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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못살겠다, 갈아보자.”

지지리 가난했던 1956년 치러진 대통령 선거. 야당 후보 신익희가 내건 슬로건입니다. 직관적인 데다 행동 지침까지 담겨 있었습니다. 시대상, 정체성, 유권자들과의 교감이라는 좋은 슬로건의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어 지금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신익희 후보가 선거기간 중 급사해 당선되진 못했지만 슬로건만은 남았습니다. 이에 응수한 여당 후보 이승만의 슬로건은 “갈아봤자, 더 못산다”였습니다. 변명 같지만 위트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선거철입니다. 머리도 쉬어갈 겸 한국과 미국 대통령 선거의 전설적 슬로건을 돌아볼까 합니다. 어떤 슬로건이 생각나시는지요.
직선제가 부활한 1987년 여당 후보 노태우는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를 내걸었습니다. 군사반란의 주역이라는 과거를, 친근함이라는 이미지 전략으로 덮어버렸습니다. 그 덕에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한국 정치사에서 손꼽히는 슬로건으로 평가받습니다.

외환위기 와중에 치러진 1997년 대선. 김대중 후보는 “경제를 살립시다”를 내걸었습니다. 더 강조한 구호는 “준비된 대통령”이었습니다. 4번째 대권 도전이라는 약점을 ‘경험이 풍부한’이란 이미지로 전환한 역전의 슬로건이었습니다. 좋은 스토리가 구전되듯, 좋은 슬로건은 다시 부름을 받습니다.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는 이를 차용, ‘준비된 여성 대통령’을 내걸었습니다. 19대 때 문재인 후보도 “준비된 대통령”을 슬로건으로 썼습니다.

대통령이 되지 못했지만 기억나는 슬로건도 몇 개 있습니다. 손학규의 “저녁이 있는 삶”, 서울시장 선거에서 박원순 후보가 들고 나온 “내 삶을 바꾸는 시장”은 구체적이고 인간적인 서사가 있는 슬로건이었습니다.

또 코믹하지만 2007년 기호 8번으로 등록한 허경영의 슬로건도 기억납니다. “8번을 찍으면 팔자가 핍니다.” 그는 결혼수당 1억원, 출산수당 3000만원을 공약했습니다. 시대를 너무 앞선(?) 공약이었던 듯합니다.

미국에서는 빌 클린턴의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가 있습니다. 선거캠프 워룸에 붙어 있던 이 메모는 핵심 메시지에서 슬로건을 넘어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또 버락 오바마의 “Change. Yes, We Can”은 그 시대의 밈이 됐습니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를 다시 내걸고 당선됐습니다. 1980년 로널드 레이건의 슬로건을 그대로 가져다 썼습니다. 레이건은 이 선거에서 “Are you better off than you were four years ago?(당신의 삶은 4년 전에 비해 나아지셨습니까)”란 슬로건도 남겼습니다. 국내에서는 2002년 권영길 후보가 각색해 “국민 여러분,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로 화제가 됐습니다.

레이건이 재선에 성공한 1984년 사용한 “It’s morning again in America(다시 맞은 미국의 아침)”이란 슬로건도 성공적이라고 평가받았습니다. ‘저녁이 있는 삶’과 결이 비슷해 보입니다. 이처럼 좋은 슬로건은 시간이 흘러도 살아남고 새롭게 태어납니다.

슬로건은 잊혀졌지만 그 후보가 남긴 정서나 장면은 오히려 더 강렬하게 기억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2002년 한국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의 슬로건은 “새로운 대한민국”이었습니다.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타를 치며 ‘상록수’를 부르는 그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어떤 이들은 슬로건을 ‘감정의 암호’라 부르기도 합니다. 슬로건과 후보자의 삶이 자연스럽게 겹쳐질 때 각인 효과가 극대화되는 이유입니다.

“삶 자체가 메시지”인 후보를 유권자들이 원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오바마는 피부색, 성장 배경, 언어감각 등을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완성했습니다.

올해 대선에서 여론조사 1, 2위 후보는 “이제는 진짜 대한민국, 지금은 이재명”, “새롭게 대한민국, 정정당당 김문수”로 맞붙고 있습니다. 나름 의미를 찾으려는 흔적은 보입니다. 다만 그들이 만들고 싶은 세상의 풍경은 슬로건만으로는 잘 읽히지 않습니다. 계엄이라는 퇴행적이며 파괴적 행위, 그리고 이어진 탄핵의 결과로 벌어지는 선거여서 방어적이며 모호해 보입니다. 다음 대선에서는 희망과 미래가 담긴 슬로건이 유권자들의 마음을 흔들 수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한경비즈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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