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웅크리던 푸른 잔디가 고개를 들었다. 초속 0.7m의 잔잔한 봄바람이 살랑거린다. 투수의 손끝을 떠난 공이 시속 148km로 날아간다. 심판은 주먹을 휘두르며 ‘스트라이크’를 외친다. 유니폼을 입은 젊은 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한다.
“남자친구가 야구를 좋아해서 작년에 처음 왔어요. 응원가 부르는 게 재밌었는데 선수들의 열정에 빠져들었어요. 요즘은 세이버매트릭스(야구 통계)까지 공부하고 있어요.” 프로야구 개막경기가 열린 지난 3월 22일 인천 SSG랜더스필드에서 만난 김채은(25) 씨는 이같이 말했다.
개막전이 열린 5개 구장 좌석은 이틀 연속 매진이었다. 역대 최초였다. 야구장 풍경은 과거와 달랐다. 젊은층과 여성 팬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중장년층은 줄었다. 문학구장 주변에서는 “도원 아재는 사라지고 20대들이 자리를 채웠다”는 말이 나온다. ‘도원 아재’는 문학야구장이 생기기 전 있었던 도원야구장에서부터 열정적으로 응원하던 ‘아저씨’ 팬을 뜻한다. “경기장 4층엔 도원 아재들이 있다”는 말도 옛말이 됐다. 2030 여성 중에는 처음 야구장을 찾은 ‘뉴비’들이 많았다.
시간을 건너온 베이징 키즈의 팬심젊은이들이 야구장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양한 이유가 있다. 그중 하나의 힌트를 미국 야구 역사에서 찾을 수 있었다. 미국 뉴욕에는 두 개의 야구팀이 있다. 전통적으로는 양키스를 응원하는 팬이 훨씬 많다. 그런데 단 한 세대, 딱 한 연령대의 뉴욕 남성들에게만 메츠 팬이 더 많다. 이유는 1986년에 있다. 그해 메이저리그(MLB)에서 뉴욕 메츠가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컬럼비아대의 한 연구에 따르면 그 시기 10세 전후였던 소년들에게서만 메츠 팬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한국에도 그런 세대가 있다. ‘2008년 베이징 키즈’들이다. 류현진과 김광현, 강민호를 응원하던 초등학생들이 20대 중후반이 되어 야구장으로 입장했다. KBO는 지금 단순한 유행이 아닌, 시간을 건너온 팬심과 마주하고 있다.
야구장에 들어온 2030 팬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문화를 즐긴다. ‘대포 카메라’라 불리는 고사양 DSLR을 든 팬들이 눈에 띈다. 소셜미디어에는 ‘야구선수 직캠’ 계정이 늘어났고 개인 선수 팬페이지를 운영하는 이들도 있다. 아이돌 팬 문화와 유사한 속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LG 트윈스의 2025년 첫 경기에 온 관중은 2030 팬이 가장 많았다. LG 트윈스 모바일 앱에서 티켓 번호를 누르고 ‘직관 인증’을 한 관람객 7169명 중 약 60%(4271명)가 2030이다. 그중에서도 20대 여성과 30대 여성이 각각 전체의 22.8%, 17.5%를 차지했다.
연간 통계도 이 흐름을 뒷받침한다. 한국 프로스포츠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KBO 관람객 평균 나이는 30.7세였다. 20대가 53.1%, 30대가 22.8%이다. 관람객 10명 중 7명이 20대와 30대인 셈이다. 40대는 18.6%, 50대 5.0%, 60대 이상은 0.6%에 그쳤다. 남성보다 여성이 더 많이 경기장을 찾았다. 남성은 44.5%, 여성은 55.5%였다.
구단들도 2030 여성 팬의 등장을 반긴다. 이들은 다른 관람객들보다 지갑을 더 쉽게 연다. 지난해 2030 여성의 굿즈 구매 비용은 연평균 25만5000원으로 나타났다. 전체 관람객의 비용(23만5000원)보다 많았다. SSG 랜더스 관계자는 “2030 여성 팬 증가를 실감하고 있다”며 “캐릭터 컬래버, 굿즈 확대 등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멤버십 제도로 사라지는 아재들야구의 지평이 넓어지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어두운 면도 있다. 중장년층의 소외라는 문제가 등장했다. 복잡한 티켓 구입 방식이 그들의 야구장 출입을 막는 장벽이 되고 있다. 한국프로스포츠협회 조사에 따르면 관람객 76%는 온라인에서, 4.6%는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 표를 샀다. 시즌권 소지자는 3.7%였다. 초대권, 지인 구매 등 기타 방법이 14%를 차지했다. 매표소에서 표를 구매한 비율은 1.7%에 불과했다. 온라인 예매에 익숙하지 않은 중장년층이 야구장을 찾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현재 각 구단은 대부분의 표를 회원들에게 온라인으로 먼저 판매한다. 현장에서 살 수 있는 표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구단별로 조금씩 다르지만 10개 구단 모두 선예매 혜택을 주는 유료 회원권 제도를 운영 중이다. 회원권은 ‘선예매권’과 ‘시즌권’으로 나뉜다. 10개 구단 가운데 8개 구단이 선예매권과 시즌권을 모두 운영한다. 키움 히어로즈는 선예매권만, 기아 타이거즈는 시즌권만 판매한다.
선예매권은 예매를 할 수 있는 권리를 돈을 주고 사는 것이다. 가격은 3만원부터 15만원까지 다양하다. 비싼 가격의 선예매권을 구입한 사람들은 다른 선예매권자들보다도 더 빨리 예매할 수 있는 혜택을 주는 구단도 있다.
젊은 세대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아이돌 콘서트 티케팅과 비슷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돌 유료 팬클럽 같은 경험이 없는 중장년층은 예매할 권리를 사기 위해 선금을 지불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웃돈을 주고 암표를 사긴 했지만 수십 년 동안 매표소 앞에서 줄을 서 표를 사 왔기 때문이다.
열성팬들은 아예 모든 홈 경기에서 내 자리를 확보할 수 있는 ‘시즌권’을 산다. 롯데 자이언츠의 외야석 42만2000원부터 LG 트윈스가 판매하는 포수 뒤 639만원까지 다양하다. 영국 프리미어리그 아스널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시즌권(1697파운드, 약 321만원)보다 비싸다.
멤버십이 없는 팬들은 선예매 판매 이후 남은 좌석만 살 수 있다. 이 틈을 타 암표 거래도 활개를 치고 있다. 개막전을 앞두고 중고거래사이트에는 2만5000원짜리 개막전 티켓이 35만원에 올라오기도 했다. 시즌권 아이디를 일정 금액에 빌려주는 거래도 등장했다.
디지털 소외계층을 위해서라도 티켓 구입 방식을 바꿔 달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소셜미디어 엑스(X, 옛 트위터)에는 “잠실 매표소 앞에서 돈뭉치를 들고 다니면서 남는 표 한 장만 달라고 하는 할아버지를 봤다. 마음이 짠하다”라는 글이 올라왔다. “야구는 원래 남녀노소 원하면 부담 없이 즐기는 스포츠였는데 나이가 들면 티켓조차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라는 글도 올라왔다. 하지만 현장 판매분을 남겨두는 구단은 롯데, 기아, LG 등밖에 없다. 이 중에서도 시니어석을 별도로 운영하는 구단은 롯데가 유일하다.
야구가 특히 매표소 구매 비율이 낮다. 야구의 매표소 구매 비율 1.7%는 축구, 농구, 배구 등 다른 프로스포츠 리그의 평균(2.8%)보다 낮은 수치다. 현장 구매 비율이 가장 높은 리그는 K리그1(5.4%)로 KBO의 3배에 달한다. KBO보다 비율이 낮은 리그는 KBL(남자프로농구, 1.3%)뿐이다.
야구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 것과 달리 티켓 접근성은 떨어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가장 선호하는 국내 프로스포츠 리그’를 묻자 KBO를 꼽은 응답자가 51%로 압도적이었다. K리그1(18%), KOVO(4.3%), KBL(2.8%) 등 다른 리그를 크게 앞섰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며 내걸었던 슬로건은 ‘어린이에게 꿈을, 젊은이에게 정열을, 온 국민에게는 건강한 여가선용을’이다. 세대를 뛰어넘어 모두가 함께 즐기는 ‘국민 스포츠’를 내걸었다. 아버지 손을 잡고 야구장으로 향했던 10살 소년이 40여 년이 흘러 다시 야구장으로 향하는 길은 험난해지고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