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판교 IT기업 비중 10% 위태
작년 174곳 폐업, 1년새 20% 늘고
기술력 높을수록 '엑소더스' 심화
망고부스트·트웰브랩스 등 미국行
"벤처 생태계 붕괴···파격 혜택 절실"
작년 174곳 폐업, 1년새 20% 늘고
기술력 높을수록 '엑소더스' 심화
망고부스트·트웰브랩스 등 미국行
"벤처 생태계 붕괴···파격 혜택 절실"
20일 서울 강남 테헤란로의 중심인 역삼역 부근에서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걸음을 옮기고 있다. 정혜진 기자
[서울경제]
한국 정보기술(IT) 스타트업의 산 역사였던 테헤란로·판교 시대가 흔들리고 있다. 서울·판교 권역의 IT 스타트업 비중이 처음으로 10% 선을 내줄 처지다. IT 스타트업의 주요 자금줄이었던 벤처캐피털(VC)들의 투자가 점차 줄어들면서 폐업 혹은 외곽 지역으로의 이전을 결정하거나, 일찍이 기술력을 인정받은 IT 스타트업은 초기 단계에 본사를 해외로 이전하는 사례가 늘어난 영향이다.
21일 글로벌 자산 평가 업체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가 지난해 11월 기준 서울과 판교 권역의 오피스 임차인을 분석한 결과 IT 기업 비중은 10.4%로 전년(14.5%) 대비 4.1%포인트 하락했다. 임대료가 꾸준히 상승하는 상황에서도 오피스 공실률은 지난해 내내 3%대로 낮은 수준을 유지했는데 임차인 가운데 IT 기업 비중이 ‘나 홀로’ 하락한 것이다.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가 분석 보고서를 공개한 2022년 이후 최근 3년간의 데이터에서 줄곧 금융, 서비스 기업 다음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했던 IT 기업이 제조, 도소매 기업에 밀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업계에서는 팬데믹 이후 IT 업종이 급증했지만 민간과 정부에서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양대 자금줄이 끊기면서 폐업이 잇달아 벌어진 현상으로 보고 있다. 분석을 진행한 김수경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 부장은 “IT 기업은 중소 규모의 면적을 사용하고 강남 권역을 선호하는 현상이 뚜렷하기 때문에 서울이나 판교 권역 밖으로 이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폐업의 경향성이 뚜렷하고 투자 생태계 위축으로 이 같은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고 짚었다.
IT 기업이 폐업하거나 떠난다는 것은 MZ세대의 가장 양질의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과도 직결된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IT 기업의 고용 창출 효과와 주변 상권 활성화를 비롯해 젊은 세대의 커리어 경로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판교 권역에서 IT 기업 썰물 현상이 빚어지는 데는 정부와 민간의 벤처 투자 지원금이 급감한 데 따른 IT 기업 생태계 위축 역시 큰 영향을 미쳤다. 벤처 투자 정보 플랫폼 더브이씨에 따르면 지난해 폐업한 스타트업은 174곳으로 전년(144곳) 대비 20% 늘었다. 이 가운데 폐업 직전 투자 단계가 시드(Seed) 단계였던 스타트업이 총 95곳으로 54%에 달했다. 윤종영 소프트웨어융합대학 교수는 “인공지능(AI) 기업들의 경우 기존 모델의 경쟁 우위가 떨어져 피버팅을 진행하고 있는 기업도 많다”며 “뚜렷한 기술 우위를 마련하지 않는 한 VC들이 투자를 활발히 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IT 기업 축소세는 당분간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국내 벤처 생태계가 위축되고 내수 시장의 침체가 뚜렷하다 보니 그동안 어렵게 버텨온 스타트업들의 폐업이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는 관측에서다. 이기대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센터장은 “IT 기업 비중 감소는 플랫폼 기업들이 지난 2년간 어려움을 겪은 여파가 클 것”이라며 “VC가 회생 불가능한 스타트업에 대해 파산이나 청산 절차를 미룬 경우도 많아 올해는 더욱 많은 폐업 신고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짚었다.
기술력을 인정받은 기업이 국내를 떠나 해외로 본사를 이전하는 사례 또한 늘고 있다.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김장우 대표가 2022년 설립한 데이터센터용 데이터처리가속기(DPU) 개발 스타트업인 망고부스트는 본사를 미국 실리콘밸리로 이전했다. 미국 시장이 유망 기술 인재를 확보하는 데 용이한 것은 물론 AI 기술에 대한 수요도 더 크고 적극적인 투자 환경이 조성돼 있다고 본 것이다.
영상 이해 생성형 AI 개발 기업 ‘트웰브랩스’가 본사를 미국에 둔 것 역시 대표적인 사례다. 트웰브랩스는 해외 빅테크와의 협업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해외에 본사를 두고 사업을 진행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트웰브랩스 관계자는 “해외 사업 확장 등을 위해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다”면서 “한국 법인보다는 미국 법인을 중심으로 사업을 펼쳐나갈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이미 트웰브랩스는 성장성을 높게 본 해외투자가들로부터 대규모 투자를 유치하기도 했다. 주요 해외투자가로는 엔비디아·스노플레이크·데이터브릭스 등이 있다. 대규모언어모델(LLM) 기반 올인원 솔루션 기업인 올거나이즈는 일본에 본사를 두고 서울 오피스를 지사로 전환해 일본 공공기관을 상대로 다양한 수주를 따내며 본사 이전 후 더욱 모멘텀을 얻은 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최병호 고려대 AI대학원 교수는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차원에서 정부와 대기업들의 AI 기술 스타트업에 대한 적극적인 육성 노력이 필요하다”며 “AI 스타트업들의 경우 인재 확보와 투자 유치 등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정부 차원에서 누구나 파격적이라고 생각할 만큼의 인재 확보와 투자에 대한 세제 혜택을 부여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