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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여명 피눈물 전세사기 정씨 일가
5년 만에 빌라 등 46동, 788세대 매입
자기자본 없이 대출·보증금으로 '돌려막기'
깡통 전세 내놓고 "안전해" 허위 정보
전세금 반환 노력 없이 흥청망청 탕진
재판부 "1명 자살, 남의 돈으로 어떻게"
2023년 10월 17일 경기 수원시 팔달구의 한 다세대주택 앞 도로에서 택시에 탄 '수원 일가족 전세사기' 사건 피의자 정모씨 등이 세입자들에게 막히자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연합뉴스


"지옥에나 가라. 이 XX야."


지난해 12월 9일 경기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법 형사법정에 울분 가득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김수정 형사11단독 판사가 700억 원대 전세사기를 저질러 기소된 정모(61)씨에게 사기죄에 가중처벌을 더한 법정최고형인 징역 15년을 선고하자 방청석에 있던 피해자 중 한 명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울부짖기도 했다. 김 판사는 "과연 준법정신이 있는 것인가"라며 정씨와 공범인 그의 가족을 향해 호통쳤다. 이날 정씨 아내 김모(55)씨와 아들(31)에게도 징역 6년과 징역 4년이 각각 선고됐다. 판사도 혀를 내두른 이른바 '수원 일가족 전세사기 사건'은 사회 초년생 수백 명을 경제적으로 착취했다는 점에서 충격을 던졌다.

무자본으로 빌라 등 788가구 사들여



9일 정씨 일가 1심 판결문과 검찰 등에 따르면 정씨와 그의 아내 김씨가 경기 수원시와 화성시에서 집을 사 모으기 시작한 건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단순 시세차익이 목적이었다. 자기자본 없이 은행 대출금과 임차 보증금을 손에 쥔 채 이른바 무자본 갭투자 방식으로 빌라와 오피스텔을 사들이다 신축 건물에도 손을 대는 등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해 갔다.

대출한도 등의 이유로 추가 대출이 막히자 감정평가사인 아들을 끌어들이고 자본금 가장(假裝)납입 방식으로 18개의 임대법인도 세웠다. 여기에 공인중개사사무소 3곳도 마련했다. 정씨는 법인 총괄 대표로, 아내는 이사로, 아들은 '소장' 직함으로 각각 임대계약과 시설관리 업무를 나눠 맡았다.

이들은 부동산 경기 호황에 힘입어 주택 수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렸다. 임대업에 발을 들여놓은 지 5년 만인 2023년 10월 빌라와 오피스텔 등 건물 46동, 788가구를 본인들과 법인 명의로 돌려놨다. 주택을 쓸어 담으면서 은행에서 끌어온 대출 규모는 2021년 1월 370억 원에서 2023년 10월 744억 원까지 2배 증가했다. 덩달아 매달 내는 대출이자도 같은 기간 1억6,000만 원에서 4억 원으로 폭증했다. 법인 운영비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부동산 관련 세금만 한 해 36억 원을 내고 공인중개사 등 직원 월급으로 매월 수천만 원을 썼다.

지난해 12월 14일 경기 수원시 영통구 경기도청 브리핑룸에서 고중국 경기도 토지정보과장이 정씨 일가 등의 전세사기 피해 관련 불법 중개행위 수사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뉴스1


무리한 사업 확장, 사기 범죄의 길로



금융 부담에 운영비가 폭발적으로 불어나자 자연스럽게 범죄의 길로 빠져들었다. 이들은 주택가격 상승세가 꺾인 2021년 은행 대출금과 임차보증금 합계가 이미 매매가(시세)를 넘어섰는데도, 이를 고지하지 않은 채 이른바 깡통 전세를 계속 내놓으며 임대인들을 끌어모았다. 법원은 2021년 이미 이들의 임대 목적물 주택들의 잔존가치가 0원에 가까웠던 것으로 봤다.

채무 초과 상태에 빠져 임대보증금을 되돌려줄 수 없던 시기인 2021년 1월 이후에도 정씨 일가는 임대계약을 이어가 결국 500명이 넘는 임차인에게 760억 원 상당의 경제적 피해를 입혔다. 다만 경매 개시가 이뤄지면 350억 원 정도는 주택임대차보호법상 최우선변제권으로 담보돼 있어 실질적으로 편취한 금액은 310억 대로 추산됐다.

법원은 "계획범죄가 명백하다"는 검찰 주장도 받아들였다. △임대법인이 완전 자본잠식 상태에 빠져 보증금 돌려막기 외 보증금 반환 방법이 없었고 △은행 대출 채무와 임대보증금 반환 채무 합계가 이미 건물 가액을 넘어 보증금을 되돌려줄 여력이 없었는데도, 이를 제대로 고지하지 않은 채 임차인들을 기망하거나 속였기 때문이다.

임차인의 재산을 보호해야 할 공인중개사도 범행에 가담했다. 정씨 일가에 고용되거나 중개를 의뢰받은 공인중개사와 중개보조원 10여 명은 임대차계약 당시 "임대인의 자본력이 충분하다. 안전하다"는 식으로 바람잡이 역할을 했다. 다세대주택 건물 일부 호실에 설정된 공동담보(쪼개기 담보)를 건물 전체 공동담보인 것처럼 담보 규모를 축소해 알리거나 기존 임대차보증금 반환채무액 규모(선순위 보증금) 역시 축소해 고지했다. 담보대출과 전세보증금이 매매가에 육박해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위험성은 누구도 귀띔하지 않았다. 정씨가 내놓은 보증금 1억 원 내외의 소형 빌라 등은 결국 경제적으로 취약한 20, 30대 사회 초년생과 신혼부부 등 청년들이 끌어안았다가 피해를 봤다.

김 판사는 "경제 침체나 주택 정책 변경 등 임대사업에 불리한 리스크 관리 대책을 전혀 마련해 두지 않았다"며 "남의 돈을 받아서 이렇게 사업하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고 꾸짖었다.

경기도전세피해지원센터 내 부스에서 피해자 상담이 진행되고 있다. 기사와는 직접 관련 없음. 경기주택도시공사 제공


피 같은 청년들 전세보증금 받아 '흥청망청



1심 재판부가 주범인 정씨에게 형법상 사기죄의 법정형(징역 10년 이하)에 따른 혐의(공인중개사법 위반 등)를 합쳐 형을 정하는 경합범 가중으로 법정최고형을 선고한 것은 조직적·계획적 사기 범행의 죄질이 불량하고 그 폐해가 심각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들은 임차인 511명으로부터 받은 전세보증금 760억 원(검찰 기소 기준)을 안정적으로 되돌려주려는 자금관리 계획을 전혀 마련하지 않았다. 수백억 원의 전세보증금을 주무르면서 경리 직원 한 명 두지 않은 채 십여 개의 법인을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했다.

청년 세입자들의 피 같은 전세보증금을 흥청망청 탕진한 사실까지 드러났다. 정씨는 임차인들을 속여 손에 쥔 전세보증금으로 경기 양평군의 30억 원 상당 토지를 매수했다. 프랜차이즈 사업과 태양광 사업에도 각각 12억 원과 2억5,000만 원을 투자했으나 수익은커녕 투자금도 제대로 회수하지 못했다.

대출 규모가 걷잡을 수 없이 불어 임대사업이 어려워지기 시작한 2022년부터는 재산을 은닉하려는 시도도 포착됐다. 이들은 당시 17개 임대법인의 법인카드로 대형마트에서 상품권을 구입한 뒤 속칭 상품권깡으로 1억360만 원을 현금화하는 등 법인 자금 15억 원을 빼돌린 것으로 파악됐다. 또한 법인 계좌에서 임의대로 돈을 인출해 쓰기도 했다. 특히 정씨는 보증금으로 챙긴 범죄 수익금 중 13억 원을 모바일 게임 계정과 캐릭터, 아이템을 구매하는 데 쓰며 취미 생활도 즐겼다.

전세사기 조직도. 경기북부경찰청 제공


전문가 "맘먹고 허위 공시 못 당해, 임차권 등기 의무 시급"



김 판사는 "투자 사기 등 여타 사기 범행과 달리 임대차보증금은 서민에게 전 재산과 다름없고, 주거 안정과도 직결돼 이 사건 범행으로 인한 피해는 임대보증금 합계액 이상"이라며 "거액의 카드깡을 통해 재산 은닉을 시도한 정황까지 보여 범행 이후의 정황도 좋지 않다. 과연 피고인에게 준법 의식이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피해자 중 한 명은 피고인들 범행이 드러나 임대차보증금을 돌려받기 어려울 것이라는 걸 알게 된 후 목숨까지 끊었다"고 일갈했다.

실제 정씨 일가의 사기 행각이 드러난 2023년 9월 이후 이들과 임대차 계약을 맺은 20대 임차인이 보증금을 떼일 수 있다는 불안감에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자살을 하거나 보증금 마련을 위해 끌어 쓴 대출의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파산의 길로 접어드는 임차인 피해가 속출한 이 사건은 현재 항소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정씨 일가를 도와 허위 공시로 임대 물건을 중개한 공인중개사들에 대한 수사와 재판도 이어지고 있다.

김성구 경기도전세피해지원센터 법률 상담위원(법무사)은 "수원 정씨 일가 사건처럼 공인중개사까지 동원해 중개 대상물의 재정 상태를 허위로 현혹시킨다면 누구든 속아 넘어간다"며 "등기부등본에 임차권(전월세) 상태를 명시하도록 법률 개정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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