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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곤 편집인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서울 한남동 관저를 떠날 때 개선 장군 같았다. 계엄이란 대형 사고를 치고 쫓겨나는 모습은 아니었다. 사죄와 승복의 메시지는 한마디도 없었다. 임기를 못 채운 것에 대해 “어차피 5년 하나 3년 하나”라고 말했다.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정신세계의 밑천을 드러내는 낯 뜨거운 발언이다. 얼마 전에는 지지층을 항해 “여러분 곁을 지킬 것”이라고 했다. 자신의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처지에 누가 누구를 지킨다는 건가. 극우에 둘러싸여 크게 착각하는 것 같다. 냉엄한 현실을 애써 외면하거나. 기괴한 상황 인식, 끝없는 자기 합리화를 지켜보면서 ‘정말 위험한 사람에게 나라를 맡겼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통 않고 자질 부족…인사도 실패
겸손·절제·배려·포용·책임 못 갖춰
잘 모르고 뽑았다가 큰 대가 치른 셈
보수, 윤과 절연하고 새로 시작해야

그가 드라마틱하게 대통령이 됐다가 퇴장하는 사이 나라는 더 쪼개졌다. 국정은 엉망이 됐다.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첫째, 대통령을 잘 알고 뽑아야 한다. 엄청난 권한이 주어지는 만큼 검증된 사람이 필요하다. 선한 마음을 갖고 시작해도 권력을 잡으면 달라지는 게 사람이다. 됨됨이가 중요하다. 윤 전 대통령을 뽑을 때 지도자의 덕목을 갖췄는지 따져보지 않았다. 잘 모른단 불안감은 선거판 환호에 묻혔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근사한 말에 속은 셈이다.

윤석열 대세론이 굳어지자 모든 게 좋게 보였다. 그가 술을 즐기고 잘 어울린다는 소식이 들렸다. 따르는 후배가 많고, 보스 기질도 있다고 했다. 박근혜·문재인이라는 불통 대통령을 겪은 터라 지도자의 호방한 기질에 목말라 있었다. 옛말에 술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 없다고…. 국민은 그걸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대선 TV토론에서 손바닥에 ‘임금 왕(王)’ 자를 쓰고 나와 의아했지만, ‘그럴 수도 있지’라고 넘겼다.

김건희 관련 구설도 선거판에서 나오는 흑색선전쯤으로 깎아내렸다. 흠이 있어도 대선에서 이기고 나면 대통령 부인답게 처신할 것으로 기대했다. 대통령 배우자가 설쳐 봐야 얼마나 심하겠느냐고 생각했다. 겪어 보니 그게 아니었다. 아무도 막지 못했다. 윤 전 대통령은 김건희를 집권 내내 감싸고 돌았다. 공사 구분, 사리 분별이 안 됐다. “극단으로 치닫는 사회에는 충동적이고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단절된 리더가 있다. 한국은 리더를 잘 몰라 대가를 치렀다.”(스티브 테일러 영국 리즈베켓대 교수)

둘째, 소통하지 않는 대통령은 실패한다. 임기 첫해에 의욕적으로 도어스테핑(출근길 문답)에 나섰다가 중도 하차했다. 기자들의 오만 가지 질문을 견뎌낼 정도의 인내심이 없었다. 평생 갑의 입장에서 피의자를 윽박지르며 살아서 그런지, 자신을 낮추고 경청하며 설득하는 재주가 없었다. 회의에서 90% 이상 혼자 말했다. 격노했다는 소식이 자주 들렸다. 대통령에게 직언하거나 뜻에 반하면 눈 밖에 났다. 측근도, 친구도 순식간에 잘려나갔다. 거칠고 무서운 지도자였다. 화를 못 참으면 국가는커녕 가정도 지키기 어려운 게 세상 이치다.

셋째, 철학과 소양을 갖추지 않은 대통령은 실패한다. 집권 3년 내내 독단적·즉흥적 정책이 이어졌다. 혼돈의 연속이었다. 대선 때는 공정경제를 내세웠다. 취임사에선 자유를 강조했다. 2023년부터 반국가 세력을 척결하겠다며 극우 유튜버와 궤를 같이했다. 진보 정부 검찰총장을 지내고, 보수 대통령이 되더니 이내 극우로 치달았다. 불과 4~5년 사이에 이념 스펙트럼이 저렇게 급변할 수 있나 싶을 정도다. 생각의 뿌리가 깊지 않고, 마음의 중심이 흔들려서 벌어진 일이다. 천공, 건진법사 같은 해괴한 역술인에 미혹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부족함을 채우려면 사람을 잘 써야 하는데 적재적소, 탕평 인사는 없었다. 학연·출신·인연으로 그들만의 참호를 쌓았다. 서울대 법대와 검사를 대놓고 중용한 건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쓰겠다는데 뭐가 문제냐’는 오만함이 깔려 있다. 공부하는 머리와 살아가는 머리가 다르고, 다양성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습게 여긴 것이다. 김건희 주변에는 소소한 모임, 사업에서 만난 정체불명의 사람이 모였다. 대부분 국정 경험이 없거나 수준이 떨어지는 2류, 3류였다. 인사에 원칙이 없고, 허술하다는 점을 간파한 아첨꾼이 불나방처럼 꼬였다. 그렇게 줄을 댔거나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 부끄럽지 않은가.

보수의 가치는 겸손·절제·배려·포용·책임이다. 이 기준으로 보면 윤 전 대통령은 보수를 대표할 자격이 없다. 보수가 살아남으려면 당장 그와 절연해야 한다. 극우와 사이비를 털어내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 차제에 보수의 가면을 쓰고 자기 장사하는 사람, 극우에 구걸하는 정치인도 그만 봤으면 좋겠다. 윤상현 의원이 “절연보다 무서운 게 분열”이라며 윤 전 대통령을 감쌌다. 무슨 미련이 남아 그를 안고 가자는 건가. 일각에서 나오는 ‘윤석열 신당’은 턱도 없는 얘기다. 뭔가 도모하면 더 불행해질 것이다. 그는 탄핵당해 재판 중인 전직 대통령이다. 실패한 대통령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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