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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님도 조심하세요" 두 번의 경고
미국 현지 취재 중 두 번이나 우려 섞인 경고를 들었습니다. 폭력 조직 간 다툼을 취재하는 것도, 험난한 재난 현장을 촬영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가 외국인 유학생을 마구잡이로 추방하고 있는 사례를 모으던 중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미국 사회를 면밀히 관찰해 온 김동석 한인유권자연대 대표는 지난달 기자에게 "이번 건은 취재를 조심해야 한다"며, "기자라고 추방에서 안전한 건 아니"라고 조언했습니다. 며칠 뒤 30년 넘게 미국에 거주해 온 경제계 인사 역시 정확히 같은 취지로 경고했습니다. 미국 백악관과 행정부 상층부에서 집중하고 있는 사안인 만큼 자칫 불똥이 저와 같은 외국 국적 기자에게도 튈 수 있다는 겁니다.
통상 특파원들은 인터뷰를 거쳐 취재 비자를 받아 미국에서 활동합니다. 적법한 비자를 갖고 있어도 비판적인 의견을 담은 보도를 하는 것만으로도 일종의 '기피 인물'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하는 겁니다. 좀처럼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근거가 없진 않습니다. 유학생 추방을 주도하고 있는 마크 루비오 국무장관은 여러 차례 "누구도 비자를 받을 권리란 없다"고 말했습니다. "비자는 초청장일 뿐"이라며 "미국 정부 외교 정책이나 국익에 맞서는 행동을 하면 비자를 취소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기자의 취재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은, 다른 한편으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 이민자 사회가 얼마나 움츠러들었는지 보여줍니다. 대체 미국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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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아침에 "너 나가"‥대학가는 공포 분위기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 국익에 반하는 행위로 일단 대학가의 친팔레스타인 시위를 꼽았습니다. 컬럼비아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인 정윤서 학생이 대표적입니다. 한국계 1.5세인 정 씨는 버지니아 출신으로, 고등학교를 수석 졸업한 수재입니다. 3학년까지 3.99의 최우등 평점으로 마쳤고 대학 법학 잡지 편집자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정 씨는 지난달 5일, 학내 시위에 참여했다 추방 대상에 올랐습니다. 지난해 가자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가 대학가를 휩쓸었고 당시 시위를 주도했던 학생들에 대해 징계 절차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이 학생들을 지지하며, 동료 학생 수백 명이 컬럼비아대학 버나드 칼리지 도서관에서 연좌시위를 벌였습니다.
대학가에서 자주 보이던 풍경이지만, 시위 반대 세력으로 추정되는 누군가 경찰에 폭발물 의심 신고를 하면서 상황이 악화됐습니다. 뉴욕 경찰이 진압부대를 투입해 시위대 해산에 나섰고 이때 현장에 있던 정 씨를 비롯한 9명의 학생들이 체포됐습니다. 폭발물 의심 신고는 허위로 드러났습니다. 정 씨 등도 곧바로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극우 온라인 사이트와 SNS에서, 정 씨 등을 '반유대주의'로 낙인찍는 공격이 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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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장관이 직접 한인 여학생 추방 지목
온라인상의 공격은, 이민국의 구금 시도로 이어졌습니다. 정 씨를 잡기 위해 이민국 요원들이 기숙사와 자택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앞서 구금된 컬럼비아대 졸업생, 마무드 칼릴과 유사한 수순입니다. 하지만, 언론 인터뷰와 시위 협상가로 나섰던 칼릴과 달리, 정 씨는 언론에 등장한 적도, 시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적도 없습니다. 정 씨는 7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와, 이미 미국 영주권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미국 정부는 정 씨를 쫓아내야 할 대상으로 꼽았습니다.
하루아침에 추방 위기에 몰린 정 씨는 변호사의 도움으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MBC가 확인한 재판 기록에서, 정 씨는 루비오 국무장관이 직접 추방 대상으로 지목한 2명 중 1명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루비오 장관은 지난 3월, 국토안보부에 보낸 메모에서 "정윤서와 마무드 칼릴 모두 추방될 수 있는 외국인으로 판단한다"며 "이들이 계속 미국에 있으면 잠재적으로 '심각하게 부정적인 외교 정책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미국 정부는 왜 정 씨가 잠재적 위협인지에 대해서 입증하진 못했습니다. 당연히 테러 조직과 소통한 흔적도 없었습니다. 법원은 "정 씨에게 도주 우려가 없고 공공 안전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며 구금 및 추방 시도를 임시로 멈춰 세웠습니다. 정 씨를 변호하는 램지 카셈 변호사는 "트럼프 행정부가 정치적 이유로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카셈 변호사는 MBC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헌법은 정부가 개인의 정치적 의견 표명에 대해 처벌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며 "이민국을 도구로 정치적 발언을 억누르려는 것은 헌법 위반"이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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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교수도 비자 취소‥학생들 "끔찍한 일"
영주권이 있는 정 씨는 법원에 호소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취약한 지위에 있는 유학생과 교수진은 따져볼 기회조차 제대로 얻지 못하고 출국해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텍사스 휴스턴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던 한국인 전 모 교수 역시 학기 중에 수업을 중단하고 귀국 절차를 밟게 됐습니다. 조교수로 임용된 지 채 1년이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비자가 취소됐기 때문입니다. 전 교수는 지난 13일 학생들에게 공지를 보내 "예상치 못하게 비자가 종료돼 즉시 귀국해야 한다"며 "수업을 마치지 못해 미안하다"고 마지막 인사를 남겼습니다.
전 교수의 공지글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온라인에 지지 글을 잇달아 올렸습니다. "지난 학기 수업을 들었는데 훌륭하고 친절한 분이었다. 이 조치는 정말 끔찍하다", "그가 얼마나 휴스턴을 사랑하는지 말하는 게 좋았는데 정말 화가 난다"는 반응이 줄을 이었습니다. 전 교수는 공지글 외에, MBC의 인터뷰 요청에는 답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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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된 적 없는데 체포됐다며 비자 취소"
한인 지원단체엔 최근 비자가 취소됐다는 유학생들의 긴급 상담 전화가 줄을 잇고 있습니다. 동부 지역의 한 대학생은 경찰에 체포된 적이 없는데도, 체포 기록이 있다며 비자가 취소됐다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행정적 오류가 분명하지만 당장 비자가 취소돼 미국에 체류할 근거가 사라진 것이 문제입니다. 취소 사실을 통보 받은 직후 불법 체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해당 학생은 비자 취소 사실 역시 학교측이 아니라, 주한미대사관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뒤에야 알게 됐다고 합니다. 상담 사례 중엔 수년 전 음주 운전으로 적발된 기록이 뒤늦게 문제가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잘못된 행동이지만 갑자기 모든 학업을 접고 쫓아내야 할 긴박한 사유가 있다고 평가하긴 어렵습니다. 루비오 장관이 말한 '미국 외교 정책에 반하는 결과를 낳을 가능성'도 희박한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 정부가 SNS 활동까지 검토하겠다고 하자, 유학생들과 유학 비자 신청자들은 '꼬투리'라도 잡힐까 봐, SNS 계정을 없애거나 게시글들을 삭제하고 있습니다. 미국 이민법 변호사 협회는 친팔레스타인 게시글 등을 이유로, 비자가 취소된 유학생이 4천7백여 명에 달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민법 전문가인 최영수 변호사는 트럼프 대통령의 비상식적인 이민자 추방 목표가 원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공약으로 1년에 1백만 명의 불법 이민자를 추방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취임 뒤 하루 최대 1천4백 명까지로 조정했지만 실적이 이에 못 미치자, 손쉬운 외국인 유학생 등을 먹잇감으로 삼고 있다는 겁니다. 실제 미국 언론은 트럼프 대통령이 적은 단속 실적에 불만을 표하며 화를 냈다고 보도했습니다. 최 변호사는 "겁에 질린 대학들이, 법적 조치에 필요한 서류 발급조차 도와주지 않고 있어,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