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니언] ‘2인 체제’ 방통위를 위한 법원 가이드
이진숙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이 지난 1월23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자신의 탄핵심판 사건 선고를 기다리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2인 체제’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의 일방통행에 또다시 제동이 걸렸습니다. 법원이 2인 방통위의 신동호 교육방송(EBS) 신임 사장 임명처분을 효력 정지해달라는 김유열 사장의 가처분 신청을 지난 7일 받아들인 겁니다.
사실 2인 체제 방통위의 심의·의결을 두고 위법성 소지를 지적한 법원의 판단은 그동안 몇차례 있었습니다. 대통령 추천 몫인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김태규 부위원장 2인 체제가 강행한 공영방송 이사 선임 등 결정은 방통위를 상임위원 5인의 합의제 기구로 전제한 방통위법의 입법 목적을 저해한다는 등 지적도 뒤따랐고요.
그런데 신동호 사장 임명 효력 정지에 관한 이번 법원 결정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법원이 ‘그렇다면 2인 체제 방통위가 할 수 있는 심의·의결 사무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에 관한 나름의 해답도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지금껏 2인 체제 위법성에 관한 법원의 주요 결정과 근거들을 살펴본 뒤, 12쪽 분량의 이번 결정문에서 새롭게 톺아봐야 할 내용은 무엇인지 짚어보고자 합니다.
잇따르는 ‘2인 체제 의결은 위법’ 판단
앞서 지난해 8월 서울행정법원은 이진숙 위원장이 취임 당일 김태규 부위원장과 함께 심의·의결한 문화방송(MBC) 대주주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이사 6명에 대한 임명처분의 집행정지를 결정했습니다. 이진숙 방통위가 출범과 동시에 방문진 이사 물갈이를 시도하자 권태선·김기중·박선아 등 야권 이사 3명은 2인 체제 위법성을 주장하며 임명 취소 소송에 나섰는데, 법원이 가처분 사건에서 이들의 손을 들어준 겁니다. 방통위는 이에 불복해 항고와 재항고를 거듭했으나, 이후 고법과 대법원의 판단도 1심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이진숙의 완패였습니다.
비록 전임 김홍일 위원장 재임기 사건이기는 했습니다만, 2인 체제에 대한 법원의 위법성 지적은 지난해 10월 본안 소송에서도 이어졌습니다. 뉴스타파의 ‘김만배-신학림 녹취파일’을 인용 보도했다는 이유로 지난해 1월 방통위로부터 15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은 문화방송이 2인 체제 위법성을 주장하며 방통위를 상대로 낸 제재 취소 소송 1심에서 승소한 겁니다.
물론 2인 체제 방통위 심의·의결의 위법성을 인정해달라는 신청인(주로 각 방송사 쪽)의 요구가 모두 받아들여진 건 아닙니다. 법원은 지난해 2월 전국언론노동조합 와이티엔(YTN)지부와 와이티엔 우리사주조합이 방통위를 상대로 낸 최다액출자자 변경승인 처분(YTN 매각) 집행정지 신청을 각하·기각했고요, 최근엔 한국방송(KBS) 전 감사가 방통위의 신임 감사 임명처분에 반발해 낸 집행정지 신청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두 사건 재판부는 2인 체제 위법성보다는 ‘신청인의 자격’이나 ‘침해되는 이익 또는 방통위 처분에 따른 손해의 성질·내용·정도’를 따졌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법원 “방통위는 5인 합의제 기구” 재차 강조
법원이 2인 체제의 법적 정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본 이유는 명쾌합니다. 방통위는 입법 취지상 정치적 다양성을 반영할 여야 3 대 2 구도의 합의제 기구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 그런 만큼 대통령 몫 상임위원 두명만으로 중요한 사항을 마음대로 결정하지 말란 것입니다.
먼저 법원은 방문진 이사 6명 임명 집행정지 결정 당시 “단지 2인의 위원으로 피신청인(방통위)에게 부여된 중요 사항을 심의·의결하는 것은 방통위법이 추구하는 입법 목적을 저해하는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정에 비추어 보면, 신청인(방문진 야권 이사 3인)들이 이 사건 본안 소송을 통해 이 사건 임명처분의 적법 내지 위법 여부를 다툴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실제 방통위법상 방통위는 대통령이 지명하는 2인(위원장 포함)과 국회 추천을 받아 대통령이 임명하는 3인(여당 1인과 야당 2인)으로 구성된다고 법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 방통위의 현실은 어땠습니까. 윤 전 대통령은 2023년 5월 전임 대통령이 임명한 한상혁 전 방통위원장을 강제 면직시킨 자리에 자신과 가까운 이동관-김홍일-이진숙 이런 인사를 차례로 꽂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야당이 그해 3월에 추천한 최민희 방통위원 후보자의 임명은 뚜렷한 설명 없이 반년 넘게 거부했고요. 덕분에 방통위는 사실상 윤 정부 내내 1~2인 체제로 꾸려져 왔습니다.
법원이 “방통위법은 방송의 공정성과 독립성을 보장하고 그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확보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으로서, 기본적·원칙적으로 정치적 다양성을 반영한 5인의 상임위원으로 구성된 회의를 전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한 것은, 결국 방통위를 독임제 부처처럼 운영하며 ‘방송 장악’ 논란을 빚어온 윤 전 대통령에 대한 경고였다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문화방송 과징금 처분 집행정지 사건 담당 재판부의 판단도 비슷했습니다. 당시 재판부는 “방통위가 2인 위원으로만 구성된 상태에서 의결을 내린 제재조치는 의결정족수를 충족하지 못한 절차적 하자가 있어 위법하다”며 방통위 의결이 최소 3명 이상의 위원이 있는 상태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김유열 교육방송(EBS) 사장이 지난 3일 서울 서초구 서울행정법원에서 열린 신동호 사장 임명처분 집행정지 신청 변론기일에 출석하며 취재진에 입장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일하지 말란 거냐’ 어깃장에 대한 대답
2인 체제의 심의·의결 결과를 두고 법원의 ‘위법하다’는 지적이 잇따르자 이진숙 방통위가 새롭게 들고 온 논리가 있습니다. 지난 3일 신동호 사장 임명 효력정지 가처분 사건 심문 당시 “방통위가 2인의 위원으로 운영됐다는 이유로 그 심의·의결이 당연 무효나 취소 사유에 해당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면, 방통위가 그 소관 사무를 처리할 수 없게 되어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는 등 공공복리에 중대한 영향을 초래한다”고 주장한 겁니다. 쉽게 말해서 ‘2인 체제에선 아무 일도 하지 말란 거냐’고 어깃장을 놓은 셈입니다.
이에 법원은 “이 사건 처분은 이비에스(EBS) 사장의 임명을 내용으로 하는 것으로서 방통위의 전반적인 기능 행사와 관련된 것이 아니므로, 이 사건 처분의 효력정지로 인하여 2인의 위원으로 운영되는 방통위가 행한 모든 처분의 효력이 사실상 무효가 되어 피신청인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사정에 이른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짚었습니다. 사실 이진숙 방통위의 ‘일 못 한다’는 억지에 대해 이 정도만 설명해도 됐을 텐데, 법원은 친절하게도 부연설명도 제시했습니다.
방통위법은 방통위의 소관 사무 중 방송과 관련된 규제 정책과 그 집행 등에 관한 주요 사항을 제외한 나머지 행정업무에 대해서는 회의체를 통한 심의·의결을 요구하고 있지 않으므로, 조직 관리·운영 업무 등을 비롯한 일반적 행정업무에 관하여는 회의체를 통한 심의·의결을 거치지 않고도 의사결정이 가능하고, 단지 법령에서 합의제 방식의 의사결정을 강제한 사항에 대하여만 다수결의 원리가 적용되는 실질적인 합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상태로는 의사결정을 할 수 없을 뿐이다.
방통위법 12조에서는 위원회의 소관 사무 가운데 심의·의결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 29개 사항을 일일이 열거하고 있습니다. 재판부는 이들을 제외한 일반 사무에 대해서는 2인 체제에서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다는 점을 짚은 것이지요.
아울러 방통위가 심의·의결해야 할 사항이라고 해서 무조건 2인 체제에서 할 수 없다고 한 것도 아닙니다. 재판부는 “방통위의 소관 사무가 회의체를 통한 심의·의결 대상인 경우에도 방송의 자유, 독립 등 중대한 공익과 관련되지 않은 사항에 대해서는 위와 같은 문제를 들어 이를 당연 무효나 취소 사유에 해당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덧붙였습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교육방송 사장 임명처럼 방송의 자유, 독립 등 중대한 공익 사항의 경우라면 2인 체제로 심의·의결했을 때 문제가 될 수 있겠지요. 신동호 사장 건 관련 김유열 사장의 소송대리인 정민영 변호사(법무법인 덕수)는 8일 한겨레와의 전화통화에서 “방통위 결정이 방송의 공공성·독립성 침해 논란을 빚어낼 수 있는 사안이라면, 2인 체제가 아닌 다수결의 원리가 적용되는 합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판단을 제시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진숙 방통위가 현재 진행 중인 지상파 방송사업자 재허가 심사를 둘러싼 논란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방통위가 꾸린 재허가 심사위원회는 지난 3일부터 문화방송 등 12개 사업자, 146개 채널을 대상으로 사업자 의견 청취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이진숙 위원장이 평소 재허가 대상 중 한곳인 문화방송을 겨냥해 ‘민주당·민노총 브로드캐스트 코퍼레이션’ 등 희한한 표현까지 써 가며 공개적으로 비방해왔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진숙-김태규 방통위가 꾸린 심사위는 공정한 심사를 할 수 있을까요. 또 각 방송사업자는 이런 방통위의 재허가 심사에서 불이익을 입게 된다면,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이미 92개 언론·시민단체로 꾸려진 언론장악저지공동행동은 “방통위의 독립성과 공정성이 담보되지 않을 때 재허가 제도는 ‘공영방송 길들이기’ 수단으로 변질할 수밖에 없다”며 2인 체제 방통위의 재허가 심사 자체에 반대하고 나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