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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전소돼 체육관 바닥에 매트·이불 깔고
대피소 생활 장기화에 고령층 건강 우려도
2022년 울진 산불 이재민 3년째 대피소에
최대 2년 거주에도 새집 건축 부담 이유
31일 경북 청송군 진보문화체육센터에 마련된 대피소에 이재민들의 빨래가 널려 있다. 청송=김정혜 기자


"그래도 다른 데 보단 낫겠지 싶어서 왔어요."


31일 경북 영양군 석보면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 의성군에서 발화한 대형 산불로 석보면 화매리 자택이 전소된 오모(65)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씨는 줄곧 인근 마을회관에서 지내다 이날 오전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씨는 "마을회관에서 20명이 넘게 지내다 보니 생활이 너무 불편했다"며 "이곳도 누가 알려줘서 왔지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다"고 말했다.

영양군이 운영하는 숙박교육시설인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 내 15실에는 이재민 40여 명이 생활하고 있다. 그러나 객실 수가 부족해 각 가구가 구분되지 못하고 섞여 지내기도 한다. 한 주민은 "조립 주택을 짓는다는데 제비뽑기로 먼저 들어갈 사람을 뽑는다고 하더라"며 "계속 바깥 생활을 하다 보니 몸도 안 좋아져 임시 주택에라도 빨리 가고 싶다"고 하소연했다.

30일 경북 안동시 안동실내체육관 대피소에서 머물고 있는 안동 시민들이 근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다. 안동=김재현 기자


영남지방을 휩쓴 대형 산불의 주불이 잡혔지만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재민들의 고통은 커지고 있다. 정부는 임시 주택을 짓겠다는 계획이지만 신속히 공급이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이재민 대부분 고령층인데 대피소 생활이 장기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증폭되고 있다.

이날 산불 대응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등에 따르면 오전 9시 기준 영남 산불로 대피한 이재민은 총 3,171명이다. 경남 산청·하동군의 47명을 제외한 3,112명이 의성군, 안동시, 청송군, 영양군, 영덕군 등 경북에서 발생했다. 이재민 대부분은 실내체육관과 교육시설 등에서 생활하고 있다.

권도경 한의사가 30일 경북 안동시 길안면 길안중 이재민 대피소에서 환자들을 진료하고 있다. 안동=김재현 기자


정부는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고 하지만 이재민들의 생활은 녹록지 않다. 대부분 구호 텐트 안에 매트와 이불 등을 깔고 잠을 청한다. 화장실과 샤워실 등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도 어려움이다. 공기청정기가 24시간 돌아가도 사람들이 모여 지내는 탓에 실내 공기질이 좋지 않다. 많은 노인들이 호흡기질병에 대한 두려움에 마스크를 벗지 못한다.

30일 오전 안동시 길안면 길안중학교 이재민 대피소 입구 한편에 경북한의사회가 마련한 진료소에는 주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안동시한의사회 권도경 한의사를 비롯한 의료진들은 건강 체크리스트와 함께 상담, 약침들을 놓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 대피소에는 70여 명 주민이 머무는데, 대부분 고령이다. 권 한의사는 "어르신들이 오랜 기간 집을 나와 계시다 보니 가벼운 감기 증상이나 어깨결림, 허리 통증 때문에 진료를 많이 받았다"며 "생활하기 편한 환경이 아니다 보니 불면증을 호소하는 분들도 더러 있다"고 말했다.

경북 안동시한의사회 관계자들이 30일 안동시 길안면 길안중 대피소에서 환자들을 진료하고 있다. 안동=김재현 기자


박모(80)씨는 "일주일째 바닥에서 생활하다 보니 온몸이 찌부둥하고 불편한 곳이 생긴다"고 하소연했다. 김경한(66) 길안면 주민자치부위원장은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라며 "이것저것 지원해준다고 해도 집만 한 곳이 어디 있겠나"라고 안타까워했다.

청송군 진보문화체육센터에서 만난 정모(75)씨 역시 가족의 건강 상태를 우려했다. 정씨는 "밥도 주고 빨래도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집이 편한 건 당연하다"며 "남편이 치매가 있는데, 놀랐는지 상태가 좋지 않아져 걱정"이라고 말했다.

31일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태마을에서 한 주택이 산불 피해로 주저앉았다. 산청=연합뉴스


경남도 이재민 수는 적지만 열악한 사정은 마찬가지다. 산청에서는 산불로 집이 전소된 중태·외공·자양마을 주민들 24명이 대피소에 머물고 있다. 이들은 단성중 체육관 등에서 텐트 생활을 하다 지난 29일 한국선비문화연구원 내부 숙소로 옮겼다. 한 번에 3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에 침대와 TV, 냉장고, 화장실 등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지만 이재민들은 기약 없는 대피 생활에 지칠 대로 지친 상태다. 숙소에서 만난 외공마을 주민 하문구(60)씨는 "2인 1실에 식사 등도 원활하게 제공돼 생활에 큰 지장이 없다"면서도 "아무리 몸이 편한들 마음까지 편하겠느냐"며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마을 3분의 1이 불에 탄 중태마을 주민 70대 김모씨는 "지금은 다들 관심을 가져주지만 한 달 후 어찌 될지 모른다"며 "벌써 이재민에게 제공되는 공동식사를 비용만 주고 개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오가는데 이런 시골에서 차도 없이 무슨 수로 끼니를 해결하느냐"고 토로했다.

영남 산불 주민 대피 현황. 그래픽=신동준 기자


불편함을 감수하고 귀가한 뒤에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허다하다. 안동 길안면 주민 박모(75)씨는 "전기가 들어왔다고 해 집에서 지낼까 했지만 남아난 세간살이가 없는 데다 식사 해결도 어려워 한동안 대피소를 왔다 갔다 하기로 했다"며 "일교차가 심해 난방 없이는 잠을 자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산청 외공마을 이장 김원중(54)씨도 "마을 골목 정도만 정리했을 뿐 전소된 이웃집들은 아직 피해 조사 단계라 손도 못 대고 있다"면서 "주민들이 하루빨리 안정을 되찾을 수 있도록 신속하게 복구 작업이 이뤄지길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과거 사례에 비춰 주민들의 대피소 생활이 장기화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2022년 경북 울진 대형 산불 당시 보금자리를 잃은 일부 주민들은 3년 넘게 대피소 신세를 지고 있다. 이재민 181가구 중 30가구는 아직도 대피소에서 지낸다. 대피소는 최대 2년까지만 살 수 있지만 주민들은 건축비 부담을 이유로 새로운 주택 짓기를 부담스러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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