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커드…‘킹스맨’ 부럽지 않은 특수원단 고기능성 맞춤 작업복 시대
스트리트웨어로 손색없는 ‘워크웨어 무드’ 제품도 인기 만발
스트리트웨어로 손색없는 ‘워크웨어 무드’ 제품도 인기 만발
아커드 서울 쇼룸에 걸려 있는 어센틱 라인의 워크재킷. 스트리트 웨어로 손색없는 데님 재킷이지만 초고온 화염에서도 노동자를 보호하는 강인한 작업복이다. 장회정 기자
패션을 말할 때 빠짐없이 언급되는 TPO(Time: 시간·Place: 장소·Occasion: 상황)는 예식장 하객 패션이나 상견례용 정장에서만 중요한 게 아니다. 작업 현장에 최적화된 작업복이야말로 TPO를 겸비한 노동자의 필수 패션이라 할 수 있다. 옷이 사람의 행동을 변화시킨다는 말은 제대로 된 작업복은 작업자의 안전뿐만 아니라 자부심까지도 채울 수 있다는 얘기와 다름없다.
지난 13일 찾은 서울 수표로의 워크웨어 브랜드 아커드(ARKERD)의 쇼룸은 영화 <킹스맨>의 요원들이 슈트를 맞추기 위해 찾는 고급 테일러숍의 ‘작업복 부티크’를 연상케 했다. 이곳에서 워크웨어 커스터마이징 서비스인 ‘비스포크’를 통해 특수 원단과 부자재를 직접 만져보고 다양한 샘플 제품을 확인한 뒤 작업 환경에 맞는 기능과 디자인의 맞춤 작업복을 제작할 수 있다.
다양한 샘플 제품을 확인한 뒤 작업 환경에 맞는 기능과 디자인의 맞춤 작업복을 제작할 수 있는 아커드 서울 쇼룸 내부. 장회정 기자
1층 쇼윈도에 걸린 워크재킷은 빈티지 데님의 고운 인상과 달리 초고온 화염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는 강한 녀석이다. 작업복 하면 뻣뻣하고 꺼끌꺼끌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방염복 소재 메타 아라미드가 함유된 원단은 부드럽고 가볍다. “작업복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을 이야기하는 브랜드의 철학을 녹인 제품”이라는 설명이 붙었다. 1600도 쇳물이 튀어도 뚫리지 않는 원단으로 주요 장기 부위를 야무지게 보강한 재킷형 방염 작업복은 입고 벗기 좋은 데다 부분 교체가 가능하도록 경제적인 디자인이 적용됐다. 분진이 많이 발생하는 현장이라면 먼지가 덜 붙는 원단을 고를 수도 있다. 조만간 출시를 앞둔 조끼는 작업자가 주로 사용하는 공구 사이즈에 딱 맞는 주머니를 겸비했다. 허리 품도 내 몸에 맞게 조절할 수 있어 맵시까지 챙길 수 있다. 쇼룸은 온라인 사전예약을 통해 누구나 방문할 수 있다.
작업복의 진화는 옷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수반되는 인식의 변화가 또 다른 ‘안전문화’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 아커드 박상목 팀장
초기부터 아커드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는 박상목 팀장. 장회정 기자
아커드는 대한제강이 만드는 ‘워크웨어’다. 철강회사가 갑자기 옷을 만든 이유는 ESG 가치를 실현한다는 명분도 있지만, 무엇보다 “작업과 가장 밀접한 장비지만 만족도가 가장 낮은 보호복과 안전화”를 바꾸기 위해서였다. 지난 세월 우리가 아는 작업복이란 회사 로고만 다를 뿐 천편일률적인 블루칼라 이미지를 벗지 못했다. 2021년 “우리 회사 사고가 줄어들면 그것만도 어디냐”에서 출발해 본격적인 판매를 시작한 지 2년 차를 맞는 아커드는 현재 다양한 업종의 작업복부터 유니폼까지 의뢰받을 정도로 업계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지난 4년간 대한제강 작업 현장에서는 단 한 건의 사고가 발생했는데 현장 사무실에서 의자로 인한 것이었다. 이 프로젝트를 초기부터 이끈 박상목 팀장은 ‘작업복이 바뀐 덕’보다는 “작업자들의 분명한 인식 변화”라는 효과를 먼저 전했다. 초창기 새 작업복에 대한 피드백을 요청했을 때만 해도 귀찮아하는 기색을 보이던 동료들이 이제는 사내 모니터링단인 ‘아커드 리더’ 모집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높은 만족도를 보이고 있다.
“철강 쪽 현장이 열악한데 작업복이 바뀌니 그 옷에 맞춰서 환경을 깨끗하게 개선하는 작업도 함께 이뤄지고 있어요. 옷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수반되는 인식의 변화가 또 다른 안전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봅니다.”
아웃도어 및 스트리트 웨어로도 손색 없는 아커드의 워크재킷. 무전기용 포켓 등 섬세한 디테일이 눈에 띈다. 장회정 기자
전기 업무라면 정전기가 발생하지 않는 옷이 필요한 것처럼 해외에는 각 현장에 맞는 작업복 인증 기준이 있다. 2022년 현장 노동자의 안전을 위한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됐지만 국내 작업복에 대한 안전기준은 딱히 없다. 박 팀장은 산업안전기사 자격증을 취득하면서 ‘작업복’을 팠다. 해외 기준을 참고로 공인기관에 의뢰해 자체 테스트를 거듭하며 제품 개발에 나섰다. 긍정적인 건 최근 몇 년 새 ‘전문’ 작업복 시장이 조성되면서 인증 기준의 필요성에 대한 의견도 모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입사하는 젊은 직원들은 좀 더 깔끔했으면, 좀 더 안전했으면, 좀 더 존중받았으면 좋겠다는 인식이 분명합니다.”
입고 벗기 좋은 데다 부분 교체가 가능하도록 경제적인 디자인이 적용된 작업복. 장회정 기자
일반적인 작업복에 비하면 가격대가 높은 편이지만 그 가치를 고려하면 하이 패션에 비할 바가 아니다. 보통 재킷 종류는 10만~20만원대. 방염복은 30만원대 수준이다. 여러 가지 샘플을 만들고 현장 착용 및 세탁 등 각종 테스트를 거치는 터라 프로젝트마다 최소 6개월 이상 소요된다. 이후 실착용자의 품질 평가를 반영해 업그레이드하다 보니 3년은 지나야 작업복 ‘완전체’가 만들어진다. 박 팀장이 보는 작업복의 영역은 유니폼으로 뭉뚱그려지는 노동 현장까지 아우른다. 화력이 중요한 주방에서 일하는 조리 노동자를 위한 방염 앞치마를 제작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위험을 안고 있는 소규모 사업장 및 현장 작업자 팀을 위한 ‘아커드 크루’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도 이른바 현장 ‘노가다’의 인식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에서다. 아커드는 2024 국제안전보건전시회에 참가했으며 iF 디자인어워드 커뮤니케이션 부문 프로덕트&서비스 브랜딩 본상을 수상했다.
화력이 중요한 주방에서 일하는 조리 노동자를 위한 방염 앞치마. 장회정 기자
일반인이 체감할 수 있는 변화는 대한제강이 있는 부산에서 작업복을 입고 다니는 직원들을 제법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작업복은 어쩐지 외출복으로는 꺼리는 옷이었다. 과거 박 팀장도 탈의실에서 작업복을 갈아입고 퇴근하곤 했다. 얼마 전 한 직원이 작업복 입은 사진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뒤 그에게 DM을 보내왔다. 달라진 작업복, 워크웨어의 힘이다.
“워크웨어 카테고리가 단지 일할 때만 입는 옷일 수 있지만, 어느 정도 위험을 막아주면서 편리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주목적입니다. 그래서 일상복의 영역도 포함된다는 보는 거죠.”
재킷과 바지, 가방까지 여느 패션브랜드 제품이라 해도 위화감이 없는 아커드의 워크웨어. 장회정 기자
워크웨어는 최근 주목받는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해 프라다 남성 컬렉션은 얼핏 작업복을 연상케 하는 여러 개의 주머니가 달린 셔츠와 베스트를 선보였다. 디자이너 아나 그라시가 탄생시킨 이탈리아 브랜드 Gr10K는 잘 알려진 워크웨어다. 2017년 만들어진 이 브랜드는 소방관과 집배원용 작업복의 기능성과 소재를 활용해 견고하면서도 실용적인 제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내구성 강한 카고팬츠나 움직임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무릎 부를 절개한 바지가 대표적이다.
대표적인 워크웨어 브랜드 Gr10K의 워크재킷. Gr10K 인스타그램.
일본 전역에 점포 1000여개를 운영하는 워크맨은 건설작업자의 40% 이상이 고정 고객이라는 얘기가 있을 만큼 독보적인 작업복 전문 체인이다. 상품 기획부터 제조, 판매 등의 공정을 자체 운영해 유통 마진을 줄이는 SPA 브랜드식 운영으로 기능이나 품질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다는 인식이 브랜드 장수의 원동력으로 통한다. 작업복으로 출발한 워크맨은 기능성 아웃도어웨어 ‘워크맨 플러스’로 외연을 확장하며 유니클로에 비견될 정도로 대중적인 브랜드로 부상했다. 업체는 재구매 고객의 비율이 80%라고 밝히고 있다.
일본에서 유니클로에 비견될 정도로 대중적인 브랜드로 성장한 워크맨의 워크웨어. 워크맨 홈페이지
1848년 설립된 독일의 엥겔버트 스트라우스는 작업복의 정석이라 할 만한 방풍, 방수, 내구성 등을 갖춘 기능성 제품으로 유럽 최대 워크웨어 브랜드로 손꼽힌다. 기능성뿐만 아니라 세련된 디자인으로 이후 여성복, 아동복, 속옷 등 일상복으로 그 영역을 확장했으며 다양한 협업을 통해 대중과의 접점을 늘리고 있다. 국내에서는 코오롱인더스트리의 볼디스트, K2 세이프티 등 의류 전문업체의 워크웨어 브랜드가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이미 일상으로 깊숙이 들어온 멋스런 워크재킷. 활용도도 높다. MLB 제공
워크웨어의 일상화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아이템은 누구나 입는 청바지다. 세계적인 데님 브랜드 리바이스가 19세기 골드러시 당시 광부들에게 인정받은 튼튼한 작업복이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패션 브랜드에서도 어렵지 않게 워크웨어를 발견할 수 있다. 이번 시즌 주목받는 아이템은 워크재킷이다. MLB의 워크재킷은 성별과 관계없이 무심하게 툭 걸쳐 입기 좋다. 프리터의 ‘교토 워크재킷’은 여유로운 실루엣과 가벼운 착용감으로 시즌마다 변주되는 브랜드의 대표 아이템이 됐다. 멋스러운 아웃도어 웨어로 상징되는 고프코어룩도 기능성이 강화된 안전화 등의 제품으로 워크웨어 트렌드를 채우고 있다.
워크웨어의 기본은 본연의 기능성이다. 방염 테스트 후에도 제 모양을 유지하는 제품&테스트 이전 제품을 나란히 전시한 아커드 서울의 쇼룸. 장회정 기자
박 팀장은 “워크웨어 무드 의류”의 장점으로 “트렌드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꼽았다. 그는 “무전기용 포켓처럼 일상복보다는 훨씬 많은 디테일이 그냥 디자인이 아니라 나름의 서사를 갖추고 있다는 점을 재미있게 느끼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