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 속 대피하지 못한 생명들
'묶여 있었고, 갇혀 있었고, 결국 타들어간'
대부분 죽거나, 살아도 치료는 포기
후원자와 단체에 기댈 뿐 제도는 부재
'묶여 있었고, 갇혀 있었고, 결국 타들어간'
대부분 죽거나, 살아도 치료는 포기
후원자와 단체에 기댈 뿐 제도는 부재
지난 2일 서울 강남구 VIP동물의료센터 청담점에서 의료진이 대풍이의 화상 부위를 치료하고 있다. 대풍이는 지난 3월 경북 청송군 괴정리 산불 현장에서 구조됐다. 하상윤 기자
잿빛으로 뒤덮인 마을 한편에서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던 ‘대풍’(2세 추정·수컷)은 홀로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눈앞 세상이 모조리 화염에 녹아내린 이틀 동안, 개는 목줄에 묶인 채 ‘주인’을 기다렸다. 몸 이곳저곳에 불똥이 옮겨붙을 때마다 바닥에 뒹굴었지만, 곧 타들어간 살가죽 아래로 뼈와 근육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잿더미 위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이 생명은, 취재 중이던 기자의 제보로 동물권단체 ‘케어’의 도움을 받아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로부터 한 달, 대풍이처럼 구조된 반려동물들은 전국의 병원에 흩어져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다. 불길은 멈췄지만, 고통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산불 이후, 이들의 시간을 들여다봤다.
지난 3월 27일 경북 청송군 괴정리의 한 과수원에서 대풍이가 전신 화상(3도)을 입은 채 엎드려 있다. 대풍이는 전체 피부의 50%에 화상을 입었고, 다발성 장기 부전 위험에 놓인 상태다. 기자의 제보로 동물권단체 ‘케어’의 도움을 받아 병원으로 옮겨져, 현재는 서울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청송=하상윤 기자
지난 2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위치한 VIP동물의료센터에서 대풍이를 다시 만났다. 붕대로 온몸을 감싼 대풍이는 네 명의 의료진으로부터 상처 부위 소독을 받는 중이었다. 진물이 배어나온 등과 엉덩이에는 붉은 화상 부위가 드러났고, 하얀 거즈와 연고가 그 위로 천천히 덧대졌다. 녹아내린 두 귀와 타버린 콧잔등은 참혹했던 지난 시간을 말해주고 있었지만, 대풍이는 치료 도중에도 곧잘 꼬리를 흔들었다.
지난 2일 서울 강남구 VIP동물의료센터에서 대풍이가 화상 치료를 마친 뒤 입원실에 누워 있다. 하상윤 기자
주치의인 정준용 응급중환자의학과장은 “화상 부위가 전체 피부의 50%에 이르고, 장기 손상이 동반돼 처음 내원했을 당시 안락사를 고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면서 “다행히 치료 경과가 좋아 통증이 처음보다 크게 완화했고, 3도 화상 부위를 중심으로 피부 이식 수술을 앞두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병원 측은 사회공헌 차원에서 대풍이의 치료·입원비 전액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지난 2일 서울 강남구 VIP동물의료센터 옥상 정원에서 진희정 피부과장이 대풍이와 산책을 하고 있다.
불길에 휩싸인 건 마당에 묶여 있던 개들만이 아니었다. 경북 안동의 한 개농장에서는 사육 중이던 개 700여 마리가 뜨겁게 달아오른 철창(뜬장) 안에 갇힌 채 불에 타 죽었다. 그중 극적으로 살아남은 '대단'(1세 추정·암컷)과 '대범'(2세 추정·암컷)을 각각 청주와 평택의 병원에서 만났다.
지난 4월 경북 안동시의 개농장에서 구조된 대범이가 충북 청주시 이음동물의료센터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 대범이는 전신 화상을 입은 채 약 12일간 굼주리다 단체에 구조됐다. 이인선 테크니션 제공
지난 4월 30일 충북 청주시 이음동물의료센터에서 이인선 테크니션이 대범과 함께 셀피를 촬영하고 있다. 청주=하상윤 기자
사람 손을 타본 적도, 간식을 받아본 적도 없는 사육견들은 처음엔 낯선 기척에 이빨을 드러내거나 구석에서 웅크리고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그들은 의료진에게 먼저 다가와 얼굴을 기대고, 꼬리를 흔들고, 간식을 조르기도 하며 천천히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산불 현장에서 구조된 엉꿍이가 내원 초창기인 지난 3월 27일 의료진을 경계하며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지난 4월 30일 충북 청주시 이음동물의료센터에서 이다희 테크니션이 화상치료를 마친 엉꿍이와 얼굴을 맞대고 있는 모습이다. 이인선 테크니션 제공·하상윤 기자
동물권단체 케어의 영상을 본 뒤 후원자로 나선 A씨는 1,300만 원이 훌쩍 넘는 대단이의 치료비를 모두 부담하고, 입양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대단이의 치료를 맡은 소현석 24시라움동물의료센터 외과원장은 “여전히 동물들이 중요한 순간마다 소외되고 있음을 느낀다”라며 “보호자들이 치료가 필요한 강아지들을 포기하지 않도록 정책적인 안정화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지난 4월 안동의 개농장에서 대범과 함께 구조된 대단이가 지난 7일 경기 평택시 24시라움의료센터에서 퇴원을 앞두고 후원자 A씨 품에 안겨 있다. A씨는 2,000여만원에 이르는 대단이과 강이의 치료비를 후원했다. 평택=하상윤 기자
지난 7일 경기 평택시 24시라움의료센터에서 한달 동안 대단이를 담당했던 테크니션이 퇴원하는 대단이를 위해 습관과 취향 등을 꼼꼼히 기록한 편지를 보호자에게 전달하고 있다. 평택=하상윤 기자
대범이를 포함해 총 6마리의 치료를 맡아 비용 전체를 지원하는 이음동물의료센터는 동탄과 청주, 포함 지점에서 각각 2마리씩 돌보고 있다. 손수진 이음의료센터 동탄점 원장은 “재난 상황에서 동물들이 입은 물리적 상처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 또한 나아지고 있는 걸 보며 보람을 느꼈다”면서 “이들이 다시 열악한 환경(개농장)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입양 절차까지 잘 마무리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지난 4월 경북 포항시 이음동물의료센터에서 최예림 테크니션이 전신 화상(3도)으로 제대로 서지 못하는 철수의 화상 치료를 위해 함께 바닥에 누워 있다. 이음동물의료센터 제공
이번 산불에서 총 42마리의 동물들을 구출한 케어의 활동가 박소연씨는 “재난 상황에서 방치된 동물들이 기댈 수 있는 건 개인과 시민단체의 선의뿐이다”면서 “이번 산불 때는 감사하게도 후원자와 후원 의료기관이 나타나 여러 동물들이 제때 화상 치료를 받을 수 있었지만, 이 또한 한계가 분명하기에 제도적 대응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지난 1일 경북 포항시 이음동물의료센터에서 철수가 화상치료를 받고 있다. 치료를 맡은 손수진 원장은 "화상이 매우 깊고 초창기엔 피를 많이 토해서 우리 곁을 영영 떠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나, 다행히 상태가 호전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현행 제도 아래에서 재난이 발생했을 때 반려동물이 대피소에 함께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재해구호법이 구호 대상을 ‘국민’으로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정안전부의 재난 대피소 운영 지침에도 ‘반려동물은 대피소에 데려갈 수 없다’는 조항이 명시돼 있다. 2020년 농림축산식품부가 수립한 제2차 동물복지 종합계획에는 재난 상황에서의 반려동물 대피시설 마련과 대피 가이드라인 제정 방안이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올해 3월 발표된 제3차 종합계획에서는 이 내용이 완전히 빠졌다. 동물복지의 큰 방향을 제시하는 정책에서조차 재난 시 동물의 생존을 위한 구체적인 대책은 사라진 셈이다. 2023년 발의된 재해구호법 개정안에는 반려동물 임시보호소 마련과 대피 정보 제공 의무가 담겼지만, 해당 법안은 여전히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재난 상황에서 동물은 법과 제도의 바깥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생존을 감당해야 한다.
화염이 휩쓸고 지나간 뒤 동물들의 얼굴에 참상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귀와 콧잔등이 검게 탔고, 각막은 하얗게 변했고, 수염은 녹아 없어졌다. 첫째 줄 왼쪽부터 안동(이음동물의료센터 동탄), 대풍(VIP동물의료센터 청담), 삐삐(헬릭스동물메디컬센터 서초). 둘째 줄 왼쪽부터 코코(이음동물의료센터 동탄), 꼬불(이음동물의료센터 청주), 대단(24시라움의료센터 평택). 셋째 줄 왼쪽부터 철수(이음동물의료센터 포항), 강이(고려동물메디컬센터 청주), 엉꿍(이음동물의료센터 청주). 청주·평택·포항·화성=하상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