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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위험한 ‘마취·진통’
| 김정호 수의사

동물원 호랑이 이호의 발바닥에 박힌 발톱을 제거하는 날, 마취 부작용도 있고 노령이라 더욱더 신경을 써야 했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email protected]


건강검진의 날, 위장 내시경 검사를 위해 호명을 기다리고 있다. 이 순간을 위해 어젯밤 그토록 화장실을 들락거렸던 것이다. 밤새 마셨던 장 세척액 2ℓ는 레몬향이었고 당분간 비슷한 향의 음료는 마시지 못할 것 같다. 침대에서 새우처럼 옆으로 누워 커튼 뒤 검사실에서 나오는 기계음을 듣고 있다. 내시경 삽입관을 입에 물자 약물이 정맥으로 들어온다. 투명한 색으로 보아 동물원에서도 사용하는 진정제 미다졸람 같다. 이 약은 시술 중 불편했던 기억이 소실되는 장점이 있다. 흐릿한 의식 속에서 몸 상태를 묻는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실눈으로 보는 벽시계는 겨우 20분이 지나 있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런 기억이 없다. 마취제가 없던 시절 침습적인 의료행위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참을 수 없었던 통증의 기억도 오래갔을 것이다.

최초의 마취제는 아산화질소다. 검색해보니 요즘도 치과에서 사용된다고 한다. 19세기 아산화질소는 웃음가스로 불리며 가스를 마시는 환각 파티가 성행했다. 파티 중 한 남성이 가스에 취해 웃다가 책상에 걸려 넘어졌고 다리를 다쳐 피가 나는데도 전혀 아파하지 않았다. 현장에 있던 치과의사 호레이스는 웃음가스의 진통 작용을 확신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웃음가스를 마신 후 본인의 사랑니를 뽑았다.

학창 시절 동물원 실습에서 “야생동물의 진료는 보정(움직임을 저지하는 것)이 반”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동물원의 야생동물은 반려동물이나 가축처럼 물리적인 보정으로 진료가 쉽지 않아서 주로 약물을 사용하는 화학적 보정을 사용한다. 그러나 동물이 단지 움직이지 못하는 보정과 의식 및 통증이 없는 마취는 동물을 위해서 구별해야 한다.

입사 초 다른 동물원으로 사슴들을 옮기는 날이었다. 학교 협력농장에서 사슴 마취를 본 적은 있지만 직접 한 적은 없었다. 사슴을 옮길 수 있는 차량도 마땅치 않아 동물원에서는 동물 운송 업체를 불렀다. 업체 사장님은 사슴 마취 경험이 많다며 우리를 안심시켰다. 정말로 사장님이 파이프로 불어서 쏘는 다팅 주사기는 사슴의 엉덩이에 백발백중했다. 약효도 빨라 1~2분 안에 사슴들이 쓰러졌고 트럭 위 케이지에 넣자 바로 회복했다. 그러나 결국 일어나지 못한 사슴 한 마리가 폐사했고 사장님은 간혹 있는 일이라고 했다. 약병의 성분을 보니 석시닐콜린이라는 속효성 근이완제였다. 폐사한 개체는 호흡근이 이완되어 숨을 쉬지 못했던 것이다. 사슴은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의식이 있어 숨이 멎는 고통을 생생하게 느꼈을 것이다.

청주동물원은 2019년 웅담 채취용 곰을 데려오면서 큰 변화의 계기를 마련한 바 있다. 나는 그 후 농장에 남은 곰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있을까 해서 가끔 그곳을 들렀다. 농장주들과 웅담 채취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어김없이 석시닐콜린이 등장했다. 몸을 움직일 수 없던 상황에서 의식 있는 곰들이 얼마나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을지 예상할 수 있었다. 다행히 환경부에서 관련법을 정비하여 내년부터 곰 사육이 전면 금지되고 아픈 곰이 있으면 수의사를 통해 마취 후 진료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했다.

2018년 소방서에서 야생동물 마취 강의를 한 적이 있다. 119구조대는 멧돼지의 도시 출몰이나 떠돌이 개를 포획해달라는 잦은 민원에 대응하고 있었다. 강의 중에도 끊임없이 안내 방송이 나왔고 교육받던 대원들 일부가 달려 나갔다.

도시 출몰한 멧돼지·떠돌이 개 포획…

의도와는 달리 마취총에 폐사하기도


통증을 표현하지 않는 동물들에게

내가 지금 해줄 수 있는 건 마취·진통

설사 정확한 진단이 나오지 못한대도

약의 힘으로 한숨 푹 자고 일어나기를


서울대 동물병원 마취통증과 학부생 로테이션에 참여했을 때 모습. 야생동물의 진료는 보정(움직임을 저지하는 것)이 반인 만큼 마취가 중요하다. 김정호 제공


마취 강의는 서울월드컵공원 주변에서 떠돌던 개가 마취총을 맞고 쇼크사했던 일이 발단이었다. 떠돌이 개였지만 순한 성격 덕분에 산책 나온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고 이름도 ‘상암이’로 붙여주고 밥을 챙겨주는 이들도 생겼다. 그러나 개를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관청에 포획해달라는 민원을 넣었다고도 한다. 관청은 엽사를 동원해 마취총을 쏘았고 상암이는 현장에서 폐사했다.

또한 2023년 한 농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농장의 암사자는 20년 동안 케이지에 살았다. 관리자의 실수로 문이 열려 밖으로 나왔다. 문이 열려 나오긴 했지만 암사자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케이지 옆에 웅크리고 있었다. 관리자는 관청에 신고했고 암사자는 마취총을 맞고 폐사했다.

같은 해 침팬지 2마리가 문이 열린 케이지를 나와 마취총을 맞고 한 마리는 생을 마감했다. 마취약물은 부작용이 있을 수 있지만 안전역(의약품의 안전 범위)이 넓은 편이다. 케이지를 나온 위험해 보이는 동물이 마취총을 맞으면 대부분 폐사했다. 인명피해가 없어 다행이지만 동물들의 안전을 위해서 사용했던 약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몇 년 전 나는 여우 검진을 위해 일반적인 마취를 했고 갑작스러운 심정지가 와서 허망하게 여우를 하늘로 보냈다. 그 당시 일기장에 쓴 글이다.

“2022년 12월○○일. 얼마 전 여우를 검진하면서 마취를 하게 됐는데 결국 Table Death 했다. 동물원 일을 하면서 별로 없었던 일이라 스스로도 충격이 컸다. 부검 후 조직 검사상 심근 문제가 있었지만 주원인은 심근 문제가 있는 동물에게 인공호흡기를 사용했을 때 심혈관을 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소홀히 했던 나의 문제였다. 반성의 의미로 서울대 동물병원 마취통증과 학부생 로테이션에 참여했다. 빠르게 발전하는 개·고양이 의학에 놀라며 동물원 의학과의 격차를 실감하고 있다. (중략) 고통은 몸이나 마음의 아픔이고 진통은 아픔을 가라앉혀 멎게 하는 일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동물원의 일을 단순하게 말하면 몸의 진통은 수의사의 일이고 마음의 진통은 사육사의 일이다. 통증을 미련스럽게 표현하지 않는 동물원 동물들! 살면서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구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취와 진통이다.”

얼마 전 청주동물원의 암컷 호랑이 이호는 웃자란 발톱이 발바닥을 찔러 다리를 절룩거렸다. 마취 후 발톱을 잘라줘야 했지만 지난번 마취 부작용으로 경련이 있었고 노령으로 회복 지연이 예상돼 걱정되었다. 조심스럽게 마취제 용량을 최소한으로 증량하다 보니 몇 발의 다팅 주사를 더 맞아야 했고 이호는 화를 많이 냈다. 마지막 주사는 세밀한 마취량 조절을 위해 주사기를 손에 들고 이호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결국 엉덩이에 주사를 놓으려는 순간 이호가 벌떡 일어나 급히 나왔지만 말이다. 다팅 주사를 맞는 통증이 있었지만 발바닥의 더 큰 통증이 제거되어 최근 이호의 운동량이 많아졌다.

고백하자면 그동안 마취를 하면서 여우 외에도 몇몇 동물들을 하늘로 보낸 적이 있다. 마취할 때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응급 약물과 기관 튜브 등을 준비하지만 어쩔 수 없이 얼굴이 굳고 신경이 예민해져 말도 곱지 않다. 동물들을 마취해서 정확한 진단이 나오거나 원인이 제거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 설사 그렇더라도 불편한 몸 상태로 한동안 못 잤을 테니 마취약의 힘을 빌려 한숨 푹 자고 나면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김정호
청주동물원에서 20년 넘게 수의사로 일하고 있다. 동물원이 갈 곳 없는 야생동물들의 보호소이자 자연 복귀를 돕는 야생동물 치료소가 되기를 희망한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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