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누키 도모코 도쿄 특파원
지난달 25일 오전 8시. 일본 최고 명문대인 도쿄대 혼고(本郷) 캠퍼스 정문 앞엔 대입 수험생들로 수백m의 장사진을 이뤘다. 이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알록달록한 ‘도쿄대 필승(必勝)’ 부채를 든 중국인 유학생과 전문 입시학원 ‘고치(行知)학원’ 관계자들의 모습이었다. 한 중국인 수험생이 모습을 드러내자 선배들은 핫팩을 건네며 중국어로 “긴장하지 마!”라고 외치더니, 이번엔 일본어로 “힘내!”라고 격려했다. 이런 모습을 일본 기자들이 앞다퉈 카메라에 담았다.
지난달 25일 일본 도쿄대 정문 앞에서 고치학원 관계자들이 중국인 수험생을 응원하고 있다.오누키 도모코 특파원
부채를 들고 있던 주밍위안(朱明遠, 22) 씨는 도쿄대 대학원을 목표로 지난해 7월 일본에 왔다. 광둥성의 대학을 졸업한 후, 선배의 권유로 도쿄대 진학을 결심했다. 일본 취업을 목표로 하는 주 씨는 이날 처음 도쿄대를 직접 방문했다며 “아시아 최고 대학의 에너지가 느껴진다”고 감명된 얼굴을 보였다.
도쿄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고치학원에서 강사로 일하는 푸젠성 출신의 리 씨(李, 25, 여성)도 도쿄대 출신이다. 최근 중·일 관계는 안 좋지만 “일본인은 정말 친절하다. 외교관계는 신경쓰지 않는다”며 불편함이 없다고 했다.
도쿄대에 입학하는 중국인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도쿄대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기준 외국인 유학생 5231명 중 중국인은 3545명(67.8%)으로, 2014년의 1270명에서 약 3배로 늘었다. 전체 학생 수 2만9195명 중 12.1%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커졌다.
지난달 28일 도쿄 고치학원 본부에서 양거 대표가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오른쪽은 고치학원이 낸 한국어 교재.오누키 도모코 특파원
고치학원의 양거(楊舸) 대표는 “중국이든 일본이든 한국이든, 누구나 가고 싶은 대학은 손에 꼽을 정도다. 중국에선 한해 1000만 명이 도전하지만, 일본 수험생은 50만 명이라 경쟁률이 중국에 10분의 1도 안된다”고 설명했다. 중국의 대학 입시는 올림피아드 수상자 등 수재는 바오쑹(保送)으로 불리는 특별전형으로 선발하며, 일반 수험생은 한국의 수능에 해당하는 ‘가오카오(高考)’ 단 한 번의 시험 성적으로 한 개 대학만 지원할 수 있다. 반면, 일본은 사립대라면 여러 곳에 지원할 수 있고, 유학생들은 국립대도 복수 지원이 가능하다.
이런 사실이 중국내에 알려지면서 일본 대학진학을 희망하는 학생이 급증한 것이다. 현재 고치학원의 학생 수는 약 3500명. 교재가 한국어로도 번역돼 한국인 학생도 약 20명이 있다.
지난달 28일 일본 도쿄 고치학원 본부 입구에 지난해 일본 명문대 합격자 수가 소개돼 있다.오누키 도모코 특파원
양 대표는 “중국에선 하루 16시간 공부해도 합격을 장담할 수 없다”며 “사실 입시공부는 AI 시대에 장기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여유만 있다면 일본에서 여행도 하고, 책도 읽으며 입시에 대비할 수 있다”고 일본 유학의 매력을 얘기했다. 도쿄대의 지난해 유학생 시험 합격자 29명 중 17명이 고치학원 출신이다. 학부보다 대학원의 문턱이 상대적으로 낮아, 대학원을 포함하면 61명이나 합격자를 배출했다.
코로나19 전후로 ‘교육 이민’도 두드러지고 있다. 일본 명문대 진학을 목표로 자녀가 어릴 때 온 가족이 함께 일본으로 이주하는 것이다. 자녀를 국제학교에 보내거나, 일본 초등학교에 입학시켜 일본어 실력을 키운 후 입시를 통해 명문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중국인 학생이 급증하면서, 일부 국제학교에선 중국인 학생 수를 제한하고 있을 정도다. 도쿄대가 위치한 분쿄쿠(文京区) 초등학교 주변의 부동산을 중국인들이 매입하는 사례가 늘어, 이 지역 부동산엔 중국인 직원이 상주하고 있다는 언론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특히 중국인이 늘어난 지역은 도요스(豊洲)다. 도요스가 위치한 고토구(江東区)의 중국인 주민은 지난해 1월 현재 1만8639명에 달했다. 일본을 대표하는 고급 쇼핑가 긴자(銀座)에 가깝고, 도쿄타워와 스카이트리, 도쿄만이 한눈에 들어오는 입지를 자랑한다. 최근 고급 고층 아파트가 속속 들어서면서 중국인 부유층들이 대거 입주하고 있다.
지난달 25일 일본 도요스의 한 공원.일본어,영어와 함께 중국어로 쓰인 게시판이 있다.오누키 도모코 특파원
도요스는 일본인 사이에서도 교육열이 높은 지역이다. 명문 중학교에 가장 많은 합격자를 배출하는 학원 ‘사픽스(SAPIX)’의 도요스캠퍼스에 다니는 학생 10명 중 1명이 중국인이다.
도요스에서 고등학생 아들을 키우는 한 엄마는 “아이가 다니는 대형 입시 학원은 같은 반에 중국인이 최소 4명이 있다. 중국인은 정말 강인한 것 같다”며 그들의 교육열을 소개했다. 실제로 도쿄대의 중국인 학생 중엔 유학생 시험이 아닌 일본인들과 같은 입시를 치르고 입학한 학생도 적지 않다.
일본 정부 관계자는 “최근 중국인들이 자국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중국 경기침체와 이에 따른 취업난”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생김새가 비슷하고 같은 한자 생활권이어서 미국이나 유럽보다 적응하기가 쉽다’고 덧붙였다.
1년반 동안 100명 이상의 중국인을 인터뷰하고 지난달 『潤日(룬르)―일본으로 탈출하는 중국인 부유층』을 출간한 저널리스트 마스토모 다케히로(舛友雄大·40) 씨는 “코로나 당시 중국에서 봉쇄를 겪으면서 (시진핑) 체제에 의문을 갖게 된 사람들 중에 자녀를 일본에서 교육시키려는 이들이 늘었다”고 말했다. 마스토모씨에 따르면 룬(潤)은 2018년에 생긴 신조어다. 치열한 경쟁과 취업난으로 불안을 느껴 일본으로 거처를 옮기는 이들을 ‘룬르(潤日)’라고 부른다.
지난달 25일 일본 도쿄대 입시 당일 교내 견학 심가를 요청하는 중국어 안내문이 붙어 있다. 최근 도쿄대는 중국인 인기 관광지가 됐다.오누키 도모코 특파원
명문대에 중국학생들이 급증하는 현상을 바라보는 일본인들의 마음은 복잡하다. 긍정적인 자극이 될 수 있다는 시각과 함께 “치열한 경쟁에 익숙치 않은 일본인들이 학교나 일자리를 중국인들에게 빼앗길 수 있다”는 경계심도 존재한다.
교육 이민이 가능해진 이유 중 하나로 일본의 장기 체류 비자가 서구 국가들에 비해 비교적 쉽게 발급된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이와야 다케시(岩屋毅) 일본 외상이 지난해 12월 중국을 방문해 중국인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관광 비자 완화 방침을 발표하자, 자민당 내 우파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마스토모씨는 “자녀 교육을 위해 일본에 온 부모들 중엔 일본어를 못하는 사람이 많아 지역사회에서 의도치 않게 문제를 일으키는 일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비자 완화에 대한 비판은 일본인들의 반발이 점차 표면화되고 있다는 신호일 수도 있다”며 주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