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정소현 인턴
" “영어만 되면 박사학위 받고 대부분 해외 가죠. 미국이 선호 1순위지만, 중국도 실력이 많이 올라와 다들 관심이 많아요.” "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인공지능(AI) 분야 박사과정 중인 A씨는 중국 연구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연봉도 많지만 커리어와 연구 환경이 특히 매력적”이라고 했다.
이공계 인재들의 진로 지형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 연구 여건이 좋은 미국행을 택하는 건 물론, 성장 속도가 빠른 중국으로 눈을 돌리는 흐름이 뚜렷해졌다. 이들은 한국의 첨단기술 연구개발직에 대해 ▶경력 관리 ▶연봉 ▶연구·취업 환경 등에서 모두 경쟁국에 밀리고 있다고 말한다. 익명을 요청한 수도권 반도체 관련 학과 교수는 “중국 디스플레이 업체가 고액 연봉에, 주택, 자녀 교육비, 생활비까지 다 지원해 주겠다며 이직을 제안한 적이 있다”며 “중국은 필요한 인력은 어떻게든 데려가서 5년 연구할 일을 1년으로 줄이려 한다”고 전했다.
정근영 디자이너
한국의 이공계 인력 자체는 늘었다. 교육통계서비스(KESS)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에선 4872명의 공학박사가 배출됐고, 자연계열까지 합한 이공계 박사 졸업자는 총 7664명이다. 2014년 5523명(공학계열 3171명, 자연계열 2352명)보다 38.8% 증가했다.
문제는 이들에게 한국이 연구·취업 무대로서의 매력을 잃었다는 거다. KAIST 이공계 박사 졸업자의 연도별 취업 자료(김성원 국민의힘 의원)를 보면 2015년 89.5%(522명 중 467명)였던 국내 취업 비중은 2023년 77.6%(691명 중 536명)로 하락했다. 같은 기간 해외 취업 비중은 5.9%(31명)에서 16.9%(117명)로 크게 뛰었다.
가장 큰 이유는 연봉이다. 미국의 연봉 비교 사이트 레벨스(levels.FYI)에 따르면, 한국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의 평균 연봉은 8700만원인 데 반해 미국 실리콘밸리 개발자는 3억6600만원, 중국 개발자는 1억500만원을 받는다. 폐쇄적인 조직문화에, 경력 개발의 폭이 넓지 않은 점도 한계로 지적된다.
정근영 디자이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윤석열 정부가 주도한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이 연구원들을 해외로 내몰았다. 2024년 국가 R&D 예산(총 21조9000억원)은 1년 만에 전년보다 11.3%(2조8000억원) 줄었다. 정부 출연 연구기관과 대학 연구실들이 인건비 등 예산 부족으로 진행하던 연구를 줄줄이 중단해야 했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학과 교수는 “당시 인재 양성 과제비의 83%가 깎이고 연구개발비는 20%가 깎였다”며 “연구의 연속성이 떨어졌다”고 말했다. 올해 R&D 예산은 24조8000억원으로 복원됐지만 후유증이 크다. 이 교수는 “가뜩이나 의대 쏠림 현상이 심한 상황에서, 이공계 연구자들의 사기가 크게 꺾였다”고 말했다. 엄미정 과학기술인재정책센터 센터장은 “한국을 왜 떠났냐가 아니라 ‘왜 남았냐’를 물어보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정부도 뒤늦게 첨단산업 분야 글로벌 최우수 인재와 그 가족의 체류 문턱을 낮추는 ‘톱티어(Top-Tier) 비자’ 제도와 이공계 대학원생의 연구 생활을 지원하는 장려금 등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엄 센터장은 “이공계로 이미 들어온 인재들을 어떻게 지키고 키울 것이냐가 중요하다”며 “기업도 이공계 인재의 성장에 투자하고, 이들이 성공하는 모델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