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1년 미국 버지니아주의 한 도로. 출근하던 흑인 여성 3명이 탄 승용차가 주행 중 갑작스럽게 시동이 꺼지면서 도로에 멈춰 선다. 직장까지는 무려 26㎞. 도저히 걸어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낭패다. 그때 멀리서 또 다른 차량 한 대가 접근한다. 경찰 순찰차다. 흑인 여성들의 얼굴이 순간 굳어진다. 유색 인종에 대한 공공연한 차별이 존재하던 당시 미국에서 무슨 꼬투리라도 잡히지 않을까 긴장한 것이다.

순찰차에서 내려 천천히 다가온 백인 경찰관의 태도는 고압적이다. 그는 “여기서 고장을 내면 어쩌자는 거요?”라고 따지듯 말을 내뱉는다. 신분증을 내놓으라고도 다그친다. 그런데 신분증을 살피던 백인 경찰관의 표정이 일순 우호적으로 바뀐다. 흑인 여성들의 직장이 당시 소련과의 체제 경쟁 최일선에 서 있던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었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자가 수리를 마치고 떠나려는 순간 경찰관은 “순찰차로 에스코트해 주겠소”라고 제안한다. NASA 일원인 여성들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다. 2016년 개봉한 미국 영화 <히든 피겨스> 도입부다.

실제로 미국인에게 NASA는 단순한 정부기관이 아니다. 전 국민적인 자부심이다. 달에 간 모든 사람을 NASA가 보냈고, 우주로 떠난 대다수의 무인 탐사선을 NASA가 개발했다. 이런 NASA가 지난 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고초를 겪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일론 머스크 스페이스X 최고경영자(CEO)에게서 시작된 구조조정 폭풍 때문이다. NASA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e메일 답신 말라 지침”

미국 과학기술전문지 스페이스닷컴 등은 지난달 24일(현지시간) NASA가 한 단체 e메일에 답신하지 않아도 된다는 지침을 소속 직원 전부를 대상으로 발표했다고 전했다. 해당 e메일은 연방 공무원의 임용과 성과 평가를 총괄하는 미국 인사관리처(OPM)가 지난달 22일 발송한 것이다. e메일 본문에는 “지난주 자신이 달성한 성과 5가지를 적어서 보내라”는 문구가 적혔다.

이 e메일은 NASA를 포함해 230만명의 미국 연방정부 공무원들에게도 일제히 발송됐다. 주목되는 것은 e메일은 OPM이 뿌렸지만, 발송 지시를 내린 것은 머스크라는 점이다. 그는 현재 정부효율부 수장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를 받아 정부 지출을 깎고, 인력을 줄이는 일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이번 e메일 발송 목적도 구조조정이다.

NASA는 “개별 직원 대신 NASA 지휘부가 OPM 요청에 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머스크는 e메일에 답하지 않으면 사직으로 간주될 것이라는 주장까지 펼친 상황이어서 소속 직원들의 불안과 동요를 막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당초 NASA 일부 부서에서는 이번 e메일을 연구 성과를 설명하기 위한 기회로 활용하자는 분위기까지 있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사실상의 응답 거부로 기관 전체 입장을 정리한 것이다.

미국 플로리다주 케네디우주센터의 대형 격납고 외벽에 성조기와 미국 항공우주국(NASA) 로고가 붙어 있다. EPA연합뉴스

ISS 운영 종료 요구도

하지만 구조조정을 향한 머스크의 의지가 ‘답신 거절’을 받아들이며 수그러들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NASA 예산이나 인력 모두 세계 우주기관 가운데 가장 거대하기 때문이다. NASA 한 해 예산은 250억달러(약 36조5000억원), 인력은 1만8000여명이다. 말 그대로 매머드급 규모다. 무엇보다 머스크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민간우주기업 스페이스X를 직접 운영하는 것이 변수다. 우주 개발에 대해 그는 누구보다 잘 안다. 특히 기술을 싸게 만드는 법에 통달했다. 미국 국무부와 법무부, 미국 연방수사국(FBI)도 성과 보고를 종용하는 e메일에 답변하지 않기로 했지만, NASA는 상황이 다르다. NASA는 경험과 지식으로 무장한 머스크의 거친 지적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이미 조짐이 있다. 머스크는 지난달 21일 자신의 X를 통해 “국제우주정거장(ISS)의 궤도 이탈을 준비하자”면서 “ISS는 목적을 달성했고 더 이상 유용하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2년 뒤를 (궤도 이탈 시점으로) 추천한다”고 했다.

궤도 이탈이란 ISS를 바다에 추락시키는 일이다. 1998년 등장한 ISS는 약 400㎞ 고도에 떠 있으면서 과학 실험실로 활용되고 있다. 길이는 108ｍ에 이른다. NASA는 ISS 운영에 매년 40억달러(약 5조8300억원)를 쓴다. ISS를 2030년까지 유지하는 것이 NASA 계획이었다. 머스크는 이 시점을 2027년으로 당기자고 한 것이다. ISS 운영 비용을 큰 의미가 없는 돈으로 본 것이다.

“돈 현명하게 쓰여야” 주장

특히 머스크는 한 번 쏘는 데 무려 41억달러(약 5조9800억원)가 드는 NASA의 대형 로켓 ‘우주발사시스템(SLS)’을 낭비의 전형으로 여긴다. SLS는 달에 사람을 착륙시키기 위한 ‘아르테미스 우주선’을 지구 밖으로 밀어내는 역할을 맡는다. 2022년 11월, 사람을 태우지 않고 달 근처까지 비행하는 임무를 한 차례 수행했다. 내년과 2027년에도 발사 예정이다.

그런데 머스크가 운영하는 기업인 스페이스X의 대형 로켓이며 현재 시험발사를 거듭하고 있는 ‘스타십’은 이보다 훨씬 싸게 발사할 수 있다. 발사 비용이 SLS의 약 400분의 1, 즉 1000만달러(약 145억원)에 불과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일회용 로켓인 SLS와 달리 스타십은 재사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차이다. 머스크의 눈에 SLS가 곱게 보일 리 없다.

머스크는 2030년대 달에 상주기지를 짓고 자원을 캐려는 NASA ‘아르테미스 계획’ 전체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까지 내비치고 있다. 한정된 재원을 화성 개척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화성에 도시를 건설하는 것은 머스크의 오랜 꿈이다. 트럼프 대통령도 지난 1월 취임사에서 “화성에 미국 우주비행사를 보내겠다”면서 머스크에게 힘을 실어줬다.

머스크는 지난달 26일 X에 “사람들은 자신의 돈이 현명하게 쓰이기를 원한다”고 적었다. 정부에 대한 구조조정 시도가 납세자를 위한 것이라는 태도다. NASA에 대한 고강도 압박이 쉽게 멈추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다.

경향신문

이정호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