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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오늘보다 맛있는 인생, 멋있는 삶이 되길 바랍니다. 라이프스타일 담당 기자가 한 달에 한 번, 요즘의 맛과 멋을 찾아 전합니다.
서울 동작구의 카페 '부강탕'은 1973년부터 목욕탕으로 운영하던 공간을 리모델링했다. 사람들이 18일 대형 욕조 주변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수미 인턴기자


1986년 충북 청주의 한 골목길 모퉁이에 범상치 않은 건물이 들어섰다. 지상 7층의 격자와 곡선 구조가 결합한 독특한 외관으로 건물은 단숨에 동네 상징이 됐다. 건물이 지어진 후 목욕탕인 '학천탕'이 들어서면서 동네 구심점 역할도 했다. 당시 청주 사람치고 학천탕에 몸 한번 안 담근 사람이 없었을 터.

영원한 건 없다. 동네 주민들이 애용했던 학천탕은 2020년 존폐 기로에 섰다. 생활양식의 변화로 목욕탕을 찾는 수요가 줄어든 데다 코로나19 유행으로 직격탄을 맞았다. 박노석 학천탕 대표는 고심 끝에 목욕탕을 카페와 식당으로 리모델링했다. 용도는 바꿔도 간판과 공간은 살렸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목욕탕을 기억하는 동네 주민과 이색적인 카페를 원하는 젊은 세대가 학천탕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박 대표는 "아버지가 어머니의 환갑 선물로 학천탕을 지었다"며 "당대 가장 유명한 김수근 건축가의 공간 사옥에 가서 설계를 의뢰해 지은 건물이다"고 했다. 고향 청주에서도, 박 대표의 가족에게도 의미가 있는 학천탕의 흔적을 최대한 남긴 채 리모델링한 이유다.

남녀노소 반기는 '목욕탕 뉴트로'

충북 청주의 학천탕. 당대 최고의 건축가들이 모여 있던 '공간종합건축사사무소'에 설계를 의뢰해 지었다. 지금은 목욕탕 대신 1, 2층은 카페(카페 목간), 3, 4층은 식당(학천불고기)로 쓰인다. 학천탕 제공


목욕탕이 변신하고 있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던 목욕탕이 카페, 식당, 쇼핑몰, 전시장 등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공간이 생기고 사라지는 도시에서 이게 뭐 특별한 일인가 싶지만, 목욕탕은 좀 다르다. 흔적을 남긴다. 남탕과 여탕 표지판, 대형 욕조, 타일, 사물함, 수도꼭지, 샤워기 등 목욕탕의 자취를 고스란히 살려 쓴다. 목욕탕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는 경우도 흔하다. 흔적을 싹 지우는 대신,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리모델링 방식이다.

충북 청주에 위치한 목욕탕 건물 '학천탕'은 리모델링해 현재 카페와 식당으로 쓴다. 목욕탕에 있던 욕조를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학천탕 제공


최지혜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은 "요즘 세대는 새것, 새 건물은 이미 익숙해서 감흥이 없다"며 "오히려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시간이 간직한 정서가 있는 공간이 주는 감도를 느끼고 싶어한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는 레트로라기보다는 옛것을 현대적 감성으로 재해석해 소비하는 뉴트로 문화 양상"이라고 설명했다.

현실적 이유도 크다. 목욕탕 건물은 애초부터 배관 설비, 콘크리트로 만든 단차가 있는 욕조, 굴뚝 등 그 건물의 용도에 맞는 특성이 뚜렷하다. 집기만 빼면 다른 용도로 전환하기 쉬운 일반의 상업 공간과 달리 철거가 어렵고 비용도 많이 든다. 그 대신 이를 살리는 리모델링을 하면 경제적 효과도 얻고 이색적인 분위기를 낼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목욕탕에는 이야기가 있다

서울 동작구에 위치한 카페 및 갤러리, '부강탕'의 내부. 부강탕 제공


목욕탕의 변신을 가장 반기는 건 동네 주민들이다. 18일 서울 동작구에 위치한 카페 '부강탕'에서 만난 전지원(46)씨는 "가게 바로 앞 '동작13' 마을 버스 정류장 이름이 '부강탕'일 만큼 이 동네에서 유서 깊은 곳이다"며 "동네 사람 입장에선 당연히 폐 건물을 활용해서 다시 열어서 좋고, 이 동네에 살지만 여기에 오면 놀러온 느낌이 나서 좋다"고 말했다.

부강탕도 1973년부터 운영했던 목욕탕이 2021년 코로나19로 문을 닫자, 리모델링해 카페와 갤러리로 운영하고 있다. 배재현 대표는 "부강탕은 과거 목욕을 위한 장소일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소통하던 사회적 공간이었다"며 "그래서 지금도 손님들 중에 목욕탕 시절 이야기를 해주시는 분들이 많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존 대형 욕조 등 부강탕 유산을 보존해서 단순히 커피를 마시고 예술을 감상하는 공간을 넘어서,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는 새로운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100년 된 목욕탕을 개조한 경북 경주의 카페 '1925 감포'. 1925 감포 인스타그램


경북 경주의 카페 '1925 감포'는 30년간 방치돼 있던 목욕탕을 카페로 개조한 곳이다. 1925 감포 인스타그램


시간이 오래된 장소일수록 그곳에 쌓인 이야기가 많은 법이다. 경북 경주의 바닷가 마을에 위치한 카페 '1925 감포'가 그 예다. 이 카페는 100년 된 목욕탕, '신천탕'을 리모델링해 카페로 운영하고 있다. 30년간 문을 닫고 방치돼 있던 공간을 카페로 개조하자 사람들이 모이며 동네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전형적 도시 재생 사례다. 카페를 찾은 손님들은 '1925 감포'를 운영하는 김미나 마카모디 대표에게 목욕탕 시절 추억을 쏟아내기도 한다.

"옛날 머구리(잠수부)들이 저체온증에 걸리면 이곳 목욕탕에 데리고 왔다고 해요. 여기가 '사람을 많이 살렸던 곳'이라는 얘기를 많이 듣죠. 예전엔 남탕과 여탕을 구분하는 벽 위쪽이 서로 뚫려 있어, 천장으로 비누를 던지고 받았다는 이야기도 하시고요. 뱃일 하시던 분들은 여기 와서 꼭 목욕을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거나 이 목욕탕을 운영하던 집이 워낙 부잣집이어서, '이 집 이불에다가 손을 넣었다 빼면 현금이 우수수 떨어졌다' 하는 동네 분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죠. 그러고 보면 카페로 바뀌고 나서도 옛날 목욕탕이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지역 공동체의 '앵커 스토어(거점 공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거예요."

최근 책 '씻는다는 것의 역사'를 출간한 이인혜 전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목욕탕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장소', '날 것의 얘기를 편하게 주고받는 장소'라는 이미지가 있다"면서 "이용자들이 카페로 바뀌었어도 소통하는 공간이라는 익숙한 느낌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

'새것'만이 미덕? 오래된 건물의 가치

옛 목욕탕으로 쓰다 카페와 갤러리로 리모델링한 '부강탕'의 외관. 마을버스의 정류장 명이 '부강탕'일 만큼 동네 명소다. 부강탕 제공


목욕탕처럼 극장이나 공장 등 쓰임을 다한 건물을 보존하면서 활용하는 방안도 건축계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도시의 무분별한 확장을 막을 수 있고, 역사와 시간이 담긴 공간을 유지할 수 있어서다. 안창모 경기대 건축학과 교수는 "건물은 자체의 물리적 가치도 있지만, 그 건물이 갖고 있는 삶의 흔적이라는 사회적 가치도 있다"며 "기존 건물을 살리면서 리모델링하는 방식은 건물의 사회적 가치를 보존하고 유지하는 동시에 친환경적 측면에서도 긍정적이다"고 말했다.

신병윤 동의대 건축학과 교수는 "해외에서는 이미 1920년대 사용하던 항구의 창고나 화력발전소를 미술관으로 만드는 등 기존의 독특한 건물 구조를 활용해 새로운 유형의 공간을 만드는 시도가 활발하다"며 "도시는 진화하는 생물과 같아서 이런 오래된 건물의 쓰임은 계속 변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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