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도 없이 강제수용, 엄마와 생이별
건물 공사에 임야 개간, 밭일 등 강제 노동
폭력, 성폭행 등에도 경찰·구청 도움 못 받아
"죽다가 살아남았지만 살아도 사는 게 아냐"
건물 공사에 임야 개간, 밭일 등 강제 노동
폭력, 성폭행 등에도 경찰·구청 도움 못 받아
"죽다가 살아남았지만 살아도 사는 게 아냐"
4일 부산 수영구 자택에서 만난 덕성원 피해생존자협의회 대표 안종환씨가 어린 시절의 처참했던 삶에 대해 털어놓고 있다. 부산=권경훈 기자
오래전 일이지만 덕성원을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돋고 그때 헤어진 어머니 생사도 모른 채 고통 속에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지난 4일 부산 수영구 자택에서 만난 덕성원 피해생존자협의회 대표 안종환(48)씨는 치를 떨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린 시절 아동복지시설인 덕성원에서 겪었던 지옥 같은 삶은 쉰 살이 다 되도록 안씨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의 왼쪽 팔뚝에는 당시 맞아서 생긴 큰 흉터가 여전히 남아 있었고, 정수리와 눈 옆에도 폭행의 흔적이 보였다. 안씨는 "말도 마라. 너무 억울하다"며 "관련 법이 제정돼 피해자들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가 언급한 법안은 김미애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해 12월 대표 발의한 '부산 덕성원 피해사건 진상규명과 피해자 지원에 관한 법률안'이다. 1953년 12월 5일부터 2001년 3월 5일까지 부산 동래구 중동(현 해운대구 중동) 덕성원에서 벌어진 폭행과 협박, 감금 등에 대한 진상규명과 강제수용됐던 피해자 및 유족의 명예 회복, 의료지원금과 생활지원금 등 보상 방안을 담은 법안이다.
앞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는 지난해 10월 덕성원 사건을 중대한 인권침해로 판단하고 진실 규명 결정을 했다. 국가에는 피해자들의 기본권과 인권침해에 대한 관리·감독 소홀 및 묵인·방조한 점을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피해 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 등을 권고했다. 진화위는 신청인 안씨와 미신청 피해자 45명에 대한 진술과 당시 보건사회부 및 부산시 공문, 덕성원 폭행 사건 관련 자료 분석과 조사 등을 진행해 이 같은 결론을 내렸다.
안씨는 지난달 A요양병원 운영자 일가를 폭행·강요·감금·성폭력범죄의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 혐의로 수사해 달라는 고소장을 경찰에 내기도 했다. A요양병원은 덕성원 설립자의 자녀들이 운영하는 곳이다. 안씨는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상상도 못한다"며 "오래된 그 고통의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 입에 담는 것조차 너무 힘들다"고 했다.
덕성원 피해자인 안종환씨가 어린 시절 폭행당한 팔의 흉터를 보여주고 있다. 부산=권경훈 기자
영문도 모르고 끌려갔다
안씨에게 지옥과 같은 나날이 시작된 것은 여섯 살이던 1982년이다. 그해 1월 11일 어머니와 함께 고향인 경북 문경에서 기차를 타고 점심 무렵 부산역에 도착했다. 역 광장에 서 있는데 경찰이 손짓을 했고 영문도 모르고 파출소로 가게 됐다. 안씨는 "파출소에 들어가니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해가 질 때쯤 적재함에 천막을 친 큰 트럭이 도착해 거기 있던 사람들을 모두 태우고 출발했다"고 말했다. 안씨는 7개월가량 부산의 한 복지시설에서 어머니와 함께 있다가 아동을 수용하는 시설인 덕성원으로 옮겨져 1995년 8월 22일까지 생활했다. 무려 13년의 세월이다. 당시 헤어진 어머니는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는 지금도 어머니의 생사조차 모른 채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안종환씨가 직접 그린 부산 덕성원 내 시설 그림. 안씨는 이곳에서 무려 13년을 갇혀 있었다. 안종환씨 제공
당시 덕성원 원생은 120명가량이었는데, 안씨와 비슷한 시기에 똑같은 과정을 거쳐 덕성원으로 온 어린이는 57명이었다. 이들은 진화위 조사에서 "경찰의 억압적인 단속으로 강제수용됐고, 경찰이 부모를 찾아 주려는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경찰 등 단속 주체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부랑아로 분류됐고, 부모나 연고자 확인 절차도 없이 덕성원에 수용됐다는 것이다. 일례로 한 피해자는 혼자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데 경찰이 강제로 데려가 "앞으로 여기가 네 집이다"라고 말한 뒤 덕성원 입구에 내려놓았다고 했다.
비극의 싹은 안씨가 덕성원에 끌려가기 1년 전인 1981년 4월 돋아났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구걸 행위 단속 지시 이후 정부는 '구걸 행위자 보호대책'을 수립해 부랑인에 대한 일제 단속을 실시했다.
노예와 다름없는 강제 노역
덕성원 피해자들은 그 어린 나이에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안씨는 "맞기 싫어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삽 같은 걸로 맞고, 긴장이 돼 오줌과 똥을 싸기도 했는데 옛날 생각이지만 지금도 소름이 끼친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은 덕성원 내 기숙사 공사 등 각종 작업에 동원됐다. 벽돌과 시멘트를 나르거나 임야 개간, 각종 농작물 수확 등을 해야 했다. 야외 화장실에서 인분을 퍼 날라 밭에 뿌리고, 목장의 젖소가 먹을 풀 베어 오기, 축사 청소, 젖 짜기 등은 기본이었다. 밭일을 할 때는 깻잎 2,000장은 약과였고 많을 때는 5,000장씩 따야 했다. 여름에는 파리 잡기 할당량이 있어 평일에는 50마리, 주말에는 100마리를 잡아야 했다. 어려서 학교에 가지 않는 아동부터 고등학생까지 예외가 없었다.
덕성원에 강제수용된 원생들이 밭에서 일을 하고 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제공
한 피해자는 덕성원 원장 사택에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식사 준비, 설거지, 청소, 침구 정리, 애 보기, 원장 부인 안마 등을 했다. 원장이 요강 대용으로 사용하는 주스병을 제때 비우지 못했다는 사소한 실수 때문에 주먹으로 얼굴을 폭행당했다. 원장 부인 안마는 한 번 할 때마다 3시간은 기본이었다고 한다.
덕성원 측은 작업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으면 원생들에게 단체 기합을 주거나 밥을 주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폭행에는 주먹, 진공청소기 호스, 빗자루, 각목, 야구방망이 등이 사용됐다. 안씨는 "어린 생각에 맞고 지내는 것이 삶인 줄 알았다"고 했다. 원생들은 탈출했다가 붙잡혀 온 이들이 무차별 폭행당하는 광경을 보고 무서워서 탈출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가혹한 폭력과 감금, 성폭행까지
덕성원에서 폭행은 일상이었다. "말을 안 듣는다" "일을 제대로 빨리 못한다" "그냥 기분 나쁘다" 등 갖가지 이유로 폭행이 일어났다. 쌀 포대에 원생을 넣어 매달아 놓은 뒤 각목으로 때리고, 바늘로 허벅지를 찌르는 고문도 있었다고 한다.
화장실에서 변을 보고 누군가 물을 내리지 않았다고 같은 층에서 생활하는 원생들에게 티스푼으로 뜬 변을 먹이고, 식당 난로 위에 젓가락을 올려 뜨겁게 달군 뒤 원생 얼굴을 지지기도 했다. 나무로 된 야외 창고에 5~6시간 동안 감금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원생들끼리 서로 싸우도록 시키기도 했다.
인권침해가 벌어진 부산 덕성원 건물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제공
참다못한 원생들 중 일부가 경찰에 폭행 사실을 신고했지만 전혀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출동한 경찰은 덕성원 측의 "아무 일 아니다"라는 말에 돌아갔고, 신고를 했다는 이유로 또다시 폭행을 당했다.
당시 덕성원 직원 등은 성추행과 성폭행도 서슴지 않았다. 한 여성 원생은 초등학교 5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지속적인 성폭행에 시달리는 등 다수의 여성 원생들이 성폭행 피해를 입었다. 남자 원생들에게 성폭행 장면을 숨어서 보라고 지시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남자 원생들에 대한 성추행도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비정상적 학교 생활에 각종 돈까지 착취
덕성원 원생들은 토요일마다 예배를 이유로 학교에 가지 못했다. 원생들 중에는 자신이 원하는 학교나 직장 등에 가기 위해 원서를 냈지만 토요일에 매번 학교를 빠지는 바람에 결석 일수가 너무 많아 진학과 취업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결석이 많으니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쉽지 않았다.
감독관청인 구청은 이러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덕성원에 지도·감독 소홀로 행정처분이나 행정명령 등 강력한 제재를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원생들이 교육받을 권리를 침해당하도록 묵인·방치한 셈이다.
덕성원에 수용됐던 원생들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아동 카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제공
안씨는 "차비로 만 원짜리 한 장 주지 않았다"면서 "사회에 나와 번 돈을 빼앗아 가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안씨는 생선 도매업을 하면서 번 돈 3억 원을 덕성원 측에 빌려줬다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다른 원생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덕성원은 국가에서 원생들에게 주는 교육비 등을 빼돌렸고, 한 원생은 자신 명의 신용카드를 덕성원 관계자가 사용하면서 생긴 5,000만 원이 넘는 부채를 떠안았다.
교편을 잡은 한 원생은 매월 급여에서 최소 생활비를 제외한 나머지 금액을 덕성원에 보내기도 했다. 이렇게 뜯긴 돈이 1억2,000만 원이었다. 덕성원 측은 한 원생의 남편 사망보험금 2,500만 원을 빌려가 갚지 않기도 했다고 한다. 안씨는 "원생들 모두가 덕성원을 나와서도 어릴 때부터 폭력 등에 시달리며 가스라이팅이 된 상태였기에 덕성원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학교도 다니고, 가정도 이루고 싶었는데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온갖 만행에 시달리고 덕성원에서 죽다가 살아남았지만 지금 이게 제대로 살아 있는 것이냐"고 항변했다. 안씨는 공식적 사과와 피해 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 등 국가에 권고한 사항이 반드시 이행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