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웰치는 20세기 가장 탁월한 최고경영자(CEO)로 꼽힌다. 1981년부터 2001년까지 GE(제너럴일렉트릭) CEO를 지내면서 연평균 주주수익률 20.9% 창출했다. 하지만 윌리엄 손다이크는 저서 ‘현금의 재발견’(원제 The Outsiders)에서 “잭 웰치가 최고의 CEO는 아니다”고 단언했다. 그가 재임하던 시절 S&P500 지수가 연평균 14% 오를 정도의 강세장이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손다이크가 잭 웰치를 능가하는 CEO로 꼽은 사람은 헨리 싱글턴 텔레다인 창업자다. 세계적인 수학자였던 싱글턴은 1960년 기술기업 텔레다인을 창업한 뒤 28년간 경영했다. 이 기간 연평균 20.4%의 수익률을 냈다. 같은 기간 강세장과 약세장을 오락가락한 시장 평균수익률의 12배였다.
손다이크는 싱글턴의 성공 비결로 관성에서 탈피한 역발상 경영을 꼽았다. 특히 당시엔 생소했던 자본배분 능력이 압도적이라고 분석했다. 싱글턴은 10여 년에 걸쳐 자사주 90%를 사들였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뉴욕증시에서 가장 비싼 종목이었지만 주식분할도 하지 않았다. 본업 경영은 현장에 맡기고 자신은 자본배분에 전념했다. 철저히 분권화된 조직을 운영하면서 월가에 얼굴도 내비치지 않아 ‘운둔의 경영자’로 통했다. 잭 웰치를 비롯해 당시 내로라하는 CEO들과는 정반대 행보였다.
그렇다면 국내에서 싱글턴과 가장 닮은 기업인은 누구일까. 다름 아닌 조정호 메리츠금융 회장이다. 조 회장은 한진그룹 창업주 고(故) 조중훈 회장의 막내아들(4남)이다. 본인 말을 빌리면 (형들에게 나눠주고) 남은 회사인 금융 계열사(당시 한진투자증권과 동양화재)를 물려받았다. 계열분리 당시인 2005년 메리츠금융 자산은 3조3000억원에 불과했다. 2024년 말에는 115조6000억원으로 불어났다. 시가총액은 은행계 금융지주사를 능가했다.
조 회장 개인도 대박을 쳤다. 지난 3월 6일 기준으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제치고 국내 최고 주식부자로 등극했다(한국CXO연구소). 작년 1320억원의 배당금을 받아 1위를 기록했다.
이런 성과를 낸 비결은 이미 여러 군데서 분석한 것과 같다. 승계 포기와 소유와 경영의 분리, 현장 중심의 본업 경영과 그룹 차원의 자본배분, 주주환원 정책, 인재 영입, 철저한 성과주의 등이다. 조 회장은 화재와 증권의 상장을 폐지하고 메리츠금융지주만 상장하는 ‘원메리츠’를 완성했다. 냉철한 투자 전략으로 작년 연결기준 3조원이 넘는 영업이익을 냈다. 이렇게 번 순이익의 53%를 자사주 매입과 배당에 사용했다. 직원들에겐 연봉의 60%가량을 성과급으로 지급했다. 자회사 쪼개기, 중복상장, 유상증자. 쥐꼬리 배당이 연상되는 다른 대기업과는 판이하다.
이런 조 회장에게도 고비는 있었다. 지난 2013년 국정감사에서 증인으로 채택됐다. 메리츠지주, 화재, 증권 등 3개사에서 중복해 성과급을 받았다는 이유에서다. 당시엔 비일비재한 일이었지만 성과급을 반납하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고서야 증인에서 빠질 수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경영철학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게 주변의 분석이다.
물론 기업마다 환경이 다르다. 어렵게 일군 기업을 상속하지 말라고 강요할 순 없다. 천문학적인 투자가 필요한 제조업에 강력한 주주환원 정책을 실시하고 강권하기도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세전쟁, 내수 부진, 정국 혼란으로 가뜩이나 시름이 깊어지는 기업들로선 조 회장의 역발상 경영을 한번쯤 살펴볼 만하다.
하영춘 한경비즈니스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