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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오래전 튀르키예인 친구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시민단체 주관으로 의회에서 헌법재판소까지 단축마라톤 경기가 열린다는 것이었다. 왜 하필 의회에서 헌재까지냐고 물었더니, 정치가 하라는 대화와 타협은 안 하고 사사건건 헌재에 판결해달라고 뛰어가기 일쑤이니 그럴 바에는 차라리 헌재까지 누가 빨리 뛰는지 시합이라도 해보자는 취지란다. 정치의 사법화가 낳은 코미디일 것이다. 이 극단적 상황을 농담으로 승화할 수 있는 튀르키예인들의 품위에 감탄하면서도, 우리라고 별로 다를 것도 없어서 쓴웃음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이재명 후보 피선거권 문제 혼란
국가운명을 판사 몇 명에게 맡긴 셈
정치 사법화가 사법 정치화 초래
대법원 재판에서 품격 결론 기대

이재명 전 대표의 사법 리스크가 그의 대권가도에 걸림돌이 될 것인지 아닌지는 몇 년 전부터 초미의 관심사였다. 법학자, 변호사, 법조계 출신 정치인 등 꽤 많은 사람과 이 문제를 놓고 사석에서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다수의 전문가는 혐의 중 일부는 유죄일 것이라는 취지의 의견을 냈고, 그러나 대선 이전에 판결이 확정되기는 쉽지 않으리라고 예상했다. 이 전 대표 측에서 최대한 지연 작전을 쓸 것이 분명하기도 하고, 재판부로서도 이 사건은 너무나 부담스러워서 가능한 한 미루고 싶어 할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렇다면 어차피 확정판결은 대선 전후에 이루어질 가능성이 큰 것이었고, 이것은 커다란 정치적 혼란을 예약해둔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선 직전에 제1야당의 대선 후보가 피선거권을 박탈당한다면 어찌 될 것인가. 혹은 그가 당선될 경우 갓 취임한 대통령에 대한 재판을 계속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논쟁부터 시작해서, 만약 당선무효에 해당하는 판결이 나올 경우의 혼란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상황이 될 것이라는 걸 몇 년 전부터 다들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어떤 대책도 세우려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가져오는 최악의 문제점은 국가의 운명을 몇 명의 판사들이 결정하게 된다는 점이다. 원래부터 입법부와 사법부의 작동 원리는 다르게 설계되어 있다. 입법부는 다수의 투표에 근거한 대의 민주주의의 원리 하에 작동하지만, 사법부는 숫자 많다고 옳은 것이 아니라 법리와 판례에 맞아야 옳다고 인정한다. 민주주의를 다수제라는 관점에서만 본다면 사법부는 원래부터 비민주적으로 설계된 제도이다. 하지만 입법부로부터 독립적인 사법부의 비민주적인 역할이 바로 서야 나라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국무위원에 대한 30건의 탄핵, 현직 대통령 탄핵, 대선이 40일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지지율 1위 후보의 출마 자격 결정, 혹시 그가 당선될 경우 대통령직 수행 여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단 몇 명의 판사들에게 운명을 맡겨왔다. 이렇게 되리라는 걸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정치의 사법화 그 뒷면은 사법의 정치화이다. 정치 현안이 정치 행위에 의해 해결되지 않고 어차피 사법부로 뛰어갈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는 정당들은 자기 편의 재판관을 한 명이라도 더 밀어 넣으려 혈안이 된다. 민주당이 마은혁 헌법재판관 임명을 그리도 강하게 요구하고, 한덕수 권한대행의 헌법재판관 임명에 대해 그토록 반발했던 이유이다. 그러니 정치의 사법화는 사법의 정치화를 가져온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람들이 비민주적인 사법체계를 왜 받아들이는가이다. 투표해서 뽑지도 않은 판사 몇 명이 국가와 개인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을 사람들은 왜 받아들일까. 그것은 사법의 논리가 입법의 논리로부터 독립적이기 때문이다. 정치가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마지막 순간에 사법부는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는 올바른 판단을 해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사람들은 비민주적 제도를 받아들인다. 그런데 정치의 사법화로 인해 사법의 정치화가 만연하면 사법의 논리와 입법의 논리는 자웅동체가 되어버리고, 국민들은 사법부를 신뢰해야 할 이유를 잃게 된다. 최근 여러 조사에서 사법부 신뢰가 눈에 띄게 하락한 점은 눈여겨보아야 할 일이다.

이런 말로 위안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만 혼돈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성추문과 대선 결과 뒤집기 시도 등 훨씬 심각한 사법 리스크를 안은 채로 대선에 승리했고, 대통령에 대한 강력한 면책특권을 보장하는 미국 사법체계의 특성상 아마도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런가 하면 2027년으로 예정된 프랑스 대선 지지율 1위를 달리던 마리 르펜은 1심이긴 하지만 지난달에 피선거권을 박탈당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랄까.

만시지탄이지만 조희대 대법원이 이 전 대표의 선거법 재판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하고 오늘 바로 재판을 속행한다는 소식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선 전에 유의미한 결론이 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선거에 미치는 영향과는 별개로, 이 나라의 입법과 사법의 관계를 다시 한번 바로 세우는 품격 있는 결론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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