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서울 미아역 흉기난동이 발생한 마트 앞에 마련된 추모 공간. 윤예솔 기자
직장인 김모(30)씨는 지난달 24일 서울 미아역 흉기 난동이 발생한 마트 앞에 마련된 추모 공간을 찾았다. 그런데 옆에 서 있던 A씨가 갑자기 추모 메시지가 쓰여있는 쪽지들을 떼어 마구 구기기 시작했다. 김씨가 A씨에게 “다른 사람의 메시지를 왜 찢으시냐”고 묻자, A씨는 “여성 단체가 이득을 보려고 이런 공간을 만든 것”이라고 욕설을 쏟으며 몸싸움을 걸었다고 한다. 김씨는 A씨를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의 제지로 상황이 마무리됐다.
여성단체들은 지난달 22일 서울 강북구 미아역 인근의 한 마트에서 발생한 흉기 난동 사건을 ‘여성 혐오 범죄’로 보고 추모하고 있다. 추모공간을 찾아와 시비를 거는 남성들이 등장하면서 2016년 ‘강남역 사건’때처럼 성별 갈등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흉기 난동이 벌어진 마트 앞에는 사건 발생 이튿날부터 추모공간이 조성됐다. 인근 주민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국화꽃과 음료수, 음식 등을 놓고 묵념을 하거나, 메시지를 담은 쪽지를 붙이며 마음을 전했다.
여성단체들은 김성진(32)이 흉기 난동을 벌여 60대 여성을 살해하고, 40대 여성을 다치게 한 범죄 이면에 ‘여성 혐오’가 작용했다고 본다. 박진숙 여성의당 비대위원장은 “강남역 살인사건 9주기를 앞두고 또 여성이 다치는 범죄가 발생했다. 아직도 여성들은 모든 일상 속에서 위협을 당하고 있다”며 “이번 사건은 ‘묻지마 범죄’가 아니라 ‘여성 테러 범죄’로 규정해야 한다. 구조적 폭력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오는 17일 미아역 인근에서 여성단체 주도로 대규모 추모 집회가 열릴 예정이다.
지난 29일 미아역 흉기난동이 발생한 마트 앞 추모 장소에 여성단체들에 항의하는 쪽지가 붙어있는 모습. 독자 제공
미아역 추모 공간에는 이 같은 여성단체 주장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일부 등장한다. 추모 쪽지들이 붙어있는 폼보드에 ‘꼴페미들아 뭐 얻을 게 있다고 X 묻히냐 꺼져’라는 메시지가 붙었다. 고인에 대한 애도의 마음이 담긴 쪽지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메시지들이 발견됐다. 파란색 종이에 ‘추모를 빙자해 남성 혐오 편견 여론을 조장하는 여성단체는 빠지길 바란다’며 ‘ 남혐 굿판을 중단하라’는 메시지가 붙어있기도 했다.
추모 공간을 찾는 시민들은 이런 갈등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인근 주민 김모(58)씨는 “조용한 동네에 큰 사고가 일어난 것도 놀랐는데, 피해자의 죽음을 조롱하는 상황에 더 놀랐다”며 “가해자가 경찰이나 남성들에게 흉기를 휘두르지 않은 건 사실이지 않느냐”고 말했다. 대학생 장모(26)씨는 “같은 남성이지만 여전히 여성이 범죄 피해자가 되는 사례가 많은 걸 보면 구조적 문제가 있는 것 같다”며 “고인에 대한 추모 공간을 갈등의 장으로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윤김지영 창원대 철학과 교수는 “누군가 이 사건에 대해 나름대로 이름을 붙이고 개념을 정의하는 상황을 방해하는 것 자체도 하나의 폭력”이라며 “피해자에 대한 애도의 마음을 전하러 온 시민들도 자신의 행위가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느끼게 돼 추모 공간의 근본적인 의미가 퇴색될 우려가 깊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