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보수 몫까지" 한발 더 나아가
국힘 극우 행보에 '중도보수' 표심 선점
사실상 전멸한 진보정당 존재감도 영향
국힘 극우 행보에 '중도보수' 표심 선점
사실상 전멸한 진보정당 존재감도 영향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0일 충남 아산시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을 방문해 현대차 관계자들과 인사하며 활짝 웃고 있다. 연합뉴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민주당은 중도보수' 선언으로 촉발된 당내 정체성 논쟁이 한층 가열되는 모양새다. 친이재명(친명)계는 "우리당은 중도 우파 정당"(김대중), "노무현의 대연정" "민주당 정체성만 놓고 보면 보수"(문재인) 등 민주당이 배출한 전직 대통령들의 과거 발언을 소환하며 이 대표 지원사격에 나섰다. 이 대표의 스탠스가 민주당 정통성에 부합한다며 정체성 논란을 일축한 것이다.
반면 비이재명(비명)계는 "파란 옷(민주당)을 입고 빨간색 가치(국민의힘)를 이야기하느냐" "실용과 보수는 전혀 다르다"며 반발 수위를 높였다. 이번 정체성 논란이 계파 갈등으로 비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지만, 이 대표 측은 "생산적 논쟁은 좋은 것 아니냐"며 오히려 반기는 기류도 엿보인다.
합리적 보수까지 껴안고 대선 유리 고지 선점
김기현(앞줄 가운데), 나경원(앞줄 왼쪽) 등 국민의힘 의원들이 17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 탄핵심판 불공정성을 규탄하는 항의방문을 하고 있다. 박시몬 기자
이 대표가 당 안팎의 논란에도 '중도 보수' 스탠스를 고수하는 배경에는 합리적 보수까지 끌어안아 조기 대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는 전략적 판단이 깔려 있다. 국민의힘이 불법 계엄을 선포한 윤석열 대통령을 두둔하고 헌정질서를 부정하는 등 극단적 행보를 보이면서 갈 곳 잃은 중도와 합리적 보수의 표심을 흡수하겠다는 것이다. '주인 없는 곳간'을 선점해 들어가 산토끼를 모두 끌어안겠다는 구상이다.
당장 이 대표가 성장과 감세 등 보수 이슈를 선점해 온 상황에서 보수 우클릭의 진정성을 어필하는 데도 유리하다는 평가다. 한 친명계 재선 의원은 "국민의힘의 극우 행보에 거부감을 보이는 중도 보수 표심을 흡수하는 데 이 대표의 포지셔닝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정체성 논란이 가열될수록 이 대표에게 나쁠 게 없다고 자신했다. '극우 세력 고사' 작전을 펼칠수록 '진짜 보수' '가짜 보수' 논쟁이 불붙을 수 있다는 계산이다.
당 내부에선 이 대표의 '보수 정벌' 구상이 집권 후 대연정까지 염두에 둔 포석 아니냐는 해석까지 나왔다. 탄핵 등을 둘러싸고 나라가 두 동강 난 상황에서, '내란 반대' '헌정 수호' 세력을 한데 뭉쳐 국민 통합도 노려볼 수 있다는 계산이다. 김대중 정부 탄생의 일등공신인 'DJP 연합'을 벤치마킹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친명계 좌장인 정성호 의원은 이날 SBS라디오에서 "김 전 대통령도 집권을 위해 DJP(김대중·김종필) 연합도 하고, 보수적인 분과도 함께하지 않았나"라며 "그렇게 국민을 통합했기에 IMF 외환위기도 극복했다"고 강조했다.
'정의당 전멸'로 진보정당 낮은 존재감도 한몫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지난해 4월 11일 국회 소통관에서 22대 총선 결과 관련 입장 발표 기자회견을 하던 중 울먹이고 있다. 심 의원은 이날 "진보정치 소임을 내려 놓는다"며 정계 은퇴 의사를 밝혔다. 연합뉴스
이 대표가 거침없이 '중도 보수 정벌'을 치고 나온 데는 지난 대선과 총선을 거치면서 전멸하다시피 한 진보 정당의 낮은 존재감도 불가피하게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의당을 비롯한 진보 계열 정당이 더 이상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 대표로선 좌측 후방을 신경 쓰지 않고, 보수 외연 확장에 더 공을 들일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한 친명계 인사는 "심상정이나 조국 등 대표 주자가 사라진 진보 진영 입장에선 이재명 말고는 선택할 대안이 없지 않느냐"고 했다.
그러나 당내에선 '진보 홀대'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고민정 의원은 이날 MBC 라디오에 나와 "민주당이 진보에서 중도, 보수까지 다 감당해야 한다면 당내에서 진보 영역을 담당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굉장히 강하게 표출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며 "자칫 잘못하다간 진보 섹터를 완전히 없애는 효과를 의도치 않게 발생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장혜영 전 정의당 의원도 "기어코 위성정당으로 진보정당들의 독자 세력화를 변질시키거나 주저앉혀 ‘진보’가 궤멸되니 이제 민주당은 자기가 '보수'라고 하느냐"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당내 반발 목소리도 가라앉지 않고 있다. 86세대를 대표하는 이인영 의원은 "민주당은 국민의힘이 아니다. 실용을 넘어 보수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백번을 되물어도 동의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김부겸 전 국무총리도 YTN 라디오에 나와 "하루아침에 중도·보수 정당이라고 한 것은 적절치 못했다"며 "민주당이 진보적 영역을 담당해 왔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