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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유라



쉽게 쓰는 말이 가장 어렵다. 사랑, 행복, 성장처럼 정의를 내리려 마음먹으면 머릿속에서 너무 많은 장면이 충돌하는 말이 있다. 특히 ‘성장’은 유난히 까다롭다. 시인과 CEO도 함께 좋아하는 몇 안 되는 단어이자, 아기와 직장인이 모두 품는 단어. 숫자로 드러나는 성장, 감정적 성장, 경험적 성장. 때로는 양적이고 때로는 질적인 이 성장들이 각기 다른 길로 뻗어가는 것 같은데 종종 서로 포개어지기도 한다.

사람들이 가장 열광하는 서사의 테마도 ‘성장’이다. 소셜미디어에서 ‘서사’로 끝나는 말 중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애정 서사’도 ‘복수 서사’도 아닌 ‘성장 서사’. 우리는 역경을 극복한 주인공이 더 나은 사람이 되는 이야기에 끌린다. 그 과정에 사랑이, 복수가, 구원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리하여 이것은 “성장 서사였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노력이 보상받고 진심이 인정받고 결과가 ‘성장’으로 이어지는 동화 같은 세계를 믿고 싶으니까. ‘노력형 성장캐’(성장하는 캐릭터)가 만들어내는 서사의 아름다운 우상향 곡선에 감탄하고 감명하면서 ‘성장 서사’를 찾는다.

아름다운 곡선을 바라보다 올라간 고개를 내려 나의 발끝을 바라보면 살짝 씁쓸해진다. 모두 성장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데 나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같은 것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남들의 성장에 몰입하고 응원하는 동안 정작 나는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나. 성장기를 훌쩍 넘긴 어른들에게, 하루하루 생존이 목표인 어른들에게 ‘성장’은 무엇일까? 프로젝트 수행 이력, 업무 역량, 육아 스킬, 자산관리 능력이 조금씩 달라질 때마다 ‘성장’이라 불러도 괜찮을까? 나의 성장은 충분한가?

이력서에 들어갈 멋들어진 한 줄이나 눈에 띄는 성취도 없는 나의 작은 몸부림들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능력과 역량으로 포장되기 전, 구체적인 하루의 순간들. 그제야 성장의 광채에 짓눌려 발견되지 않았던 진짜 보석 같은 단어들을 발견한다. CEO는 싫어하겠지만 시인은 조금 더 자주 만지작거릴 감정들. 성장보다 훨씬 더 삶의 가까이에 붙어 있는 내 친구 같은 단어들. 초라함과 나약함, 상실과 실망, 후회와 포기, 위축과 정체… 이 단어들은 늘 나를 어딘가로 이끌어왔다. 포기에 익숙해지기 싫어서 더 좋은 선택을 하는 법을 익혔고, 상실을 견디다 회복을 배웠다. 위축되지 않으려고 건강한 태도를 궁리하게 됐다. 매일 현실에 맞서느라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견딤과 저항이 성장의 반대말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모든 성장 서사는 한 번에 그어진 곡선이 아니다. 매일 촘촘히 찍어 놓은 점들을 엮은 선이다. 착실하고 묵묵히 견딘 날들을, 평범하고 지루한 매일을 모아서 이어도 선이 그려진다. 신기하게도 우리는 선의 모양과 기울기에 상관없이 어떤 구간에서도 ‘성장’을 발견해낸다. 아마도 봄이 우리에게 매년 생명의 본능적 낙관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토록 골치 아픈 일들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꽃이 피는데, 어떤 상황에서도 기필코 성장의 요소를 찾아내는 낙관쯤이야 쉽다. 얼마큼의 좌절과 실망이 동반되었든, 우리는 또다시 지나온 여정에서 ‘성장’을 찾아내고 말 것이다. 이 지독한 ‘낙관’의 본능이 저마다 가장 어울리는 ‘성장 서사’를 선물해줄 이 봄. 아주 평범한 하루들이 차근차근 쌓아 올려 만들 나만의 ‘선’을 기대해본다.

■정유라



2015년부터 빅데이터로 라이프스타일과 트렌드를 분석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넥스트밸류>(공저), <말의 트렌드>(2022)를 썼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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