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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모씨가 부산 서면에서 열린 집회 이후 동료들과 ‘개빡친 퀴어’ 깃발을 들고 사진을 찍고 있다. 류모씨 제공


12·3 불법계엄 사태 이후 ‘윤석열 탄핵’을 촉구했던 광장에는 수많은 깃발이 펄럭였다. 20대 후반 트랜스젠더 남성 류모씨는 지난해 12월4일부터 고향 부산의 광장에서 ‘개빡친 퀴어’라는 문구를 적은 대형 무지개 깃발을 만들어 흔들었다. 류씨는 “성소수자도 함께 분노해 광장에 나와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류씨처럼 ‘논바이너리’(Nonbinary·이분법적 성별 구분에서 벗어난 정체성) 성별인 윤시우씨(29)도 대전에서 ‘성소수자를 차별하지 마세요. 우리의 친구일 수도 있는 게 아니라 나다! 나라고 이자식들아!’라고 적은 깃발을 들고 광장으로 나섰다.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서 퀴어로 살아가며 광장에서 정체성을 드러내고 깃발을 들었던 류씨와 윤씨를 지난 20일 전화로 인터뷰했다. 두 사람은 “정치권이 소수자에 대한 공격을 일삼으면서 혐오를 이용해왔다”며 “새 정부 출범 이후에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미루면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깃발을 들기 직전 류씨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고 했다. 원래 사회의 여러 의제에 관심이 많았고, 부산 퀴어퍼레이드 기획단으로 일한 적이 있지만 부산에서 무지개 깃발을 드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류씨는 “부산은 아직 보수적인 사람들이 많고, 누가 얼굴을 알아보면 아웃팅(성 정체성이 타인에 의해 강제로 공개되는 것)이 될까 두려웠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류씨는 깃발을 들기로 했다. “내가 살아온 고향에서 오롯이 ‘나’로서 당당하게 함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윤시우씨가 만든 ‘성소수자를 차별하지 마세요. 우리의 친구일 수도 있는 게 아니라 나다! 나라고 이자식들아!’ 깃발. 윤씨 제공


반면 윤씨에게 불법계엄 이전의 삶은 외톨이에 가까웠다. 집 밖으로 잘 나가지 않았고, 대여섯명만 모여도 ‘사람이 너무 많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집회도 X(옛 트위터)에서 알게 된 친구가 ‘함께 나가자’고 해서 나가게 됐다고 했다.

윤씨가 처음 깃발을 들기로 한 건 3개월 정도 꾸준히 광장에 나갔던 지난달 15일에서였다. 윤씨는 이날 처음 서울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하며 대전 퀴어문화축제에서 쓰려고 만들어뒀던 ‘나다!’ 깃발을 꺼냈다. 대전에서는 윤씨가 좋아하는 목성 사진이 담긴 ‘전국 목성 동호회 연합’ 깃발을 들고 광장에 있었다. 윤씨는 “서울에는 날 아는 사람이 없으니 깃발을 들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무지개 깃발을 들고 나선 경험은 윤씨에게 소중했다. 온라인 세상이 아닌 오프라인에서 성소수자라고 밝힌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지역 성소수자 커뮤니티에도 속해있지 않다. 윤씨는 “혼자 바깥에 자주 나가지도 않던 내가, 무지개 깃발을 들고 대전 집회에도 나갈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윤시우씨가 만든 ‘성소수자를 차별하지 마세요. 우리의 친구일 수도 있는 게 아니라 나다! 나라고 이자식들아!’ 깃발을 들고 있다. 윤씨 제공


두 사람이 든 깃발의 공통적인 정서는 ‘울분’이다. 두 사람은 문재인 전 대통령이 후보 시절 ‘동성애에 반대한다’고 얘기하고, 차별금지법에 대해서는 어떤 정부가 와도 ‘시기상조’라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며 울분을 느껴왔다. 윤석열 정부는 심지어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겠다고 하고 소수자에 대한 공격을 일삼았다고도 느꼈다. 윤씨는 “차별하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느끼다 보니 ‘착한’ 문구로는 깃발을 만들 수 없었다”고 말했다.

계엄 이후 4개월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광장은 이들에게 배움터가 됐다. 집회 초기 일부 시민들은 “‘윤석열 탄핵’을 외쳐야 하는데 왜 성소수자 이야기를 하느냐”는 말을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집회가 진행되고 다양한 의제들이 나오면서 성소수자 존재도 점차 당연해졌다. 조심스럽게 다가와 “퀴어 문제를 잘 모르지만, 함께해줘서 고맙다”고 말해준 시민도 있었다고 한다. 류씨는 “광장에서 극우는 다른 사람을 배척하고 공격했지만, 우리는 연대하고 포용했다”고 말했다.

윤씨는 5인 미만 사업장이던 직장에서 일하다가 최근 해고당했다. 직장에 다니면서 민주노총 대전본부 일반노조에도 가입했다. 회사에서 느꼈던 부당함을 상담할 ‘비빌 언덕’을 광장에서 알게 됐다.

이제 윤씨는 ‘더 넓은 연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지난 19~20일에는 울산·대구 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했다. 윤씨는 “더 넓은 연대와 차별 없는 사회를 꿈꾼다”며 “지역에서도 퀴어로 잘 살 방법으로 차별금지법 제정도 빨리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류모씨가 부산 서면에서 열린 집회에서 깃발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류모씨 제공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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