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형배(왼쪽 다섯 번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4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인용 결정문을 낭독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계엄과 탄핵 이후 '87년 체제 청산'이 한국 정치의 숙제로 남았다. 1987년 군사독재 정권시대를 종식하고 대통령 직선제와 5년 단임제 개헌을 이룬 성과를 더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당시 개헌을 통해 독재정치에서 민주사회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40년 가까이 지속되며 보완할 부분이 속속 드러났다. 정치권과 전문가들은 성숙한 민주주의를 위해 다시 헌법을 고칠 때가 됐다고 강조한다. 골든타임이 눈앞에 왔다.

87체제 폐해… 제왕적 대통령 vs 거대 국회 권력 충돌

불법계엄과 헌정 사상 두 번째 대통령 파면을 거치면서 국민들은 제왕적 대통령과 거대 국회 권력이 충돌하는 극단적 대립을 목도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심판 결정문에도 적시돼 있다. 헌법재판소는 연쇄탄핵, 예산안 감액, 법률안 일방 통과 등을 언급하며 "국회는 소수의견을 존중하고 정부와의 관계에서 관용과 자제를 전제로 대화와 타협을 통해 결론을 도출하도록 노력했어야 한다"고 질책했다. 대통령을 향해서는 "국민의 대표인 국회를 협치의 대상으로 존중했어야 한다"고 꾸짖었다.

이처럼 현재의 헌법은 두 개의 강력한 권력이 발호할 경우 이를 막을 수 없는 한계를 떠안고 있다. 박명호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8일 "대통령의 권력과 입법부의 권력이 충돌해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 이 문제를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는지에 대해 헌법이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치권서 개헌론 분출… 권력 분산 공감대

우원식 국회의장이 6일 국회 사랑재에서 개헌 특별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고영권 기자

그래서 개헌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쏟아졌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6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대통령 선거일에 개헌 국민투표를 동시에 하자"고 제안했다. 일찌감치 당내 개헌특위를 꾸려 권력 분산 방안을 논의하고 있는 국민의힘은 대선과 개헌 국민투표를 동시에 추진하자는 제안에 적극 호응했다. 전직 국회의장단을 비롯한 정치 원로들도 분권형 권력 구조로의 변화를 위한 원포인트 개헌을 요구하고 있다.

정치적 견해에 따라 개헌의 방향성은 엇갈리지만, 제왕적 대통령제와 입법 권력의 거대화를 함께 견제해야 해야 한다는 것은 중론이다. 대통령과 국회의 힘을 동시에 빼고 서로 견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는 "87헌법은 우리를 선진국과 민주국가로 만들어 준 위대한 헌법이었지만 한쪽에서는 탄핵 30번, 한쪽에서는 계엄으로 이미 통제력을 잃었다"며 대통령제와 국회 권력을 함께 손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권에선 대통령 5년 단임제도 수술대 위에 올려야 한다고 본다. 대통령의 권력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임기를 줄이고 중간 평가를 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통령 4년 중임제가 그 대안이다. 양승함 연세대 명예교수는 "5년간 한 번 해보고 마는 방식의 정치체제는 민주정치가 아니다"라며 "자신의 정치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고, 국민이 권력에 대한 평가도 내릴 수 있어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외에 국회 권력 간 상호 견제가 가능하도록 상하원 양원제를 도입하자는 안과 대통령에게 의회해산권을 부여하자는 주장, 승자독식의 선거 제도를 해소하기 위한 중대선거구제 도입도 대안으로 거론된다. 박명호 교수는 "지금의 국회는 유권자 절반에 가까운 표가 반영되지 못해 국민 의사를 대표하지 못한다"며 "선거제도 개편을 통해 정치 개혁을 시작하고 개헌을 통해 개혁을 완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선 주자들, 개헌 시점 못 박아야

전문가들은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나고 새 정권이 아직 들어서지 않은 이른바 권력의 공백기인 현시점을 정치개혁의 적기로 꼽고 있다. 매번 대선 과정에선 주요 후보들이 개헌을 공약으로 내세우지만 이후 흐지부지된 전례가 수두룩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공약으로 내세웠던 개헌을 집권 3년차가 돼서야 드라이브를 걸었지만 실패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후보 시절 개헌을 검토하겠다고 했으나, 국정농단 사태로 위기에 봉착해서야 개헌 카드를 꺼냈다. 당연히 별반 반향이 없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탄핵심판 과정에서 군색하게 개헌을 언급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 대선과정에서 4년 중임제 개헌을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차기 유력주자인 지금은 다르다. 권력구조 개편을 비롯한 개헌의 핵심내용은 대선 이후에 논의하자며 미루고 있다.

이에 최소한의 개헌 동력을 잃지 않도록 각 대권 주자들이 개헌을 공약으로 내걸고 시점을 못 박아야 한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정치권 이견이 있는) 5·18 정신 수록 등을 다루려면 논의가 진척되지 않아 헌법 개정에 이르기 쉽지 않을 것"이라며 "당장은 미국의 수정헌법처럼 (권력구조 등에 대한) 원포인트 개헌 방식을 취하되 선거 과정에서 구체적인 시점까지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재현 한국헌법학회장은 "2000년대 초반부터 매년 개헌이 적기라는 주장이 나왔는데 헌법적 문제가 많이 나타난 지금이야말로 정말 개헌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면서 "이른 시일 내에 개헌할 수 있도록 선거는 선거대로 준비하되, 개헌 논의도 투트랙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한국일보

윤한슬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