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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령 | 글·사진 최재원 여행작가

대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재현해 조성한 관광지 대가야생활촌.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산책로를 따라 다양한 꽃과 수목을 감상하며 걷다 보면 이곳의 하이라이트인 금산폭포까지 만날 수 있는 자연휴양림 ‘대가야수목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이지만 땅은 모든 시절을 기억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오래전에 어떤 모습이었을까. 어떤 이가 머물고, 어떤 것들이 존재했을까. 땅이 세월을 기억하는 곳, 고령이 그렇다. 억겁의 세월이 새겨진 땅에 나의 발자국으로 찰나를 덧붙여 본다.

삼국 말고 사국, 높고 신령한 땅

1등만 기억하는 세상이라지만 무려 3등까지 기억하는 관대한 시절이 있었다. 삼국시대 이야기다. 광활한 영토를 지녔던 고구려, 일본에 불교를 전파한 백제, 삼국을 통일한 신라. 차마 어느 하나를 1등이라 꼽을 수 없을 만큼 찬란했던 모두가 그 시절의 주인공이었다. 그런 시절에 삼국의 그늘에 가려진 국가가 있었다.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한 고구려, 백제, 신라와 달리 멸망할 때까지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 못했던 ‘가야’의 이야기다. 역사는 당시를 사국시대가 아닌 삼국시대라 칭한다. 가야에겐 좀 서운한 일이다. 중앙집권국가를 이루진 못했지만, 가야연맹이란 정체성을 확립했고 조선왕조 518년보다 2년이나 긴 520년의 오랜 역사를 지녔기 때문이다. 또한 ‘철의 왕국’으로 기억될 만큼 막강한 시절도 있었다.

이렇듯 한반도 고대사의 주역이었음에도 가야는 늘 역사의 중심에서 한발 물러나 있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역사서인 <삼국사기>마저도 가야에 관한 기록엔 인색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렇게 오랜 세월 변방의 역사로 기억되던 가야에도 봄이 찾아왔다. 가야가 멸망한 지 약 1500년이 흐른 2023년, 마침내 가야는 ‘가야 고분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며 존재감을 되찾았다. 연맹국이었던 자신의 정체성을 전 세계에 포효하듯 한반도 남부 지역에 존재했던 7개의 고분군을 한데 모아 연속유산으로서 이름을 올렸다.

그중 하나인 고령의 지산동 고분군은 가야 지역 최대 규모의 고분군으로 꼽힌다. 대가야의 ‘진산’ 역할을 하던 주산의 남동쪽 능선을 따라 약 700기의 봉토분이 분포되어 있으며 큰 무덤 주변으로 조성된 작은 무덤까지 포함하면 그 수가 수만기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역사가 홀대해도 땅이 새겨놓은 ‘높고 신령한 땅’ 고령(高靈)의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있다.

‘대가야’라는 브랜드

대가야박물관


고령은 일명 대가야로 불리던 반파국의 중심지였다. 사실 고령이란 지명은 대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후 경덕왕 때부터 불리게 된 것이므로 대가야와는 무관하다. 이에 고령군은 지역의 가치를 높이고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2015년 4월2일, 고령읍의 명칭을 대가야읍으로 바꿨다. 42년에 건국된 대가야가 재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0년이 흐른 지금, 고령군청을 중심으로 한 대가야읍은 대가야라는 브랜드로 빛나고 있었다. 지산동 고분군 바로 아래에 있는 대가야박물관이 대가야 브랜드의 핵심이다. 지산동 고분군에서 발굴된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2005년 4월2일 개관된 곳이다. 대가야박물관은 크게 대가야역사관과 왕릉전시관으로 나뉘어 있다. 대가야역사관은 고령의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으며 왕릉전시관은 지름 37m, 높이 16m의 대규모 순장 무덤인 지산동 고분군 44호를 그대로 재현하여 전시하고 있다. 그 옆으로 가야금을 창제한 우륵의 이름을 딴 우륵박물관이 2025년의 대가야를 함께 대표하고 있다.

그 밖에도 대가야를 배경으로 한 대가야역사테마관광지가 정적인 분위기를 환기하듯 대가야박물관을 마주하고 있다. 대가야유물체험관, 가마터체험관 등 체험시설을 제공하고 여름철엔 물놀이장을 개장하여 어린이의 흥미를 높이고 캠핑과 펜션 등 숙박시설을 함께 운영하여 가족 단위 방문객의 접근성을 높였다. 인근의 대가야 생활촌 역시 대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바탕으로 재현된 관광지다. 상가라도못을 중심으로 조성된 민속촌에선 대가야의 생활상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가볍게 산책하기에 좋다.

원래 박물관과 관광지, 생활촌 모두 입장료가 있었지만, 가야 고분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을 기념하여 현재는 모두 무료 입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만사에 때가 있다면 지금은 대가야에 가야 할 때다.

대가야의 2000번째 봄

금산폭포


대가야읍을 기준으로 서쪽에 주산이 있다면 동쪽엔 금산이 있다. 매일 대가야읍의 아침을 여는 금산 자락의 대가야수목원을 찾았다. 2008년에 개원한 대가야수목원은 고령을 대표하는 자연 휴양림이다.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이 환영 카펫을 대신한다.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와 쉼터가 마련되어 있는 분수광장과 조형물광장을 지나자마자 빼곡한 수목이 펼쳐진다. 이후 이어지는 오르막을 따라 대가야수목원 끄트머리에 있는 금산폭포를 향해 사부작사부작 걸어본다. 중간중간 벚나무 숲길, 덱 로드 등 다양한 산책로가 있지만, 어디로든 금산폭포와 연결되므로 발길에 몸을 맡겨도 좋다. 산책로 곳곳에 분경·분재관, 암석원, 미로원, 산림녹화기념관 등이 마련되어 볼거리를 선사하는데 그중에서도 산책로에서 만나는 다양한 꽃과 수목은 대가야수목원을 걷는 궁극적인 즐거움이다. 개화 시기가 6~7월인 수레국화와 장미는 벌써 만개하여 다가오는 여름을 기다리고 있다.

초록빛 여정의 끝엔 금산폭포가 있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폭포를 보는 것만으로도 반가운 걸 보니, 확실히 여름이 가까운 모양이다. 비록 인공폭포지만, 대가야수목원 주차장에서부터 단박에 눈길을 사로잡던 금산폭포는 대가야수목원의 하이라이트다. 그 이유는 폭포 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대가야읍의 탁 트인 전경. 대가야읍과 그곳을 병풍처럼 둘러싼 지산동 고분군의 모습이 고령의 현재와 과거를 함축한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좋았다

철제용품


‘가는 날이 장날’, 일을 보러 가니 공교롭게 장이 서는 날이라는 뜻의 속담으로, 주로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부정적인 상황에 쓰인다. 개인적으로는 그 반대의 의미로 사용하는 편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면 얼마나 좋은가. 특히 여행지에선 더욱 그렇다. 그런데 마침 방문한 날이 대가야읍의 장날이었다.

대가야시장은 대가야읍의 중심에 있는 시장으로 평소에는 상설로 운영되지만 매월 4, 9, 14, 19, 24, 29일에 오일장이 함께 열리는 전통시장이기도 하다. 장날이 되면 고령 시민은 물론이고 인근의 대구, 합천, 구미 등에서도 장을 보러올 만큼 활기를 띤다.

철의 왕국으로 불리는 대가야의 이름을 딴 시장답게 가장 먼저 마주한 물품은 철제용품이다. 옛날 방식으로 농기구를 직접 제작하는 대장간부터 제기, 향로, 촛대 등 제사용품이 대가야의 후손임을 대변한다.

고령 특산물로는 진상미인 고령옥미, 전국 최대 생산량을 자랑하는 향부자, 당도가 뛰어난 고령 딸기 등이 있다. 옛날 방식으로 갓 튀겨낸 통닭과 떡볶이, 순대, 튀김 등 분식과 꽈배기, 군밤 같은 간식도 시장에서 뺄 수 없는 존재다.

수구레국밥


정신없이 시장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배꼽시계가 울린다. 점심 식사로 뭐가 좋을까? 시골장에서 맛보는 국밥이 눈에 띈다. 돼지국밥, 추어탕, 선짓국, 육개장 등 종류도 다양하다. 아니면 고령을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인 수구레는 어떨까?

수구레는 소의 가죽과 살 사이에 붙은 피하조직이다. 돼지로 치면 껍데기인 셈이다. 쫄깃하게 씹히는 맛이 일품인 수구레는 주로 선짓국에 국수를 말고 수구레 볶음을 얹은 수구레국밥으로 먹는다.

배가 부르니 장을 둘러보는 재미가 배가 되고 그 시절의 추억을 마주한 마음은 풍요롭기 그지없다. 시각과 청각, 후각, 미각이 골고루 향수에 젖었다고나 할까. 나에게 장날은 오감이 호강하는 날이다. 사람 냄새 그득한 전국의 전통시장이 오래도록 이어지길. 고령에 다시 가는 날 역시 장날이었으면 좋겠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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