론화 방식으로 사건을 알릴 수밖에 없었다는 점, 가족, 지인, 측근들에 의한 ‘2차 가해’가 심각했고, 피고 안희정이 이를 방조, 묵인, 협조하며 확대됐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2024년 11월8일 있었던 박재동 성폭력 사건 민사 1심(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 재판장 김창모)에서 박씨가 지인인 박아무개의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이 있다며 위자료 5천만원을 지급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는데, 이와 비교해도 안희정 민사 1심의 판단은 피해 회복이나 일상 재구성을 위한 보상으로 불충분했다.

1심 선고 후 피해자는 항소 여부를 두고 고심했다. 소멸시효로 인해 민사소송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형사 유죄 확정까지 기다려 뒤늦게 소송을 시작했지만, 피고들의 각종 기록에 대한 사실조회 남발, 감정 요구, 재감정 요구에 이어 신체 감정까지 감내하며 4년 동안 이어진 민사 1심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싸움이 긍정적 의미의 선례로 남아 다른 피해자들에게 힘이 돼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항소했다. 피고인의 방어권은 피해자 보호와 충돌하는 가치가 아니며, 소송절차에서 피해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사법시스템의 지향점이 돼야 함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형사에 이어 민사 재판 과정에서도 진행 중인 가해자와 측근, 지지자들의 ‘조직적·집단적 2차 가해’의 현실을 알리고, 그런 추가·파생 가해가 ‘박제’의 방식으로 온라인에 떠도는 현실에 대해서도 사법시스템이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확신을 주고 싶어 했다.

벌써 7년… 언젠간 피해자가 일상 누리길

그렇게 시작한 민사 2심에서 피고 안희정 쪽이 또다시 신체 감정을 신청하고 부대항소를 하며 불법행위(성폭력) 자체를 부인한 것이다. 이런 식이면 어떤 성폭력 피해자가 ‘법대로’ 피해를 인정받으려 싸울 수 있단 말인가. 소송절차가 그 자체로 추가·파생피해로 이어지는 상황을 감내해야 할 뿐만 아니라 설령 이를 감내하더라도 그 결과가 피해 인정 및 보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어떤 피해자가 시스템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피해자임을 인정받기 위해, 보상받기 위해, 피해자의 말은 막히고, 시간은 과거에 멈추고, 자리는 빼앗기는 현실이 언제까지 이어져야 하는가.

1월22일 수요일 오후 4시, 서울고등법원 동문 앞에 전국에서 10여 명의 연대자가 모였다. 평일 오후 재판, 급하게 올린 방청연대 신청폼, 그럼에도 이들은 자신의 시간을 할애해가며 광주, 전북, 충청, 경기 등 다양한 곳에서 피해자와 연대하기 위해, 재판을 감시하기 위해 온 것이다. 민사 재판 소식을 듣고 자발적으로 온라인 탄원서·연서명(참여 인원 3655명, 단체 54곳)을 받아 당일 제출한 비호(비혼호남여성모임)까지 포함한 방청연대자들을 대상으로 짧게 교육한 뒤 법정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피고 안희정 쪽은 신체 재감정 철회 의사를 묻는 재판부에 ‘(피고의 자진) 철회가 아니라 (재판부가) 기각해달라’며 피해자 괴롭히기 전략을 끝까지 고수했다. 재판부가 신체 재감정 신청 건을 기각하고, 피해자 변호인이 항소 이유에 대해 설명하면서 재판은 마무리됐고 3월12일 선고를 앞두고 있다.

2018년 봄, 김지은씨를 만났던 그때로부터 벌써 만 7년 정도가 흘러가고 있다. 그가 편하게 일상을 말하고, 그의 시간이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로 향하며, 그를 위한 자리가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그래서 3월에도 시민들과 함께 법원을 찾을 것이다.

마녀 D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마녀 D는 성폭력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찾아가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3주마다 연재.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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