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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일본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 카메라가 진을 친 가운데 등장한 이 남자는 대만의 리덩후이 전 총통입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차이잉원 현 대만 총통의 정치적 멘토로 유명한 대만 정치계의 거물이죠. 그리고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곳 야스쿠니 신사는, A급 전범이 합사된 일본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장소이고, 그래서 일본의 총리조차 현직일 때는 주변국 눈치를 보며 참배까지는 하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런 곳에, 비록 전직이지만 대만의 최고 지도자가 이렇게 일장기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공개 참배를 했다는 건데, 대만이 50년간이나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은 나라란 걸 고려하면, 정말 놀라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며칠 대만 여행만 해도, 대만에 한국식의 반일 감정 같은 게 아예 없거나 있어도 아주 희박하다는 건 금방 눈치챌 수 있습니다. 대만 사람들은 일본이 깨끗하고 예의 바르다고 생각하고, 일본에 자주 여행을 다니고. 과거사에 대해서는, 일본이 식민지배를 하면서 대만에 좋은 일을 많이 해줬다고 고마워하기까지 하죠. 대만인들 가운데는, 한국은 왜 그렇게 일본을 미워하는거냐고 도리어 반일감정이 심한 한국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국과 대만이 일본을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다른지를 보려면 일제 총독부 건물을 보면 됩니다.

한국은 일제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옛날 조선총독부 건물을 폭파시켰잖아요. 대만총독부 건물은 별다른 논란 없이 아직까지 건재합니다. 일본을 상징하는 날 일(日)자 모양으로 건축된 건물인데도, 식민지 시절 건물 원형 거의 그대로 이렇게, 오늘날까지 총통 관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일제가 남긴 흔적은, 타이베이 도심의 일본식 가옥과 음식, 스포츠나 온천 같은, 대만인들의 일상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에게도 그런 흔적은 많이 남아있지만 우리는 그런 흔적들이 남아있는 걸 대체로 부끄러워하고, 비교적 빠르게 일제의 문화적 잔재를 지워나갔다는 점에서 태도는 확연히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올해초 흥행 대박이 난 한국 영화와 대만의 대표적인 예술 영화, 두 개를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데요, 두 나라가 일제시대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그 차이를 제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대만 영화 '비정성시'(위)와 한국 영화 '파묘'(아래) 중.

‘비정성시’ 속 일본 식민시절은 아름다운 일본식 가옥과 전통의상, 일본어 대사를 통해서 향수의 대상으로 그려지는 반면에, ‘파묘’ 속 일제의 흔적은 ‘겁나 험한 걸’로 그려집니다.

무엇보다도 대만인들의 친일 정서를 보여주는 건 앞에서 언급한, 신사참배의 주인공 리덩후이입니다. 일제 때 유년기를 보낸 탓에 표준 중국어보다 일본어를 더 자유롭게 사용하는 리덩후이는, 아버지는 일본 순사 출신, 형은 2차대전 때 일제 학도병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했고, 본인도 일본군 소위로 복무한 전력이 있는데, 이런 사실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자랑스러워합니다.

열렬한 무사도 신봉자로 사무라이 복장으로 홍보사진을 찍고 “센카쿠열도는 일본땅”이라는 공개 발언을, 이렇게 일본어로 할 정도입니다. 한국에서라면 “다케시마는 일본땅”이라고 말하는 정치인이 용납될 수 있었겠습니까.

대만의 아이러니는, 한국인 시선으로는 민족 반역자처럼 보이는 이 인물이, 대만을 민주주의로 이끈 영웅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대만은 19세기말부터 50년간이나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은 아픈 역사가 있고, 일제가 패망하고 몇년 뒤엔, 마오쩌둥과의 국공내전에 패한 장제스가 국민당을 이끌고 대만으로 건너오면서 장제스 부자의 혹독한 독재체제를 겪게 됩니다. 변화가 시작된 건 1988년이었고, 그 중심에는 문제의 인물 리덩후이가 있었습니다. 장제스 아들 장징궈의 낙점을 받고 부총통에 발탁됐던 리덩후이는 장징궈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총통 자리를 이어받고는 직선제를 도입하는 뜻밖의 행보를 하게 됩니다.

덕분에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야권 세력이 성장했고, 이후 대만 최초로 선거를 통한 여야 정권교체가 이뤄지게 되죠. 사실상 위로부터의 민주화였으니, 리덩후이가 서구에서 ‘미스터 민주주의’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는 친일파와 보수, 군사독재가 대체로 한묶음으로 여겨지고 실제 뿌리도 비슷한 반면에, 대만에서는 친일이 진보나 민주주의를 떠올리게 하는데, 이렇게 된 데는 리덩후이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배경에는 리덩후이 같은 인물을 탄생시키고 키워낸, 대만의 특수한 역사가 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일 겁니다.

일단 대만이 98% 한족의 나라인 건 맞습니다. 중국과 같은 민족인거죠. 하지만 들여다보면 구성이 단일하지는 않습니다. 이 98%는 다시, 대륙에서 넘어온 시기에 따라, 장제스가 건너온 1949년을 전후로 대만에 왔다면 외성인, 그 전인 명말이나 청나라 때 건너왔다면 본성인으로 분류됩니다. 대만 사회의 주류는 이중에서도 200~300년쯤 먼저 정착한 본성인들이고, 이들은 일제가 망한 뒤 들어온 국민당, 다시말해 외성인들을 민족 해방자로 여겼다기보다는, 또 다른 외지인 지배자로 받아들였다는 게 많은 전문가들의 해석입니다. 그러니까 대만인들이 지금 본토 중국에 대해 느끼는 이질감은, 따지자면 본성인들이 외성인들에게 느끼는 거리감을 그 뿌리로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대만은 17세기 초반에는 스페인·네덜란드가, 이어서 잠시 명나라 세력이 들어왔다가, 다시 만주족의 청나라와 일본이 번갈아 지배하는 식으로, 끊임없이 외세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대만섬의 진짜 원주민들은 인구의 2%까지 줄어들며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초창기엔 같은 한족인 국민당에 대한 기대가 없지 않았습니다. 기대를 짓밟은 건 2·28사건이었습니다. 국민당 통치가 시작됐을 때 본토의 중국인들은 대만사람들을 일제 부역자 취급을 하며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고, 정부 고위직과 비즈니스를 독점하면서 현지인들과 갈등을 빚기 시작했어요. 그러던 중 담배 밀수꾼 단속 과정에서 대만인이 총에 맞아 죽는 사건이 벌어지고, 사태는 주장에 따라서는 최대 3만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전해진, 2·28사건으로 번지게 되죠.
1947년 2월 28일부터 같은 해 5월 16일까지 대만 전역에서 일어난 민중봉기 사건.

국민당 지배가 대학살극으로 시작된 셈이어서, 이후 대만인들에게는, 국민당이 일제보다 잔혹하다는 인식이 생겨납니다. 이후 계엄령이 무려 38년간이나 계속된 백색테러의 시대를 거치면서, 이런 생각은 대만 사회에 깊이 뿌리내렸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대만이 식민지 시절을 상대적으로 우호적으로 평가하는 또 다른 이유로, 실제 일제의 대만 지배가 조선과 달랐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일본에 대만은 첫 식민지였고, 그래서 일본인들은 대만을 일본에 쌀과 설탕을 공급하는 농업생산지이자, 일종의 ‘모델 식민지’로 성공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투자를 했고, 체제 자체도 덜 억압적이었다는 겁니다. 조선의 경우 10명의 총독이 모두 군인 출신이었던 것과 달리, 대만의 경우 1920~30년대에는 문관이 총독으로 부임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차이 때문일까요? 대만에서 일제 잔재 청산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크지 않습니다.

오히려 독재자였던 장제스의 유산을 두고 논란이 훨씬 거세서 한때 대만 곳곳에 세워졌던 장제스 동상은 이렇게 공원 구석으로 치워졌고, 장제스를 기념하는 국립중정기념당에서는 주기적으로 항의 시위가 열립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엔 지금처럼 반중 정서가 강했던 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쨌든 같은 민족이니까요. 1990년대 초반만 해도 대만인들 다수는 스스로를 중국인이자 대만인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 비율은 이렇게 급격하게 줄었고 반대로 대만인의 정체성은 급상승해서, 현재는 이렇게 압도적인 다수가 스스로를 중국인이 아니라 대만인이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변화는 두가지 측면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요, 이 즈음 대만은 직선제로 총통을 뽑고, 최초로 평화적 정권교체에 성공하면서, 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하는데 성공하는데, 이게 대만인이라는 자부심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반대편에서는, 개혁개방에 나선 중국이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대만이 중국에 예속될지 모른다는 위기감도 함께 커졌습니다.

친중세력인 국민당이 집권하던 2014년에는 중국과의 밀실 무역협정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점거시위가 벌어졌는데, 갈수록 커져가는 중국의 영향력에 대한 젊은 세대의 반발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2019년 홍콩 사태가 발발하죠. 민주화를 요구하는 홍콩 시위대에 대한 중국 당국의 무자비한 탄압을 지켜본 대만인들 사이에서는 반중 정서가 폭발하게 됩니다. 홍콩 사태 덕에, 인기가 하락하던 차이잉원 총통은 이듬해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재선에 성공하고, 이후 차이잉원 재임 기간 내내 반중 정서는 커졌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흐름 속에서 치러진 지난 1월 대만의 총통 선거는, 향후 양안 관계와 여기에 영향을 받게 될 동북아시아 정세까지 함께 가늠해볼 중요한 시험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과는 예상 그대로였습니다. 친미·독립파인 민진당(DPP) 라이칭더 후보가 친중 국민당(KMT)의 허우유이 후보를 여유있게 제치고 총통에 당선됐습니다. 대만인들의 선택은 분명하게 반중국이었던 겁니다.

이런 결과는, 한편으로 예상된 것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놀라운 선택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간 친중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한 중국의 위협이 워낙 노골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선거 전 군용기와 군함을 대거 출격시키는 무력시위를 벌였고, 직전에는 항공모함인 푸젠함 영상까지 전격 공개했습니다. 푸젠함은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할 비장의 무기여서 이건 정말 전쟁 협박이었습니다. 하지만 대만인들은 흔들리지 않았죠. 무엇보다 2000년 이후 친중 국민당과 반중 민진당이 8년 단위로 번갈아 정권을 잡던 관행이 깨진 거여서 시진핑이 대만에 일격을 당했다는 해석까지 나왔습니다.

그러면 정말 대만 사람들은 독립을 위해 중국과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결심한 걸까요? 드러난 선거 결과만 보면 그런 해석이 맞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대만인들의 속내는 훨씬 복잡하고 신중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우크라이나 전쟁 같은 일이 대만 땅에서 벌어지는 겁니다. 대만인들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 일본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실제 중국이 전쟁을 결심하면 결국 최대 피해자는 대만인들이 될 거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만을 지키기 위해 미국 일본과 친해져야 하지만, 중국을 필요 이상으로 자극하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오는 5월 대만에 새 총통이 취임한 뒤 우리가 보게 될 것은 그런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대만의 선택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한국 역시 미·중·일 3국 사이에서, 대만만큼이나 어려운 선택을 요구받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그들의 선택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어려운 시대의 어려운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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