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형 전 국군방첩사령관과 조태용 국정원장이 지난해 12월7일 국회 정보위원회 회의장 앞에서 웃으며 인사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여인형 전 국군방첩사령관이 12·3 비상계엄 이후 “비상계엄을 막지 못한 국무위원들이 원망스럽다”는 취지로 발언한 것으로 확인됐다. 여 전 사령관은 계엄 이후 ‘비상계엄에 반대했지만 어쩔 수 없이 지시를 따랐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책임을 윗선에 돌리고 있는데, 정작 비상계엄 당시에는 부하들에게 임무를 내리면서 “적법하게 지시받았다”고 강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20일 경향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검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본부(본부장 박세현 서울고검장)는 지난해 12월11일 여 전 사령관의 수행부관 A씨를 불러 조사하면서 “최근 여 사령관이 푸념식으로 ‘국무위원들이 심의를 했다는데 계엄 선포를 하게 두었는지 원망스럽다’고 말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위법한 비상계엄 선포 책임을 국무위원에게 돌리면서 여 전 사령관 자신은 계엄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는 의사를 에둘러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검찰은 여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직전에도 참모들에게 “비상 상황이 되면 군이 따를까” “어르신들이 반대하겠지”라고 언급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여기서 ‘어르신’도 비상계엄 선포 여부를 심의하는 국무위원을 지칭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비상계엄 당시 여 전 사령관의 지시를 받아 군사 작전을 전개한 현장 지휘관들의 진술을 보면 여 전 사령관은 위법한 임무를 하달하면서 지시의 적법성을 오히려 강조하는 등 당시 윤석열 대통령 등의 명령을 적극 수행하려 한 정황이 발견된다.
지난 18일 윤 대통령 탄핵심판 9차 변론에서 언급된 정성우 전 방첩사 1처장의 수사 기록에 따르면 여 전 사령관이 정 전 처장에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서버 확보 등을 지시하면서 “대통령·장관으로부터 적법하게 지시받은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계엄 상황에서도 계엄군이 헌법 기관인 선관위를 무단 장악하는 것은 불법이다. 계엄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지시에 소극적으로 따랐다는 여 전 사령관의 주장과 충돌하는 대목이다.
여 전 사령관은 계엄 상황에서 발생한 일련의 군사 행위가 위법한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주장도 펼치고 있다. 여 전 사령관은 지난 4일 첫 공판준비기일에 출석해 “TV로 생중계되는 그 짧은 순간에 비상계엄이 위법한지, 평생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내란 행위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검찰은 여 전 사령관 주변 인물들을 조사하면서 그가 비상계엄의 위법성을 뚜렷이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에 대한 수사까지 대비했다는 증거를 여럿 확보했다. 검찰은 앞서 정 전 처장이 비상계엄 이후 여 전 사령관의 말을 받아 적은 메모를 확보했는데, 정 전 처장은 이에 관해 설명하면서 “(여 전) 사령관이 ‘방첩사의 가장 큰 리스크는 (체포 대상) 신병 확보를 위한 명단 작성이고 선관위 등 4개소 투입은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진술)하면 된다’고 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확인됐다. 여 전 사령관은 또 “비상계엄을 사전에 몰랐다”는 취지의 문건을 만들라고 참모들에게 지시한 것으로도 조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